<선물, 대가 없이 주고받는 일은 왜 중요한가> - 루이스 하이드
내가 좋아하는 문장이 있다. “부자는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많이 존재하는 사람이다.” 근래 들어서 내 삶의 모토로 꼽았지만, 내가 그 의미에 대해서 얼마나 깊게 이해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여기서 말하는 ‘존재한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가? 어떻게든 대답해보자면 “내면이 원하는 것을 행하는 것, 자연을 관조하는 것” 정도로 말할 수 있을 텐데, 그것은 너무 모호하다. 누군가가 내게 와서 “그 말대로라면 열심히 돈을 벌지 않아도 되고, 술 마시고 놀면서 넷플릭스만 봐도 되겠네요?”라고 묻는다면, 나는 여기에 확실한 답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술 마시고 넷플릭스만 보는 게 내면이 원하는 거라면? 그리고 자연을 관조하는 것과 넷플릭스 화면을 보는 것은 뭐가 다른가? 그것은 왜 존재하는 삶이 아닌가?
나는 거기에 대한 실마리를 <선물>책에서 찾았다. ‘존재함’을 느낀다는 것은 선물을 받아들이고 소화시키고 내뱉는 일련의 과정을 느끼는 것이다. 마치 ‘선물의 목 넘김’이랄까? 나에게 들어온 것을 가둬서 소유하려는 게 아닌, 순환하게 하는 것, 내게 오는 선물들에 노동을 보태어 다시 흘려보내는 것이다. 선물을 가두고만 있다면 ‘존재함’을 느낄 수 없다. 아무리 큰 선물(gift = 재능)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을 발휘하지 않고, 단순히 돈을 따르며 재능을 외면하는 삶을 산다면, 그는 ‘존재함’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설령 돈을 많이 벌더라도 불행할 수 있다. 왜냐하면 ‘존재함’의 느낌은 선물이 움직이는 활동에서 오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아까의 질문 “열심히 돈을 벌지 않아도 되고, 술 마시고 놀면서 넷플릭스만 봐도 되겠네요?” 에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이 존재하라고 해서 열심히 살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른 의미로 열심히 살라는 말이다. 자신도 선물의 순환 릴레이에 참여하여 노동을 보태야 한다. 그러므로 침대에 누워서 컨텐츠만 소비하는 삶은 ‘존재’하는 삶이 아니다. 그것은 컨텐츠를 ‘소비’하는 삶이다. 어떤 선물도 받아들이지 않으며, 어떤 노동도 하지 않는다. 수동적으로 화면을 들여다볼 뿐이다. 반면 자연을 관조하는 것은 다르다. <선물>책에 나오는 휘트먼에게 그러했듯이 자연은 선물이다.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선물을 주고 휘트먼은 거기에 노동을 보태어 ‘시’라는 새로운 선물로 세상에 내놨다. 그래서 자연을 관조하는 것도 선물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므로 ‘존재함’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다.
내가 “많이 존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선 배우기를 멈춰서는 안 된다. 멈추게 된다면 나에게 들어오는 선물을 차단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책을 읽고 사람들과 대화하고 자연을 보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들어오는 선물이 있다면 그것을 버무려서 다시 세상에 내놓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 과정속에서 나는 ‘존재함’을 많이 느끼는 부자가 되어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