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왔습니다.
올해는 2019년의 흐름이 보다 전면에 부각된 한 해 였습니다. 빌보드 재팬 HOT 100에서 연간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한 요아소비(YOASOBI)의 히트는 이를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는데요. 음원으로만 발매된 ‘夜に駆ける’가 오랫동안 피지컬 시장이 지배해 온 일본 시장에 결정타를 안겨준 셈이죠. 이러한 흐름 속에 시디 발매 없이 스트리밍으로만 신곡을 발매하는 아티스트 역시 눈에 띄게 늘었습니다.
더불어 라이브 시장이 활성화 되어있는 일본에게 코로나19의 습격은 큰 재앙과도 다름 없었는데요. 저변이 탄탄한 곳임에도 많은 라이브하우스 들이 겨우 명맥을 유지하거나 폐업하는 등 악재가 뒤따랐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뮤지션들이 직접 발 벗고 나서기도 했는데요. 단체를 조직해 채리티 프로그램을 조직하는가 하면, 아무런 조건 없이 무명 시절 활동했던 공연장에 기부하는 등 도움의 손길이 이어졌죠.
공연의 온라인 전환도 빠르게 이어졌습니다. 코로나가 오히려 다양한 형태로의 컨텐츠 제작을 부추긴 셈이 되었다고 할까요. 원체 라이브 촬영/연출에 노하우가 쌓여있던 신이다 보니, 몇몇 플랫폼의 도움을 받자 금새 적응해 비대면 라이브를 적극 송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올 초에는 넘버 걸이나 아이코 등이 시험적으로 무료 라이브를 시행하더니, 최근엔 오피셜히게단디즘이나 아이묭, 비즈, 유즈 등 선후배를 가리지 않고 유료 온라인 공연을 개최했죠, 특히 사잔 올스타즈의 요코하마 아리나 무관객 공연은 18만장의 티켓을 팔아 치우며 음악신의 새로운 미래를 예감케 했습니다.
이처럼 코로나로 인해 모두가 힘들었을 한 해이지만, 꾸역꾸역 버텨온 아티스트와 스태프, 제작자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또 올 한해 좋은 음악들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모두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네요. 그러면 올해는 과연 어떤 음악들이 특히 저를 즐겁게 했을지, 올해로 벌써 10번째가 되는 제이팝 연말결산! 여러분들에게도 좋은 가이드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읽으시는 분들도 올해 좋았던 앨범들 댓글로 같이 공유해주시면 좋을 것 같네요! 찾아와주시는 분들의 의견도 기다리겠습니다~ (앨범은 가나다 순)
레오루(REOL) < 金字塔 >
서브컬쳐 신의 또 다른 가능성
레오루의 음악은 여느 우타이테/보카로P의 작품들과 그 노선을 달리한다. 요즘 주목받는 요루시카나 요아소비, 이브 등이 치밀한 구성의 팝 록을 지향하는 반면, 그는 어디까지나 댄스뮤직의 극한을 향해 간다. 자극적인 EDM 사운드가 분열과 합체를 거듭하는 리드곡 ‘金字塔’ 부터 귀에 쩍쩍 달라붙는 흡입력을 자랑. 90년대 제이팝과 빈티지한 샘플링의 화학작용이 놀랍도록 동시대의 결과물로 분하는 ‘HYPE MODE’, 어느 곡보다 하마사키 아유미의 음색이 연상되는 날카로운 보컬이 낙차 큰 음색으로 듣는 이의 본능을 자극하는 ‘ゆーれいずみー’의 초반 맹공은 ‘음악으로 새로운 문명을 일으켜 세우겠다’는 거창한 캐치프라이즈가 절대 허언이 아님을 증명한다.
커리어 초반부터 함께해 온 사운드 크리에이터 기가(Giga)와의 호흡은 어느때보다도 큰 시너지를 내고 있으며, 퍼커션을 중심으로 보다 원초적이며 몽환적인 풍경을 그려내는 ‘ハーメルン’은 스이요비노캄파넬라(水曜日のカンパネラ)의 켄모치 히데후미와의 태그가 유효했던 트랙. 적절한 라임과 인토네이션의 활용이 중독적인 프레이즈를 구현하는 ‘insider’를 통해선 목적지로 향하는 다양한 루트가 이미 자신의 손안에 있음을 넌지시 알려주는 듯하다.
과거와 현재의 요소를 뒤섞어 구축한 ‘레오루 월드’, 댄스뮤직의 새로운 경지를 열어젖힘과 동시에, 신비주의가 만연한 서브컬처 신에서 이처럼 존재감이 뚜렷한 ‘솔로 아티스트’를 만나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이 가지는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미 132만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이세계 거물의 메인스트림 점령, 그 발걸음에 무게를 실어주는 기상천외한 소리세계
료쿠오쇼쿠샤카이(緑黄色社会) < SINGALONG >
개인의 시대에 전하는 ‘TEAM MUSIC’의 위대함
나는 이 작품을 이렇게 언급하고 싶다. 내면을 지향할지언정, 듣는 이를 절대 배제하지 않는 음악. 모두가 공감할 만한 보편적인 메시지와 보컬 나가야 하루코의 뛰어난 가창력, 이상적인 팝 록 사운드로 꽉 찬 온기 가득한 앨범이라고. 한참 라이징할 타이밍이었기에 코로나 습격이 뭇내 아쉽긴 하지만, 그들에게 2020년은 조직력이 돋보이는 팝 록 사운드로 대중음악신에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낸 한 해였다.
탄탄한 균형감은 멤버들간의 호흡에서 비롯되는 법. 나가야 하루코 작사/곡의 ‘sabotage’와 ‘Shout Baby’에선 보컬 본인이 강하게 리딩하는가 하면, 페페의 리드미컬한 연주가 곡의 포인트로 작용하는 ‘あのころ見た光’, 보다 트렌디한 음악을 선호하는 코바야시 잇세이의 의도가 전면에 드러나는 댄서블 록 ‘inori’, 파워풀 한 록 사운드를 지체 없이 펼쳐보이는 아나미 싱고 작곡의 ‘スカーレット’ 등 각자의 스펙트럼으로 구축한 순간순간이 역동적이고 몰입감 있게 구성되어 있다.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을 거추장스러워하며 홀로 마스터 키보드로 리듬을 찍고 마이크 앞에 서는 이들을 정면반박하는, 언젠가 터질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밴드의 쾌거.
류 마츠야마(Ryu Matsuyama) < Borderland >
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소재로 구축한 피아노 록의 새로운 일면
‘Go Through, Grow Through’를 듣다 보면 앨범의 지향점이 어렴풋이 그려진다. 액센트를 살린 드럼 연주, 광활한 대지를 달리는 키보드 아르페지오와 관악 세션. 보컬과 키보드를 맡고 있는 류의 희망 어린 목소리는 새 시대의 찬가를 선물하는 듯하다. 카테고리는 피아노 록으로 구분되어 있지만, 작품은 그 이상을 포괄한다. 콜드 플레이의 < Ghost Stories > 앨범이라던가, 본 이베어 혹은 멈포드 앤 선즈나 플릿 폭시즈 같은 인디 록, 존 레전드나 제프 버클리와 같은 싱어송라이터들의 기운도 느껴진다. 단순히 장르만으로는 이들의 음악을 구분 짓고 정의할 수 없다는 점. 그것이 들을 때마다 매번 다른 감흥을 선사하는 요인이다.
작곡자이자 드러머이기도 한 마바누아를 프로듀서로 초빙, 그 결과 블랙뮤직을 강조함과 동시에 리듬악기가 주는 그루브에 더욱 집중하는 작품이 되었다. 여기에 본래 가지고 있던 각 멤버들의 음악적 취향이 더해져 그야말로 국경의 의미가 사라지는 ‘보더랜드’의 일면이 수록곡들에 잘 스며들어 있다.
복합적인 리듬의 드럼/베이스 연주와 단선적인 신시사이저의 만남이 고즈넉한 풍경을 그려내는 ‘Sane Pure Eyes’, 히츠지분가쿠(羊文学)의 시오츠카 모에카와 함께 답이 없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착실히 그려가는 ‘愛して, 愛され’, 소울과 가스펠의 기운을 끌어 진정성 어린 목소리를 들려주는 ‘Friend’ 등. 자칫 어렵게 들릴 수도 있는 크로스오버 문법을 친근하게 풀어내며 피아노 록에 입체적 질감을 부여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장르나 국경 등 한계를 두지 않은 무한한 소재를 통해 구축한 광활한 초원같은 앨범.
리걸 리리(リーガルリリー) < bedtime story >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견되는 동시대의 포스트 록
리걸 리리의 라이브를 본 입장에서 이들을 설명하는 단어는 단연 ‘음압’이다. 단순히 외견만 보고, 혹은 대표곡인 ‘リッケンバッカー’만 듣고 찰랑찰랑한 팝 록을 하는 밴드라고 생각한다면 오산. 무게감 있는 디스토션을 실은 기타 사운드는 피킹을 거듭할 때마다 공연장에 서 있던 나를 조금씩 주저 앉힐 정도였으니. 다운튜닝 기조의 무겁고 둔탁한 록 사운드, 외유내강의 보컬로 어둠 속 한줄기 빛을 발하는 다카하시 호노카의 음색, 결국에는 이를 궁극의 미학으로 이끄는 팝 멜로디와 시적인 가사. 가능성만을 오랫동안 논하게 했던 그 인고의 시간은, 자신들의 장점을 풀렝스로 완벽히 구현해 낸 이 작품을 통해 실체로서 대중들과 대면하게 된다.
뿌연 안개와 같은, 리버브와 딜레이가 가득한 기타 사운드에 “신이시여 부디 웃는 얼굴로”라는 가사를 태연하게 노래하는 짧은 리드곡 ‘ベッドタウン’엔 그 아이덴티티가 숨김없이 응축되어 있다. 무게감 있는 연주에 꿈결 같은 가창이 미경험의 경지로 이끄는 ‘GOLD TRAIN’, 파퓰러하지만 가사의 심오함은 놓지 않은 덕에 적지 않은 여운을 남기는 ‘1997’, 불안하기에 더욱 아름다운 기타 아르페지오가 큰 스케일로 확장되어 가는 과정의 경이로움이 목격되는 ‘ハナヒカリ’, 다카하시 호노카의 나레이션이 세계관을 더욱 굳건히 하는 엔딩 ‘bedtime story’까지.
언뜻 들으면 1990년대 사이키델릭 록의 대표주자로 통했던 슈퍼카(SUPERCAR)나 넘버 걸(NUMBER GIRL) 등이 떠오르는 전위적인 애티튜드가 느껴지기도 한다. 그만큼 음악에서 느껴지는 그들의 결의와 각오는 보통의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 새로운 록 스타의 롤 모델을 제시하는 그들의 첫걸음, 그 실루엣이 실로 완벽하다.
미레이(Milet) < eyes >
레이와 연호의 시작, 그리고 새로운 10년의 시작.
이토록 완벽한 데뷔앨범이라니. 처음 그의 노래를 접했을 때도 그랬지만, 이 작품으로 더욱 실감할 수 있었다. 일본이 레이와를 맞이했음을, 그리고 우리는 새로운 10년을 맞이했음을. 그만큼 올 한 해 새로움과 완성도에 있어 패러미터의 극단을 가리켰던 미레이의 데뷔작은, ‘일본음악’이라는 굳건한 형태를 단박에 깨뜨린 후 자신만의 해법을 담은 궁극의 소리를 지향하고 있다.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그의 가창이 ‘일본어’를 다루는 방식이다. 일반적인 가수들과는 명확히 다른 액센트를 통해 영미권의 트렌디한 사운드와 만났을 때 튀는 특유의 위화감을 잡아냈다는 것. 일본어와 영어 간의 완벽한 조화를 보여주는 ‘Parachute’가 대표적. 그런가 하면 노래마다 팔색조처럼 변하는 표현력 또한 발군. 강한 어프로치를 보여줘야 하는 ‘inside you’에는 벤딩의 적극적인 활용과 함께 지긋이 눌러주는 가창을 보여주며, 활기를 머금은 팝 사운드 ‘us’는 기교를 최대한 배제한 채 자연스레 접근한다. ‘Prover’는 어떤가. 클래시컬한 편곡에 맞춰 보다 성악에 가까운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있다. 데뷔 1년여만에 보여주는 역량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치 폭넓고 탁월하다.
언어로 보자면 영어와 일본어를 동일한 감각으로 음악에 내재했으며, 장르로 보자면 일렉트로니카, 어쿠스틱, 클래식, 영화음악, 알앤비, 앰비언트, 팝 모두를 ‘미레이’라는 이름안에 종속시켰다. 음악 스타일에선 리얼세션이던 전자음악이던 가리는 법이 없으니, 가히 천하무적이라 할 만하다. 18곡이라는 방대함 속 담겨있는, 1년 동안 들어도 결코 질리지 않는 망망대해. 카테고리라는 카테고리는 모조리 무너뜨린, 그야말로 음악의 미래를 가리키는 올 한 해를 통틀어 최고작.
미야모토 히로지(宮本 浩次) < 宮本, 独歩 >
밴드의 프론트맨이 아닌 온전한 보컬리스트로서의 그로.
그가 밴드 엘레펀트 카시마시로 데뷔한 것이 1988년이니, 솔로 앨범이 나오기까지 무려 33년이라는 시간이 걸린 셈이다. 오랜 시간 동안 꾸준히 앨범을 내오며 자신의 많은 모습을 소모했을 법도 한데, 이 작품을 통해 다가오는 미야모토 히로지라는 아티스트는 굉장히 새롭다. 그렇게 느껴지는 이유는 크게 두가지. 밸런스를 중시한 밴드음악에서 ‘보컬리스트’의 정체성을 부각시켰다는 점이 하나. 주변의 동료들과 의기투합해 아직까지도 발견되지 못했던 미지의 그를 발견했다는 점이 또 다른 하나다.
명 프로듀서 코바야시 타케시와의 태그가 선명한 로큰롤의 궤적을 그리는 ‘ハレルヤ’, 펑크(Punk) 장인 켄 요코하마의 기타가 놀라울 정도의 직선적 에너지를 내뿜는 ‘Do you remember?’, 시이나 링고가 이끄는 본능적인 여행에 동참하는 브로드웨이 튠과 재즈 터치, 라틴뮤직의 융합 ‘獣ゆく細道’과 같은 곡들은 밴드이기에 숨겨둬야 했던 타인과의 시너지가 대방출.
그럼에도 정수는 따로 있다. 비장함이 흐르는 쇼와가요 풍의 ‘冬の花’는 그의 처절한 음색과 맞물려 ‘미야모토 히로지’라는 아티스트의 발자취를 읊어주는 듯 하고, 절망 뒤에 다시금 행복이 있음을 노래하는 ‘夜明けのうた‘에선 보다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소리를 내는 그의 자연스러움이 묻어난다. 빌리지 피플의 ‘YMCA’가 연상되는 흥겨운 리듬의 ‘Fight! Fight! Fight!’과 조금의 힘도 남겨두지 않고 모두 쏟아내며 대미를 장식하는 ‘昇る太陽’까지.
‘지금 이 순간 너와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그런 열혈 넘버들로 가득 차 있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타고난 역량과 꾸준한 경험이 합쳐져 러닝타임 전반을 지배하는 보컬은 듣는 이를 자신의 뜻대로 쥐고 흔드는 가공할 리더십을 보여주고 있을 정도. 오랜 시간 진심을 바쳐 팀에 충성해 온 보컬리스트의, 오랜기간 묵혀 둔 온전한 자신을 내건 늦깎이 데뷔작.
바운디(Vaundy) < strobe >
다채로운 음악으로 펼쳐 보이는 ‘1인 프로듀서’의 세계
데뷔곡 ‘東京フラッシュ’을 들어본 이들은 대개 이런 질문을 내뱉었을 것이다. “음? 바운디가 누구지?” 이처럼 아무런 사전정보 없이 툭 던져진 이 곡은 일본 대중음악신에 결코 작지 않은 충격파를 일으켰다. 인트로의 중독적인 기타리프와 시티 팝과 블랙뮤직을 촘촘히 뒤섞은 연주, 멜로우한 선율이 가미된 전무후무한 감각의 레트로는 신예의 출현을 제시하는 명확한 단서였다. 스포티파이는 일찌감치 한해를 장식할 신예를 뽑는 < Early Noise >로 그를 선정하는 등, 될성부른 떡잎은 올 초부터 이미 만개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보다 스트레이트한 기타 록 사운드와 신시사이저의 조화가 단순히 레트로에 의존하는 뮤지션이 아님을 보여주는 ‘怪獣の花唄’, 댐핑감이 돋보이는 비트를 활용해 자신만의 스타일로 붐뱁을 재해석하는 ‘不可幸力’, 쫀쫀한 비트의 탄성 및 강렬한 신스 리프의 하모니가 평범한 일상을 댄스 플로어로 전환하는 ‘soramimi’, 스케일 큰 슬로우 넘버가 보편성을 거머쥐는 ‘僕は今日も’ 등. 다양한 테마의 트랙들을 듣다보면 예상보다 스펙트럼이 넓은, 이와 함께 자신의 것들은 반드시 지키고야 마는 뮤지션임을 직감할 수 있을 터.
더불어. 그의 등장은 모든 것을 혼자 해내는 ‘멀티 아티스트’의 등장이 가속화되고 있다는 증거로도 활용될 법하다. 작사/작곡/편곡 뿐 아니라 아트워크 디자인과 뮤직비디오 감독까지. 자신의 이름을 걸고 나오는 모든 결과물에 대한 통제 권한을 보유함과 동시에, 일관성을 부여함으로서 몰입을 유도하는 그의 솜씨. 본 작품은 그 역량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탄탄한 결과물이다.
사이다 걸 (サイダーガール) < SODA POP FANCLUB 3 >
유려한 송메이킹, 탄탄한 연주, 입에 붙는 후렴구. 기본에 너무나도 충실한 작품.
이 정도의 명쾌한 팝 록 사운드를 견뎌낼 재간이 있는가. 적어도 난 없다고 확신할 수 있다. 명쾌하면서도 직선적인 연주와 노래. 특히 가사의 울림과 리듬감을 고민한 흔적이 느껴지는 유려한 워딩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밴드의 세번째 정규작. 작년의 리그렛걸(reGretGirl)의 < soon >에 비견할 수 있는, 대중성 측면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성과를 보이고 있는 작품이다.
특히 초반 세곡의 집중력이 무섭다. 타이트한 연주와 전개에 대중적인 후렴을 밸런스 있게 연결시킨 ‘飛行船’과 ‘ばかやろう’가 보여주는 것은 단 한 번의 청취로 사람들을 끌어들일 가공할 흡입력. 초반의 고속 커팅 스트로크에 힘을 실어주는 스케일감 있는 관악 세션이 곡의 대중적인 매력을 더하는 ‘クライベイビー’까지 듣는 순간 이미 게임은 끝난 상태.
역동적인 드러밍과 중독적인 후렴구, 여기에 트랩비트로의 전환이 쓰임새 맞게 활용된 ‘週刊少年ゾンビ’, 키보드의 서정성이 곡 전반을 뭉근하게 감싸는 ‘アンブレラ’, 정말 모든 파트가 훅이라고 생각할 정도의 선율을 쏟아내고 있는 ‘帰ってておいでよ’ 등 후반부까지도 그 캐치함은 흐트러지지 않는다. 포텐이 터진 유려한 송라이팅과 뛰어난 밸런스의 연주 및 노래. 언뜻 들으면 평이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트랙 하나하나에 어려 있는 보편성의 순도는 어떤 앨범보다도 높다. 시원스러우면서도 귀에 착 달라붙는 청명하고도 상쾌한 가을하늘 같은 록 뮤직을 듣고 싶다면, 단연 첫번째로 추천하고픈 앨범.
아카이 코엔(赤い公園) < THE PARK >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생명력, 그렇기에 더욱 아쉽고 보고 싶은.
올해 故 츠노 마이사의 소식이 유독 슬펐던 것은, 이 작품의 완성도로 하여금 이젠 날아오를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 이시노 리코를 새로운 보컬로 맞아들인 후 선보인 첫 정규작은, 요 몇 년간 정체되어 있었던 상황을 타파하기 위한 전력투구로 꾸려져 있다.
다양한 레퍼런스를 탐하면서도 결코 팝적인 센스를 놓친 적 없는 츠노 마이사의 프로듀싱은 작심한 듯 더욱 그 빛을 발한다. 단순반복이란 없다는 듯 지속적인 리듬변주를 보여주는 ‘Mutant’, 키보드와 현악 세션의 공격적 침투가 활기를 불어넣는 ‘紺に花’에서 이미 절치부심한 팀의 스탠스가 확연히 느껴지리라 생각한다.
전주와 브릿지, 후렴구의 구성을 다르게 가져가면서도 하나의 흐름을 매끈하게 연결해낸 ‘絶対零度', 이전의 사토 치아키의 호방함과는 다른 섬세한 감정선이 인상적인 이시노 리코의 장점이 잘 묻어난 ‘ソナチネ’, 전자음악 중심의 실험적인 사운드메이킹이 돋보이는 ‘chifton feat. Pecori’ 등 다양한 아이디어로 무장한 재기 넘치는 곡들이 러닝타임동안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츠노 마이사라는 음악적 구심적에, 이미지를 소리로 구현하는데 있어 조금의 흠도 보이지 않는 후지모토 히카리와 우타가와 나오의 연주. 첫 정규작임에도 전임자의 그림자를 훌륭히 극복해 낸 이시노 리코. 4인의 호흡이 만들어낸, 어느 때보다도 이상적인 ‘밴드 뮤직’을 체험할 수 있는 작품. 더불어 이제 만개할 타이밍에, 아직 너무 보여줄 것이 많은 그를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이 앨범을 통해 더욱 실감한다. 이젠 볼 수 없는 그의 생명력이 빚어낸, 영원히 남을 일본 록 신의 걸작.
에다(edda) < いつかの夢のゆくところ >
일반적인 음악이 주는 체험과는 다른 무언가를 경험하고픈 이들에게
‘잊혀진 꿈이 모이는 관(忘れられた夢の集まる館)’을 테마로 한 작품. 컨셉앨범 측면에서도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며, 특히 가사뿐만 아니라 음악 전체로 확장시켜 현실과 거리를 둔 ‘판타지’를 성공적으로 구현.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올해의 작품 중 하나다.
가장 인상적인 트랙이라면 역시 ‘ポルターガイスト’. 토쿠마루 슈고가 떠오르는 초반의 어레인지도 그렇지만, 예상을 거부하는 멜로디 전개와 아티스트의 표현력은 단번에 다른 기성작품들과 선을 그어버리고 만다. 3/4박자의 왈츠리듬, 마칭밴드 스타일의 퍼커션, 치밀하게 짜인 현악세션, 여러 비현실적인 사운드로 장식한 반주는 그가 만든 이세계의 이정표로 분한다.
신비스러운 음색들을 내세워 구축하는 이 환상적 세계. 여기에 핵심을 부여하는 것은 결국 아티스트 본인의 목소리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모티브로 한 ‘Alice in…’을 들어보자. Verse와 후렴의 급격한 장면전환에도 당황하는 기색 없이 반주를 받아내는 변화무쌍한 가창. 그의 독특한 보컬 퍼포먼스의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을 터.
이어지는 ‘イマジナリーフレンド’에서도 그 목소리의 힘은 유효하다. 그 설렘과 안타까움, 기대와 같은 감정을 섞어 증폭시키는 가창이야말로 이 작품을 올해의 앨범으로 격상시키는 결정적인 요소로 분하고 있기 때문. 지금 같은 겨울에 더욱 어울릴 듯한, 현실에 지친 어른들을 잠시 걱정이 없던 어린 시절로 되돌려줄 한 편의 동화 같은 음악 모음집.
에이위치(Awich) < Partition >
한 사람의 경험과 철학이 음악에 단단히 스며들 때
올해 들은 작품 중 메시지를 음악적으로 가장 설득력 있게 풀어낸 작품이다. 메이저 데뷔 ‘사인’을 일궈낸 그 나즈막하면서도 단단한 목소리가 귀를 기울리게 만드는 ‘Sign’을 시작으로, 그는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음에도 서로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세태를 무겁게 읊어낸다. 아날로그 톤의 키보드 리프와 베이스가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을 유발하는 ‘Shook Shook’은 많은 남성 래퍼들의 공연 후 자신이 헤드라이너로 섰을 때 어안이 벙벙해하던 관객들의 모습을 모티브로 만든 노래. 여자끼리의 경쟁에 머물지 말고 언제든 남자들을 이길 수 있다는 자세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그의 생각이 담겨 있다.
그런가 하면 남편을 잃었을 때의 분노와 처절함, 그로 인해 파생된 오갈 곳 없는 복수심을 그대로 실어낸 ‘Patrona’의 타이트한 래핑은 듣는 이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킨다. 이어 ‘용서하면 돼, 그것 뿐(許せばいい、それだけ)’이라는 가사처럼 결국 자신이 행복해지는 것이 최고의 복수임을 싱잉-랩으로 풀어내는 ‘Revenge’, 팬데믹과 Black Lives Matter 무브먼트로 격변하는 세상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꾸밈없이 풀어놓는 ‘Awake’, 결국 나를 강하게 해주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을 강조함과 동시에 고향 오키나와에 대한 애착을 함께 담아낸 ‘Bad Bad’까지. 메시지에 무게를 두면서도 음악 측면 역시 소홀히 하지 않는 발군의 균형감을 발휘하고 있다. 이것은 프로듀서와의 끊임없는 교감과 자신의 퍼포먼스를 통해 유기적으로 엮어낸 아티스트 본인의 음악적 감각이 함께 한 덕분일 터.
작년 초에 선보였던 < 孔雀 >(2020)에서 뮤지션의 자아를 앞세웠다면, 이 작품은 ‘Awich’라는 인간의 자아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마치 동전의 양면을 새기듯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완성해낸 한해가 되었다. 메시지와 서사를 동반한 자신의 생각과 철학을 진지하면서도 접근성 있게 풀어내고 있다는 점. 2020년 한 해 동안 어떤 작품도 쉬이 거머쥐지 못한 성취라 확신한다.
오랄 시가렛(THE ORAL CIGARETTES) < SUCK MY WORLD >
록 밴드라면 이들처럼, 그리고 이 앨범처럼
전작에 비해 확연히 느껴지는 것은 두 가지. 치밀하게 설계된 러닝타임이 선사하는 기승전결의 카타르시스와, 단순히 스트레이트한 기타록에만 머물지 않는 넓은 음악적 반경의 수록곡들. 이전의 앨범들이 가장 맛있는 재료로 전력을 다해 만든 메인 디쉬 위주의 작품이었다면, 이번엔 보다 여러가지 재료를 사용해 유기적인 흐름을 보여주는 코스요리와도 같은 구성이랄까. 올해 목격한 작품 중 록 뮤직이 낼 수 있는 가장 뜨거운 에너지를 내는 작품으로 자리한다.
기타리프 하나로 어떻게 대기를 바꿀 수 있는지 손수 보여주는 ‘Tonight the silence kills me with your fire’는 그야말로 전매특허 사운드. 하지만 이어지는 펑크(Funk) 기조의 ‘Fantasy’가 예상을 깨는 전개를 보여주며, 로자리나의 피처링을 통한 서정성이 의외의 일면을 이어가는 ‘Don’t you think’와 가스펠을 적극 도입한 ‘hallelujah’로 확연히 넓어진 외연을 확인 가능하다.
여기서 머물면 어디 오랄 시가렛인가. 후반부의 격정이 주변을 집어삼키는 ‘ワガママで誤魔化さないで’, 신시사이저와 기타의 하모니가 폭풍을 일으키며 시작되는 ‘Naked’, 트랩비트와 현악세션으로 숨고르기에 들어가는 ‘From Dusk Till Dawn’까지 정신없이 흘러왔다면, 마지막은 감동과 여운이 담당. 뮤지션으로서의 각오와 다짐을 되새기는 ‘The Given’과 ‘Slowly but Surely I go on’으로 이 장대한 드라마는 막을 내린다.
이전과 달리 단순히 자신안의 열정을 불사르는 것에서 머물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작품을 높게 평가하고 싶다. 자신들의 매력과 열정을 어떻게 해야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 이 답없는 문제에 끝없는 노력과 열정으로 부딪혀 얻어낸 걸작. 헤드라이너 밴드로의 승격을 두고 제출하는 자기증명서라고 하면 옳은 표현일지.
이리(iri) < sparkle >
가수와 프로듀서가 작정하고 보여주는 블랙뮤직 신의 완벽한 태그
랩과 가창의 경계가 없는 유연함. 허스키한 중저음 보이스와 특유의 리듬감까지. ‘Runaway’에서 보여주는 그의 가창. Yaffle, TAAR, Kan Sano, 荒田 洸(WONK), 신 사키우라와 모리 젠타로 등 호화 뮤지션이 참여한 탄탄한 사운드. 좋은 작품이 쏟아져 나오는 일본의 블랙뮤직 신을 감안하더라도, 이 작품은 분명 특별한 위치에 있다. 고퀄리티의 사운드를 주조하는 프로듀서군과 이를 완벽히 소화하는 가수의 만남. 꼼수 없이 음악을 정면으로 마주해 완성한 내실 가득한 결과물이 작정한 듯 아티스트의 정점을 현실화하고 있으니.
신시사이저와 스크래칭, 비트가 주조한 치밀한 사운드가 유려한 보컬 퍼포먼스와 맞물려 입체적인 감상을 빚어내는 ‘Sparkle’, 시티팝의 현대적으로 해석한 그루비 펑크(Funk) 트랙 ‘Coaster’, 재즈 무드의 피아노 연주와 분위기를 고양시키는 혼 세션이 눈에 띄는 ’24-25’, 보다 차분한 무드 속 자신의 가창에 집중하기를 부탁하는 ‘COME BACK TO MY CITY’ 등 완벽에 가까운 합을 목격할 수 있는 순간들로 가득하다. 보다 다각도에서 추출한 그의 매력을 맛볼 수 있는, ‘이리’라는 뮤지션의 완성형을 체험할 수 있는 작품.
제이피 더 웨이비(JP THE WAVY) < LIFE IS WAVY >
잊을만 하면 생각나는 탄탄한 프로덕션과 적재적소의 펀치라인
18곡이라는 트랙 수가 부담스러울 수 있다. 그럼에도 곡마다 촘촘히 중독적인 펀치라인을 심어두니 은근 길다고 생각했던 시간이 후딱 지나간다. 트랩 위주의 심플한 비트 메이킹을 지향함에도 곡에 따라 타격감에 미묘한 차이를 두거나 다양한 신시 사이저 음색을 가미해 듣는 재미를 부여하고, 낮고 두꺼운 음색으로 날카로이 잡아낸 훅이 앨범에 단단한 뿌리로 분한다. 2017년 데뷔 이래 착실히 그 존재감을 겹쳐온 그의 첫 풀 렝스는, 발군의 캐치함과 트렌디함을 통해 일반 리스너들에게도 충분히 그 매력을 어필할 만한 장르 초월의 결과물로 자리한다.
일본인 NBA 리거 하치무라 루이에게 바치는 ‘Louis 8’는 농구장 바닥에 운동화가 끌리는 소리와 농구공의 바운드 소리로 그 의미를 극대화하는가 하면, ‘Kyomiga Nai Kanji’, ‘Shikkuri Konee’, ‘Neo Gal Wop’ 등은 언어와 플로우를 섞어 감칠맛을 만들어 내는 그의 훅 제조역량이 부각된.. 랩-싱잉에도 능함을 보여주는 대중친화적 스타일의 ‘Blessed’은 그의 멀티플레이를 엿볼 수 있는 트랙.
다양한 국적을 가진 래퍼들과의 협연도 전체 흐름에 방해 없이 완성도에 한 축을 담당. 특히 강한 바운스의 트랙을 타고 흐르는 박재범의 일본어 랩이 신기하면서도 반가운 ‘BLIND’, 멜로우한 곡조 속에 식케이의 한국어가 곳곳에 무리없이 녹아드는 ‘Just A Lil Bit’를 통해 한일양국간의 의미있는 교류를 엿볼 수 있다.
힙합 팬을 넘어 모두를 품을 수 있는, 귀에 착 붙는 요소들로 무장해 있어 잊을 만하면 찾게 되는 작품이다. 그래서 그런지 개인적으로 이 앨범은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들은 것이 아니라 1년에 걸쳐 생각날 때마다 꾸준히 듣게 되었던 것 같다. 사실 일본 음악 신 내에서 최근 몇 년간 블랙뮤직의 기세라는 것은 이젠 새삼스럽지도 않다. 그럼에도 더욱 이를 절감하는 순간은, 올해의 앨범으로 이런 랩뮤직을 선택한 나 자신을 발견할 때. 성장세의 힙합/알앤비 신, 그 안에서도 결코 놓쳐서는 안 될 한 장.
후지이 카제(藤井 風) < HELP EVER HURT NEVER >
새로운 얼굴들이 주조하는 새로운 음악, 그것이 보여주는 새 시대의 지형도
올해는 흥미로운 신인들이 여럿 등장했는데, 후지이 카제도 그 중 하나. 어떤 노래든지 자신의 스타일을 심는 놀라운 곡 해석력과 블랙뮤직 기반의 섬세한 음색. 여기에 R&B, 힙합, 발라드, 가요곡 등 장르를 가리지 않는 송라이팅 역량까지. 유튜브에 업로드 한 팝 커버영상이 주목받은 것을 계기로 정식 레코드 데뷔 전 이미 홀 콘서트까지 개최했을 만큼, 이미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유명인사였던 그다. 다만 오리지널 작품에 대한 의구심이 항상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던 것도 사실. 이 작품은 그것이 기우였다는 듯, 음악적 정수를 담아낸 본작으로 그 의구심을 말끔히 가라앉힌다.
러닝타임은 ‘후지이 카제’라는 정체성을 중심에 둔 채 여러 장르로 뻗어가는데, 각 트랙의 멜로디와 분위기에 맞는 완벽한 사운드 프로듀싱이 따라붙고 있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이는 최근 프로듀서로 맹활약 중인 야플(Yaffle)의 작품. 리얼세션과 전자음악을 자유로이 오감과 동시에, 일반적인 대중음악의 공식을 살짝 비껴가며 신예의 음악요새 구축에 팔을 걷어붙이고 있는 모양새.
과감한 혼 세션의 도입이 인상적인 ‘罪の香り’는 클래식과 팝의 이상향을 엿보게 하며, 초반 오버더빙에 이은 어반 알앤비 사운드가 정체성을 구축하는 ‘何なんw’, 미니멀한 편곡으로 보컬리스트 역할에 집중하는 ‘優しさ’, 키보드의 역할이 큰 부분을 차지하는 그루브한 힙합 트랙 ‘特にない’ 등에 특히 주목해보자. 그야말로 새로운 인물들이 의기투합해 만들어낸 대중음악의 새 지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