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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n Him Mar 22. 2021

1. 프롤로그

사라지고 남은 것들


사라지고 남은 것들


단언컨대 내 인생에서 가장 불행한 순간이었다.


앞으로 이보다 더 불행한 순간이 있다면 난 아마 이 세상 소풍을 자신 있게 스스로 마치고 돌아갈 것이다.

물론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고 난 그 동물 중에서도 가장 멍청한 동물이니 끔찍했던 고통마저 잊은 채

시간이 흐른 뒤 어느 시점부터는 견딜만했던 고통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난 이 고통을 절대 잊고 싶지가 않다. 

그 고통을 잊는 순간 현재는 더 이상 내게 선물처럼 다가오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때의 나는 26살

26살을 살면서 나름 여러 종류의 고통이 존재했고 

그 고통들을 하나둘씩 겪으며 상대적인 고통의 강약과 크기를 줄 세웠다.

줄 세운 고통의 표본들을 생각하면 인생을 지치게 할 때도 있었지만

아직 청춘이었던 내게 다가오는 고통을 견딜 수 있게 해 준 원동력이 될 때도 있었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백혈병 환자가 된 고통은 원동력은커녕 

차라리 내 눈을 감는 게 더 빠르겠다고 생각했다.


원인은 무엇이고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명확히 들어 본 적도 없이 매일 새벽 6시에 강제로 일어나 

엑스레이를 찍고 피를 뽑는 난 뭘 그리 잘못하며 살아온 걸까?

절대 내 앞에서 울지 않았지만 집에 돌아가면 절대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던 

우리 엄마는 대체 무슨 잘못이었을까? 


어렸을 적부터 배운 인과응보를 떠올리며 백혈병 사건을 나의 잘못들로 참작시키려 했지만

그런 생각들이 그나마 남아있던 나의 이성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백혈병의 원인은 없었지만 내게 다가온 결과는 명확했다.

난생처음 항암을 시작하며 몸이 약해지고

자고 일어나니 나와 평생을 동거 동락했던 머리카락이 하얀 베개 위로 옮겨 나기 시작하였다.

머리가 이렇게도 빠질 수 있구나 싶어 사진이라도 찍고 싶었지만 정말 베개에서 머리카락이 

나오고 있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암환자의 첫 번째 고통을 경험하였다.

머리가 아예 없어졌다고 생각하니

아침은 씻기 조차 싫었으며 그 어떤 내 모습도 보기 싫었다.

핸드폰이 잠시 꺼질 때 까만 화면 속 비치는 내 모습이 형편없었다.


삶이 볼품없어졌을 때

그때 참 서럽게 울었던 거 같다. 


남들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 내겐 일상이 되고 

남들은 하지 않아도 되는 걱정이 내게 삶이 될 때

그때 참 내가 불쌍해졌던 거 같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나니 감정의 파도가 정리되며

나 스스로에게 맘대로 되라는 식의 분노의 자유가 부여되었다. 

정말 가진 게 쥐뿔도 없던 나에게서 모든 걸 사라지게 한 상황이 너무나 원망스러워

누군가에게는 이 책임을 반드시 돌려야겠다고 생각한 그날


난 내게 사라진 것들을 적기 시작하였고

2년 뒤 적은 내 노트를 다시 열었을 때 


내게 사라진 것들 사이에서 

내게 남겨진 것들도 함께 보이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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