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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n Him Mar 24. 2021

2. 그때 그 순간

사라진 것들



힘들게 살아가도 인생의 고난은 피할 수 없었다.



"여보세요?"     


"네 여기 병원인데요 OOO 씨 전화 맞으시죠?"               

"네.. 맞는데요? 무슨 일이시죠..?"     


"내일 아침 일찍 병원으로 오세요"    



2019년 6월 전역 전 마지막 휴가

철원에서의 군생활이 힘들었던 건지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던 나에게 갑자기 없었던 치질이 생겼다.

휴가 첫날 새벽부터 잠을 못 이룰 정도로 너무나 아팠던 치질은 충치 치료도 귀찮아 매일 미루던 내가 치질만큼은 당장 내일 수술을 받으러 가야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잠이 오지 않은 새벽, 치질로 유명한 병원부터 치질 수술 후기를 수 없이 찾아보다 결국 밤을 지새우고 집 앞 동네 주민들만 간다던 치질 전문 병원으로 어기적 걸어갔다.

부모님과 친구들에게도 비밀로 하고 갑자기 생겨버린 나의 부끄러운 치질 수술을 휴가 복귀 전 후딱 끝내버린다는 마음으로 여러 가지 검사와 제일 싫어하던 피검사를 받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

사실 휴가 첫날 잡았던 술 약속을 어떻게 취소해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만날 때마다 춘천대첩이라고 부르며 술을 부어라 마시던 친구들과의 약속을 몸이 안 좋아서 못 갈 것 같다고 하면 당장 집 앞으로 달려올 녀석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마음씨 좋은 친구들은 마지막 휴가 때 군인이 아픈 게 어딨냐며 비아냥될 게 뻔했으며, 사실 나도 굳이 참을 수 있을 정도의 아픔이었다면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과 다음날 아침까지 술을 마신 다음 전역의 기쁨을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걸을 때마다 느껴지던 엉덩이의 단호함에 부끄러운 나의 치질 수술을 친구들에게 밝히며 

엉덩이 맞을 준비하라는 친구들의 말과 함께 춘천대첩은 나중을 기약하였다.


그렇게 약간의 걱정을 해결한 채 난 집 앞 카페에 앉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전역 전 치질 수술을 발견해서 다행이며 전역 식 날 어기적거리는 것보단 지금 치료를 받고 들어가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하며 역시 전역 운도 좋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취업하기 전 치질 수술을 끝낼 수 있었다는 만족감이 더 크게 다가왔으며, 아직 들어가지도 않은 회사에 입사를 앞둔 신입사원이 된 것 같은 착각을 여유롭게 하며 아메리카노를 최대한 여유 있게 마셨다.


하지만 그 순간 모르는 번호로부터 진동이 울려왔다.

모르는 번호는 절대 안 받는 나였지만, 

진동은 테이블 위 재질 때문인지 불안감을 일으킬 만큼 큰소리로 울렸다.

더욱 불안해지기 전에 난 입안에서 여유롭게 녹이고 있던 아메리카노의 

얼음을 빨리 씹어먹은 채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네 여기 병원인데요 OOO 씨 전화 맞으시죠?"               

"네.. 맞는데요? 무슨 일이시죠..?"     

"내일 아침 일찍 병원으로 오세요"               


왜 방금 진료를 본 환자를 아침부터 일찍 오라는 건지 물어봤어야 했지만, 수화기 너머로 느껴지는 바쁨과 단호함에 얼떨결에 알겠다는 대답과 함께 이유도 모른 채 내일 아침 일찍 나가야만 한다는 생각에 좋았던 기분이 나빠지다 못해 머리가 아파졌다.


설마 병원비를 덜 내고 왔다든지, 아무 일도 아닌 걸로 나를 이른 아침부터 부른 거라면 

군인에게 반드시 필요한 꿀잠의 시간적 가치와 분노를 모두 합산하여 가만두지 않겠다는 마음을 삭히며 

남은 아메리카노를 입에 털어 넣고 나는 집으로 향했다.


정말로 나는 내 피에 백혈구가 그렇게 없을지는 상상도 못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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