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세상의 맛있는 음식은 모두 부모님으로부터 배웠다. 우리 집은 해산물을 무척 즐겨 먹었다. 가리비구이, 대게, 킹크랩, 랍스터는 물론 각종 횟감과 홍합 멍게 해삼까지! 물론 어렸던 나의 입맛에 바다음식들이 다 잘 맞는 건 아니었지만 사람들이 해산물을 귀하게 여긴다는 걸 크고 나서야 알았다. 대게 살을 발라내어 다리살 하나라도 더 자식들 입에 넣고는, 본인은 내장에 게딱지 밥 비벼 먹던 아빠를 기억한다.
독립한 후에는 부모님에게서 배우지 못한 처음 보는 음식도 많이 먹어보게 되었고 세상에는 새로 유행하는 음식들도 많이 생겼다. 월급이라는 것이 생긴 후에는 내가 부모님을 끌고 다니며 맛있는 곳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는데 처음 부모님을 빕스에 데려간 것도, 홋카이도 식의 양갈비 집을 소개한 것도 나였다. 오랜만에 집에 가면 그리운 엄마 손맛을 맛보기보다 고향에 생긴 유명 프랜차이즈들을 발견해서 부모님을 모시고 데이트를 하고, 그걸 신기해하는 부모님 앞에서 으쓱했다. 부모님 역시 고향에 새로운 생긴 맛집을 있으면 나를 데리고 가지 못해 안달했다. 일 년에 함께 밥을 먹을 기회가 몇 번 없는 집에서 나름 매끼를 소중하게 보내는 방식이었다.
코로나 때문에 식당 이용이 어려워지면서 새로운 트렌드로 떠오르게 된 것이 밀키트였다. 나 역시 홈플러스 이마트는 물론 쿠팡 로켓 배송도 오지 않는 시골에 살면서 전통시장에서 신선한 재료로 요리를 하면 좋겠으나 요리실력이 받쳐주지 않으니 밀키트에 의존하는 비중이 높아져 갔다. 알면 알수록 밀키트의 세계는 끝이 없었다. 처음 된장찌개 김치찌개를 해 먹어 볼 땐 큰 감흥이 없었다. 그러나 태국식 팟타이나 유명 레스토랑에서나 본 티본스테이크, 새우 소금구이, 보리굴비까지 집에서 간편히 먹을 수 있는데 어떨 땐 재료를 직접 다 구매하는 것보다 저렴하고 무엇보다 내가 하는 것보다 훨씬 맛있으니 밀키트의 블랙홀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집에도 잘 안 내려오고 혼자 잘 먹고 사는지 궁금해하는 엄마에게 나 잘 먹고 다닌다고 인증사진도 여럿 보냈다.
태어나고 처음으로 일 년 넘게 집엘 가지 못했다. 코로나가 가장 큰 이유였지만 시골로 이사한 후 기차를 갈아타고 집에 가는 것이 무척 번거로운 일이기도 했다. 가까운 곳에 살며 가족들과 식사를 자주 하는 사람들이 부럽다. 그러나 엄마 집에 가서 밑반찬을 얻어 오고 싶다거나 엄마의 된장찌개를 먹고 싶다는 건 아니다.
계속 언급해서 정말 미안하지만 우리 엄마의 요리실력이 그다지 훌륭하지 못한데 그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엄마도 외할머니도 밖에 나가서 장사를 하는 스타일이지 집에서 올곧이 요리를 연구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사람마다 잘하는 일, 못 하는 일이 있지 않는가. 그래도 엄마가 은퇴를 한 후에 집에서 요리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한 것이, 유명 블로거들의 레시피를 하나씩 따라 보고 할 때부터이다. 지금은 꽤 많이 늘었다. 역시 수 만 시간 공을 들이면 안 되는 건 없나 보다. 그렇지만 내가 엄마에게 요리 관련 질문을 하면 '백종원 레시피를 찾아보라'고 대답하는 것이 엄마의 한계다. 엄마의 요리는 어쩔 땐 복불복이어서 어떤 날은 엄청 성공적이고 어떤 날은 망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런 엄마에게 밀키트가 얼마나 유용할까? 묻지도 따지지 않고 엄마에게 몇 가지를 보내 보았다.
냉동 김치찌개 밀키트를 보냈을 땐 엄마도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엄마가 김치찌개 정도는 꽤나 잘한다는 것이다. 밀키트 보다 엄마 본인의 김치찌개가 더 낫다고 말하는 엄마의 말을 듣고 나는 바로 동생에게 일러바쳤다. 우리 둘은 엄마의 자신감이 좀 어이가 없다며 키득거렸다. 그렇지만 이어지는 굴비, 홍어무침, 청국장, 장어탕, 동태탕 공세에 엄마는 끝내 나의 선택을 인정해 주었다. 뭐 해 먹을까 걱정이 없는 것이 가장 좋았고, 식당에서 먹는 것과 같은 퀄리티에 아빠가 너무 좋아한다는 것이다. (아빠도 말을 못 해서 그렇지 나와 같은 마음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밀키트의 개발은 갈수록 치열해졌다. 오프라인 판매가 원활하지 않은 식당들은 수십 년의 전통이 담긴 비법 레시피로 식당에서 먹는 것과 같은 퀄리티의 다양한 밀키트들을 개발해 낸 것이다. 조개샤브샤브나 활전복, 활새우, 불고기, 보쌈, 백숙 등의 밀키트들이 계속 배달되어 갔다. 어릴 적 아빠는 활오징어회가 먹고 싶다며 해 뜨기 전 일어나 진해에 있는 공판장에 가서 손수 횟감을 얻어 오는 분이었는데 산지 직송으로 얼음포장이 되어 전국의 그야말로 산해진미가 배달되니 얼마나 좋아하셨겠는가. 가격도 그리 비싸지도 않다. 해 봤자 5만 원 안쪽이다. 라자냐나 마라샹궈는 부모님이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 음식이다. 이마저도 밀키트로 만들어 먹을 수 있으니 요리를 하는 엄마도 신이 났던가 보다. 엄마가 먹방 인스타그램을 시작한 것이다. 인스타를 통해서 부모님의 밥상을 엿본다. 아빠랑 한 상 가득 차려 먹는 저녁상을 보면 함께 먹지 않아도 진심으로 내가 먹은 것과 같이 배부른 느낌이다. 내가 또 칭찬 한 번 받으면 멈출 줄을 모르는 편이라 엄마 아빠가 잘 먹었다는 얘기를 들으니 새로운 것 신기한 게 나올 때마다 뭔가를 집으로 보내게 되는 것이다. 내가 뭘 보낸 날은 아빠가 바깥에서 친구들과 먹는 밥도 마다하고 집으로 들어온다는 말을 들으니 이제 그만 둘 수도 없게 되었다.
식구들을 '먹여 살린다'는 것이 이런 기쁨일까? 집에 자주 가지 못하는 죄책감을 덜어낸 기분이기도 하고, 아빠가 은퇴 후 엄마의 눈칫밥을 덜 먹을 것 같은 안심도 되고. 무엇보다 평생 매 끼니마다 뭘 먹을까 걱정해야 하는 엄마의 고민을 덜어드릴 수 있어서 나의 효도에 스스로 칭찬해 본다. 요즘에야 부부가 함께 요리하는 집이 많아졌다고 하지만, 요리를 잘하든 못하든 취미가 있든 없든, 삼시세끼 죽을 때까지 식구들의 밥을 챙기는 수고스러운 노동은 오랫동안 엄마들의 몫이었다. 예전에는 다 집에서 된장 고추장을 만들어 먹었던 것이 이제 마트에 순창이나 해찬들과 같은 이름과 함께 진열되어 있는 것처럼. 시대가 바뀌며 이제 웬만한 요리는 밀키트로 대체되어, 나와 엄마 같이 요리에 큰 뜻이 없는 사람도 맛있는 집밥을 먹는 시대가 이제 온 것이 아닐까. 모든 사람들이 다 요리를 잘할 필요 없이, 요리를 연구하는 것이 직업인 사람들이 정성스레 만들고. 기왕이면 한 집이라도 더 맛있게 먹어주고, 엄마의 노고는 조금 덜고. 예전에는 장 맛이 변하면 집안이 망한다며 사 먹는 고추장을 마다했다던데. 시대를 앞서 나가 엄마에게 더 맛있는 밀키트를 찾아줘야겠다. 단돈 몇 만 원에 이리 생색을 내 본다.
그런데 밀키트에 딸려오는 쓰레기는 좀 줄일 수 있으면 좋겠군요.
엄마의 밀키트 요리가 궁금하시면
https://youtu.be/htogxcBU3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