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뱀띠의 용두사미

AI는 이런 거 못하지?

by Grace Hanne Lee



방 세 개 서른 평 남짓의 집에서 아이 셋을 키우다 보니 집은 늘 좁다. 결혼 후 5년을 살았던 신혼집은 사는 내 좁아서 힘들다 싶지는 않았던 곳이었는데 막상 이 집으로 이사하니 그 좁은 곳에서 어떻게 아등바등 살았을까 싶었다. 그땐 이 서른 평이 그리도 크고 넓다 느꼈는데 몇 년이 지나니 이 집도 부족하다. 위로는 2 미터도 채 안 되고, 옆으로도 1미터도 되지 않는 이 생명체들은 살기 위해 왜 이리도 필요한 게 많은 지. 생에 필요한 (혹은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살림들이 늘어갔고,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여러 가지 고민들도 덕지덕지 붙었다. 집이 꽤나 무거워졌다.


무거운 마음을 오래 지고 있기가 버거워 할 수 있는 것부터 해보자 했다. 아이들이 하원하고 돌아와서 책을 좀 읽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보는 것부터 시작해 보기로 했다. 마침 3호 병원을 데려가느라 반차를 썼는데 3호가 잠이든 바람에 잠깐 틈이 났다. 이 틈에 가구 배치를 바꾸었다. 환기도 좀 되고 여러 걱정과 고민이 해갈도 되길 기대해 보며 끙끙대었다. 하지만 옮겨 놓은 모양새가 인스타에서 보던 것만큼 세련되지 않는다. 꼭 2-3센티씩 부족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식탁의자가 내 눈치를 보며 삐딱하니 식탁 옆구리에 끼워졌다. 주기적으로 환경을 바꾸는 습관이 있는지라 늘 ‘영 아니면 다시 바꾸지 뭐’의 사고 체계가 있는 편인데 이번만큼은 그렇게 초연하지 못하다. 애 셋 워킹맘에게는 모든 것이 아슬아슬한 한계다. 시간은 분단위로 쪼개서 살고 있으며, 체력도 9시면 고꾸라져서 잠에 들었다가 새벽에 새 날의 생이 흔들어 깨워 몰아치는 하루를 겨우 시작해야 한다. 다행히도 일정한 정도 선에서는 매일을 감사하게 운영하며 살고 있지만, 이 모든 것이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금 새 고갈된다. 제일 먼저는 정서이다. 아슬아슬한 일상 속 변수 하나를 만들다가 실패하는 이런 날이면 잔여 감정들도 일렁일렁 올라오는데, 그중 가장 큰 무게는 단연 예민한 남편에게 들을 잔소리나 한숨 따위의 것 들이다. 변화를 (특히 타의에 의해 시작된 변화를) 반기지 않는 남편은 나의 이런 변수에 특히나 약하다. 결혼 7년 차에 접어들면서 조금은 받아들이고 덜 내색하는 편이 되었지만 여전히 긴장이다. 이렇게 주눅이 들기 시작하면 꼬리가 길어진다. 지난번에도 호기롭게 아이들 교육에 대해 고민하며 시도했던 것이 채 한 달을 채우지도 못하고 사라졌던 일이 생각나고, 아침 당번인 남편을 위해 월요일만큼은 애들 이불가방 정도는 차에 미리 실어주겠다고 해놓고 지키지 못했던 것, 남편이 이것만은 좀 해달라 했던 것들을 (지키려고 매우 노력은 했으나) 끝내 지키지 못하고 유야무야 사라져 버렸던 것들이 줄줄이 사탕으로 끌려 나온다. 또 남편이 한 소리 하겠지. 나는 왜 굳이 일을 만들어서 이러나. 근데 그럼 이런 고민들은 누가 대신 해주나. 좋은 묘안을 누가 내주나. 이런 건 왜 나만 고민하나. 생각이 또 여기에 미치자 일렁이던 잔여 감정들이 건강에 하등 도움이 안 되는 불순물들을 끌어안고 서운한 마음으로 치솟는다.


- 나 집을 좀 바꿔봤는데…
애들 하원하고 책을 좀 읽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할 것 같아서…

1호도 곧 있으면 학교 들어가는데 습관을 만들어 줘야 할 것 같아서 좀 바꿔보려고 하는데 일단 이렇게 바꿨어

(사진)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아니 사실 그보다도 원상 복구할 힘과 시간이 없어서, 남편에게 이실 직고 메시지를 보냈다. 1이 없어졌다. 반응이 어떨까.

- 그래

한참 뒤에 온 대답은 간결하다. 마음이 시원하지 않다. 일렁이던 것은 이제 울렁인다. 아이 잠든 틈 쪼개서 쉬지도 않고 고민하며 행동한 것인데 너무 퉁명스러운 것 아닌가. 왜 나만 이런 고민하나 하는 돌림노래가 또다시 머릿속에서 맴돈다. 수능금지곡 수준으로 중독성 있는- 그리고 실제로도 독성이 있는 이 후렴구는 무의식 속 몇 해 묵은 서운함을 찾아 신경을 뻗는다.


그러다 문득 매우 비논리적인 회로의 흐름으로 남편의 대답이 다르게 보였다. 바쁜 회사 일정 속에 갑작스럽게 아내의 집 구조 변화 사진을 받아보고는 예전 같으면 ‘그렇게 하면 이런 게 문제일 텐데?’ 트집부터 잡던 사람이 바뀌었다. 우선 ‘그래’ 한마디로 시작했다. 그래 남편도 나랑 지내며 참고 사는 거지. 변하며 지내고 있지 싶은 마음이 차올랐다.


- 집 어떤 것 같아?

- 좋아

- 자기 내편이라서 좋다고 해 준거지?

- 아냐, 진짜 좋아. 우리 예전에 이야기 나눈 적 있는 구조잖아.


대화가 묘하게 달라졌다. 어쩔 수 없는 상황과 한계에 대적하지 않고 서로 다른 두 견해자를 다독여가는 부드러움이 생겼다. 이전과는 달라졌음을 느끼고 나니 갑자기 뭐든 괜찮아질 것 같은 낙천적인 든든함, 안정감이 생겼다. 갑자기 조잡한 집 구조도 괜찮아 보이기 시작했다. 나의 치열한 일상의 고민과 고뇌의 사이에 벌어진 일렬의 활동이 결국 시간 낭비로 끝이 난다 하더라도 괜찮다는 막연한 편안함이 생겼다. 말 한마디가 남편과 나의 결혼 생활을 기억나게 했고, 그 시간 동안 우리가 서로에게 물들어 간 마음들을 돌이키더니 급기야 이 미완의 가구 배치까지 괜찮아 보이게끔 했다. 이쯤 되니 아이들 하원 시간이다. 우르르 닥쳐온 나의 일상은 이 어설픈 가구 배치 틈 새 자신만의 재미와 모험, 호기심을 채워 나간다. 한 구석으로 몰아둔 매트는 거실을 가로지르는 소파 뒷면과 맞닿아 묘한 아지트 같은 공간을 만들었다. 이 어설픈 가구 배치 속에서 아이들은 새로운 아지트를 만들었고 독서도 하고 카프라 나무 블록으로 타워도 만들고 저녁에는 캠핑이라며 잠도 잤다. 나의 낭비는 꽤나 낭만적인 결과를 낳았다.


AI는 시간 낭비를 못한다. 낭비를 해서 무엇을 창조하고 얻지 못한다. 무식하고 호기롭게 가구를 어질러 보지도 못하고, 철저한 계산으로 안될 일은 안 되는 것으로 여길 테지. 그래서 시도해보지 못한 AI는 결국 남편의 사랑이라던가 우리의 영글어지는 미묘한 생의 온도와 유기적 변화에 대해 감지하고 느끼지 못하겠지. 우리는 뜨겁고 복잡한 사람이다, 메롱이다 요놈아.

keyword
이전 01화'그래서 어떻게 살 것인가'는 그때에 맞춰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