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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케터담 Feb 09. 2019

9. 오늘은 쉽니다

희한하게 할 수 없는 일이 많아졌는데, 행복해졌다


제주와 육지를 번갈아 사는 동안 행복했던 이유를 꼽자면,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일상을 다채롭게 꾸미는 일을 좋아해 자꾸 이것저것 잡다한 스케줄을 만들어내는 편인데(브런치에 글 쓰는 것도 그런 일 중 하나) 제주에 가면서 본의 아니게 여러 일들을 할 수 없었고, 많은 기회를 놓쳤다. 그런데 그럼으로써 행복해졌다.


육지에선 굳이 가지 않아도 되는 전시를 보러 갔고, 꼭 만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고, 특별히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공모사업에 지원하기도 했다. 물론 이런 식으로 펼쳐진 많은 일들이 내겐 소중한 영감이 되었고 기회가 되었고 금전적인 도움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지만, 그럼에도 행했던 여러 일들로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고 고민을 하기도 했다. 단순히 '놓치기 아쉬웠던 것들'은 '어쩌면 놓쳐도 인생에 큰 문제가 생기지 않을 일'에 불과할 뿐이었을 텐데 말이다.




지금까지 '쉰다'는 것을 진지하게, 기쁘게 마음을 다해 임해본 적이 있었나 돌이켜 보았다. 늘 '해야만'하는 리스트뿐이었던 것 같다. '하지 않을 것'에 대한 리스트는 없었다. 쉰다는 것이 마치 죄를 짓고 있는 것처럼 늘 마음 불편한 그런 느낌이었기 때문에 방학 동안 실컷 잘 놀다가 개학이 되어가거나, 주말 동안 아무것도 안 한 채 월요일이 다가왔을 땐 마음이 불편했고, 쉬러 간 여행조차도 여행 코스를 타이트하게 잡고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곤 했었다. 방학 동안, 주말 동안, 잘 쉬었으면 그걸로도 충분했던 것인데.


다음 행선지를 정하지 않고 제주를 여행하던 어느 초여름날, 뷰가 좋은 카페에 들어갔었다. 바다를 볼 수 있는 2층에 앉았고 그렇게 두 시간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바다를 보고 말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지루하지 않았다. 심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행복했다. 카페에 깔리는 조용한 배경음악과 눈 앞의 바다의 반짝거림, 카약을 타는 사람들의 활기찬 에너지가 유명 오케스트라의 연주처럼 조화로웠다. 이 순간 속에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 너무나 황홀하고 참 행복했다. 그렇게 제주에서 '쉼의 미학'을 배웠다.



내가 좋아하는 '쉼'의 방식


누구에게나 쉴 수 있는 시간은 주어지지만, 휴식을 취하는 방법은 제각각이다. 여행을 하는 이도 있고,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떨기도 하고, 쇼핑을 하거나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TV를 보며 누워있기도 한다. 쉬는 방식에는 정답이 없지만, '나'에게 맞는 휴식 방법을 알고 있는 건 인생에서 꽤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회사 다녔을 때를 돌이켜보면, 그때 내가 가장 좋아하는 회사 복지 중 하나는 '리프레시 데이'였다. 매월 마지막 주 금요일엔 오전 근무만 하는 제도였는데, (일이라는 게 매번 칼퇴를 할 순 없고, 업무 전화는 오후 내내 이어지지만) 어쨌든 반차를 깎이지 않고 합법적으로 평일 오후에 쉴 수 있었던 그 날의 여유로움을 사랑했다.


그리고 반년의 갭 이어를 보내고, (아직도 보내고 있는 연장선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최근 마케팅 일을 다시 시작했다. 패셔너블한 가로수길로 출근을 하고, 럭셔리 뷰티 브랜드 행사 일로 연말엔 핫한 셀럽들도 만났다. 그리고 곧 있을 새로운 행사 일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감사하게도 회사에서 내 가치관을 존중해주셔서 월화수목 주 4일 근무를 하고 있기 때문에 금요일엔 관심 있는 클래스를 수강하거나, 브랜드 행사장에 가서 인사이트를 얻기도 하고, 카페에서 조용히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거나 지인을 만난다. 금요일의 쉼은 나로 하여금 주 5일을 일했을 때보다도 더 많은 에너지로 평일 업무에 집중하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하루는 행사 장소를 셀렉하기 위해 서울 시내의 호텔들 스위트룸을 답사했는데 1박에 몇 백에서 몇 천까지 지불해야 하는 그 럭셔리함에 감탄을 하다가, 목요일 저녁 비행기로 제주로 향했었다. 불과 몇 시간 전 도시 중에서도 정말 도시다운 모습을 보다가 눈 앞에 펼쳐진 평화로운 제주 바다의 모습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짜릿함을 느꼈다. 극과 극, 도시와 섬. 이중생활을 했을 때 느껴지는 카타르시스라고 해야 할까.


이번 주도 잘 쉬어야지,


지난 반년 동안 어떠한 '쉼'의 모습이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지 느낄 수 있는 감사한 시간을 보냈다. 더 나아가 어떤 방식으로 일을 할 때 지치지 않고 다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지도. 그리고 운이 좋게도 올해 그런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워라밸', '52시간 근무제' 등 여가의 가치가 점점 중요해지고 있는데, 내게 펼쳐질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더 행복해질 수 있는지를 알아서 참 다행이라 생각한다. 일에 집중하기 위해서도, 신나는 에너지와 원동력을 얻는 방법을 아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선호하는 쉼의 방식은 변화하겠지만 앞으로도 어떻게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지 관심을 가져서 더 행복한 삶을 꾸려 나가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니

'이번 주도, 정말 잘 쉬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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