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솔깃 Apr 08. 2024

몸도 튼튼 마음도 튼튼

하고 싶다...

지난 금요일, 거의 두 달 만에 필라테스 수업을 받으러 갔다. 감기에 걸려서, 차가 막혀서, 퇴근이 늦어져서, 비가 와서, 배가 고파서 등등 이런저런 비겁한 핑계를 대가며 예약을 해 놓고도 수 없이 땡땡이치는 노쇼 빌런 대마왕으로 등극했지만, 비로소 겸손히 왕좌에서 내려왔다. 내 돈 내고 내가 등록했는데 왜 그리 가기가 싫은지. 그동안 짧디짧아진 허벅지 근육을 오랜만에 쫙쫙 늘려주니, 왜 이제야 왔냐고 아우성치는 듯 말 못 할 고통과 곧바로 이어지는 시원함이 넘쳐흘렀다.


이리도 운동을 싫어하면서 매번 필라테스를 등록하는 이유는, 그나마라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어서다. 스스로 강제적으로라도 이유나 계기를 만들어 놓지 않으면 더욱더 걷잡을 수 없이 나태해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전에는 요가를 배운 적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것저것 한 번씩 건드리지 않은 게 없네. 꾸준히 하는 건 없으면서.) 요가를 해 보면 정말 좋다는 것은 아는데, 필라테스를 등록한 이유는 그저 위치가 좋아서다.


요가를 어렵게 느끼는 이유는 그것이 좋은 이유와 같다. 내 몸의 상태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고 할까. 골반은 비뚤어지고, 어깨는 구부정하고, 목은 갈수록 거북이가 되어서 여차하면 바다로 돌아갈 참인 처참한 상태를 직시하는 것은 심히 고통스럽다. (조만간 등껍질도 생길 것 같…….)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것과 그것을 눈으로, 몸으로 직접 확인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눈으로 보이는 사실을, 손으로 만져지고 피부로 느껴지는 진실을 마주하는 것은 그토록 어려운 일이다.


정면은 힘들다. 거짓이 통하지 않는 까닭이다. 거울은 언제나 정면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나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나의 정면이었다. 그 정면에 대고 이따금 ‘할 수 있다'는 용기도 북돋고, 예쁘다며 자아도취에 빠지기도 했으나, 돌이켜보면 그때는 나의 정면과 제대로 마주친 순간들이 아니었다. 제대로 정면을 마주쳤다면 쉽사리 그런 말을 건네지 못했을 거다. 정면을 본다는 건 마주 선다는 것, 그 이상이다. 오래 들여다보며 관찰한다는 의미까지 내포한다. 마주 선 순간 우리는 서로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 정영민, <고작이란 말을 붙이기엔 너무나 애틋한 사물들> 중


통영에 가면 꼭 들르는 봄날의 책방에서 만난 정영민 작가의 책을 읽다, ‘거울’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무릎을 쳤다. 호흡을 가다듬고 오롯이 내 몸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요가의 장점이다. 하지만 내 몸 구석구석에 선명하게 새겨진 진실, 내가 평소에 어떤 자세로 있고, 어떻게 움직이고, 어떤 나쁜 습관이 있는지를 잔인할 정도로 정직하게 알려주는 요가는 그야말로 스스로 뼈를 때리게 하는 운동이요 명상이다. 필라테스는 기구에 의지해서 할 수 있지만, 요가는 오직 내 몸뚱이에 의지해야 한다. 슬프게도 그 몸뚱이는 전혀 미덥지 않다.


그 뼈아픈 진실을 마주할 준비가 나는 아직 되지 않았다. 무려 올여름이 끝날 때까지 유효한 수강권이 만료되고, 괜찮은 요가원도 찾게 될 그날이 온다면 다시 도전해 볼지도 모르겠다. 생각만으로도 피가 돌고 혈색이 좋아지는 기분이다.

작가의 이전글 다리가 허락할 때까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