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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리 Sep 07. 2021

전쟁 속에서도 인생은 느릿느릿 앞으로 나아간다

<연을 쫒는 아이> 할레드 호세이니

책의 첫 페이지를 펼친 것은 9월이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아프간 사태가 일어난 지 겨우 몇 주 지났을 뿐인데, 매일매일 신문 1면을 장식하던 아프간 뉴스는 미군이 철수한 이후 간간이 들려올 뿐이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나라,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민족, 한 번도 관심 가져 보지 않았던 이 나라가 가진 아픔과 시련에 자꾸만 마음이 가는 것은 왜일까. 생명을 건 탈출이 이어지고 있는 그곳의 사진과 영상 그리고 몇몇 삶을 조명해 주는 기사를 보면서 자꾸만 마음이 쓰였다.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신문 국제 면을 들여다보는 일이었고, 하루의 업무를 마감하고 여유가 생길 때 쯔음이면 유튜브에 들어가 옛날에 만들어졌던 색이 바랜 아프간의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그리고 언젠가 사두었지만 책장에 꽂혀만 있은 채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할레드 호세이니의 <연을 쫓는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오후의 햇살이 차분하게 들어오는 소파에 앉아 첫 장을 펼쳤다. 아미르라는 아이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소설이었다. 책을 읽어 내려간 지 고작 하루 만에 마지막 장을 덮을 정도로 강렬한 이야기의 연속이었다. 잠시 밥을 먹으면서, 잠깐 티브이를 보면서도 자꾸만 아미르의 아버지의 이야기에, 하산의 이야기를 생각하며 소설 속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묘사와 상황이 너무 생생하여 할레드 호세이니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소설 속에서 나오는 등장인물, 상황, 시대적 묘사, 고통, 슬픔이 수십 년 전의 이야기라고 하기엔 마치 지금의 그것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주인공인 아미르는 부잣집에서 태어난 외아들이다. 아버지는 사업가이고, 어머니는 대학에서 강의를 했었지만 아미르를 낳으면서 세상을 등졌다. 그에게는 소중한 친구이자 하인인 하산이 있었는데, 그 둘은 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가까운 영혼을 나눈 사이로 어린 시절을 함께 했다. 하지만, 하산과 아미르에겐 태어나면서 그들이 선택하지 않았지만 절대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바로 그들이 속한 민족이었다. 아미르는 파슈툰족이었고, 하산은 하자르족 출신이었다. 하자르족은 몽고계의 얼굴과 백인의 얼굴을 섞어 놓은 모습이다. 아프간과 파키스탄, 그리고 이란에 걸쳐 거주하고 있는 그들은 시아파로서 탈레반에 의해 인종청소를 당하고 있는 불운한 민족이다. 지금은 복원될 길이 막막해진, 바미안 석굴을 지키던 이들도 바로 그들이다. 아미르와 하산이 서로 다른 민족 출신이라는 것에 대해, 호세이니는 같은 집에 살면서도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해 있다고 표현했다. 


하산이라는 등장인물을 보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그를 형용하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충성심이었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말이다. 자신의 그렇게 존경해 마지않는, 지켜주기 위해 갖은 수모를 겪으면서도 끝까지 의리와 충성을 저버리지 않는 아미르를 위해 처음부터 끝까지 존재했다. 그의 죽음 이후, 그와 꼭 빼닮은 아들 소랍을 남기고 아이가 아미르의 품에 가기까지, 아니 간 이후에도 하산은 아미르의 곁을 지켰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다시 소설의 첫 장으로 돌아가 아미르의 귓가를 울렸던 하산의 말 “도련님을 위해서 천 번이라도”를 읽었을 때, 처음 그 말이 결국 아미르의 말이 될 거라고 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하산은 그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아미르와 함께 했다.


책에는 “파쉬툰인이 하자라인을 억압한 부분적인 이유는 파쉬툰인은 수니파인데 하자라인은 시아파이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예전, 수단의 내전이 일어났을 때 내전의 많은 원인 중에 하나가 바로 이와 같은 민족적 차이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너무 바보 같은 일이, 현실에서는 잔혹해 바라볼 수 조차 없는 지옥처럼 일어나고 있고, 그게 역사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소름 끼치게 무섭다. 


소설을 읽으면서, 그리고 아프간 사태를 마주하면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디테일에 대해서는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었다. 그저 아프간을 도와주는 사람들에게 내가 가진 것의 일부를 나누어 주는 것이 전부인 건가 라는 생각을 하게도 만들었다. 알지 못하기에, 아는 것이 없고 미디어를 통해서 전해 들은 것만으로 그들의 삶을 판단하기에 도와주는 것조차 너무 어렵게 느껴졌다. 물론 그렇다고 지금은 아는가?라고 물어본다면, 크게 변한 것이 없다고 말하고 싶다. 


단지, 아프간 사람들도 다 같은 아프간인이 아니라는 것. 남자와 여자 중에 남자들보다는 여자들이 더욱 약자라는 것, 파쉬툰, 타지크, 하자르 우즈베크 인중에 하자르인이 가장 약자라는 것. 그리고 그중에서도 아미르와 하산처럼 마음을 나눈 친구 같아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부르주와와 하인의 관계에선 늘 하인이 약자이며 더 많은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작가인 할레드 호세이니를 포함해, 최근 한국에 특별 기여자 자격으로 건너온 사람들은 특권을 누리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특별한 권리라는 게 이럴 때 쓰이는 것이 우습지만 다른 나라로 망명할 기회조차 없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 길에서 구걸할 수밖에 없는 부랑자들, 팔다리가 잘려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 남편 없이 바깥으로 나갈 수도 없는 상황에서 남편을 전쟁에서 잃어버린 여성들은 난민의 자격조차 얻을 수 없는, 아니 자격을 얻기 위해 조금의 기회라도 얻을 수 있는 상황조차 여의치 않을 것이다. 난민이라는 자격으로 아프간을 떠나 새로운 나라에 터를 잡은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탈레반의 감시 아래에서 꾸역꾸역 어쨌든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나라에서 특권과는 가장 거리가 멀어 보이는 난민의 신분을 가진 사람들 조차도 어쩌면 아프간이라는 죽어버린 사회에서 그나마 특권층에 속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느껴졌다. 삶이 어쩜 이리도 불공평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은 부처도, 하느님도, 알라도 알려주지 않는다. 


소설을 읽는 내내 소설에 등장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통해서 가보지 않는 그 나라에 대해 상상해 보았다. 마른 대지 위에 잘 읽어 속이 빨간 석류가 주렁주렁 달린 나무가 있고, 대추야자 나무에서 익을 대로 익은 대추야자가 바닥에 떨어져 쉰내를 풍기며 널브러져 있는 모습. 아몬드, 호두, 피스타치오, 잣과 같은 견과류를 손에 쥔 아이들. 장미향이 나는 향수를 뿌린 아낙네들, 그리고 순무와 양고기를 넣은 수프에 화덕에서 방금 꺼낸 따끈따끈한 빵을 찍어 먹는 가족들을 상상했다. 아마드 자히르가 부르는 노래, 아프간 전통악기인 타블라와 하모늄이 울리는 공간에서 엄숙하게 또 침울하게 음악이 주는 정서를 느끼는 사람들. 전쟁이 모든 것을 앗아가기 전까지 그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속에서도 삶을 이어져 간다는 것이다. 그들은 로켓으로 무너진 담장을 고치고 벽돌을 다시 쌓아 올린다. 쌀을 사기 위해 장을 보러 가고, 집을 사고팔기도 한다. 영화관은 더 이상 문을 열지 않지만, 책 안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갔다 나오기도 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어머니는 딸의 머리를 정성스럽게 따아준다. 바깥에서 총성이 울리고 지뢰가 터지는 공간 속에서도 그들은 그렇게 삶을 지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은 군주제의 나라였다. 그런 나라에서 군주제가 폐지되고 대통령이 수반인 공화국으로 바뀌었다. 그 사이에 잠깐 평화가 오기도 했다. 그동안 활기와 목적의식도 생겨났다고 작가는 말한다. 언젠가 본 적 있는 사진 속 70년대 카불의 여성들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카불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여성의 권리와 현대적인 기술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런 그곳이 다시금 70년대보다 더 오래전, 혹은 그보다 더 악랄하고 어려운 시기로 돌아가버렸다. 사람들은 아프간에는 희망이 없다고 말한다.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곳에서 언젠가 희망의 바람이 불어왔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자꾸만 들었다.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 삶이 이어지는 한 희망은 분명 있을 것이다. 소설 속 라힘칸이 한 말이 기억난다. “너는 미국에 가더니 미국이라는 나라를 위대하게 만든 낙천주의에 물들었구나. 아주 좋은 일이다. 우리 아프간 사람들은 우울한 사람들이잖니. 우리는 종종 감 코리 (자기 연민)에 너무 깊게 빠지고 상실과 고통에 굴복하며 그것을 삶이라고 받아들이지. 그것을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우리는 젠 다기 미그 자라 (인생은 그런 거야)라고 말하지.” 내가 너무 낙천주의적일지도 모르겠다. 


아미르는 이후 미국에 난민자격으로 왔다. 그리고 그는 미국을 이렇게 묘사했다. “내게 미국은 내 기억들을 묻게 될 곳이었다. 바바에게는 그의 기억들을 애도할 곳이었다.” 그의 표현을 보면서 최근 한국에 들어온 사람들과 아이들에 대해 떠올렸다. 어린아이들에게 한국은 그들의 새로운 추억과 기억이 생겨날 곳이었고, 아프간에서 보냈던 전쟁의 일상은 묻게 될 것이었다. 그에 비해 어른들은 달랐다. 많은 시간을 그들의 조국에서 보낸 그들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그들의 추억과 기억을 애도하게 될 것이었다. 아미르와 바바처럼 말이다. 할레드 호세이니처럼 한국땅을 밟은 아이들이 훗날 작가가 되어 그들의 아픔을 한국어로 공유하면서 자신들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꼭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




“우리가 어려서 알던 아프가니스탄은 죽은 지 오래입니다. 친절함은 오간 데 없고 죽음이 난무합니다. 늘 죽음이 난무합니다. 카불은 어디나 두려움으로 가득합니다. 거리도 그렇고 경기장도 그렇고 시장도 그렇습니다 아미르 도련님, 두려움은 이제 우리 삶의 일부입니다.”


“자신과 당당하게 맞설 수 없는 사람은 어떤 것에도 당당하게 맞설 수 없는 법일세”


“이 세상에는 단 하나의 죄밖에 없다. 그것은 도둑질이다. 네가 거짓말을 하면 너는 진실에 대한 누군가의 권리를 훔치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결말만이 중요했다. […] 결국 인생은 인도 영화가 아니다. 아프간 사람들은 ‘젠 다기 미그 자라’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인생은 계속된다는 것이다. 시작과 끝, 캄 야브 (행)과 나캄 (불행) 위기 혹은 카타르시스에 상관없이 인생은 계속된다는 것이다. 먼지가 자욱한 코치 (유목민의 마차처럼 인생은 앞으로 느릿느릿 나아간다는 것이다.”


“용서는 화려한 깨달음이 아니라 고통이 자기 물건들을 챙기고 짐을 꾸려 한밤중에 예고 없이 빠져나가는 것과 함께 시작되는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소랍이 조용했다고 말하는 건 잘못된 표현일 것이다. 조용하다는 건 평화를 의미한다. 평온함을 의미한다. 조용하다는 것은 삶의 볼륨을 내리는 것이다. 침묵은 ‘오프’ 버튼을 누르는 것이다. 모든 걸 꺼버리는 것이다. 소랍의 침묵은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 묵언으로써 자신들이 원하는 걸 말하려고 하는 스스로가 원해서 하는 침묵이 아니었다. 그의 침묵은 어두운 곳에 꽁꽁 숨어 몸을 오그리고 있는 사람의 침묵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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