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배낭을 꾸리기 시작하니 비로소 실감이 났다. 정말 떠나는구나! 직장생활 32년 만에 선물처럼 주어진 한 달간의 안식휴가. 그 절반을 히말라야에서 보내기로 했다. 누구에게도 보고할 필요 없고, 보고를 받을 필요도 없는, 무엇을 파악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혼자만의 시간이다.
사실 이런 시간을 그렇게 절실히 원했던 건 아니다. 그러나 사람은 떠날 때를 알아야 하는 법. 막상 한 달 계획을 잡으려니 막연했다. 익숙한 지역, 익숙한 여행 방식... 생각이 뻔한 틀 안에서 맴돌고 있을 즈음 두 사람이 나를 히말라야로 이끌었다. 한 사람은 내게 익숙한 것으로부터 벗어나 볼 것을 권했다. 또 한 사람은 배낭여행에 필요한 구체적 정보를 주면서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당초 히말라야 같은 낯선 땅, 험난한 산은 여행사 패키지 상품으로만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준 팁을 바탕으로 하나하나 부딪혀보니 길이 열렸다. 카트만두 왕복 항공권은 비축된 항공사 마일리지 5만 마일을 사용해서 티켓팅을 했다. 현지에서 필요한 제반 서류와 국내선 항공권, 셰르파 예약은 다음 카페 ‘산촌다람쥐’를 통해 온라인으로 다 준비할 수 있었다. 트레킹 코스는 여행사 상품을 참고해서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를 다녀오는 일반적 일정으로 짰다.
카트만두로 가는 비행기 옆자리에는 일본인 노부부가 앉았다. 그러고 보니 탑승할 때 일본인이 많이 눈에 띈다. 일본에선 카트만두 직항이 없어서 인천공항 경유를 많이 이용한다고 한다. 이 노부부도 히말라야가 목적지. 그러나 트레킹을 해서 오르는 게 아니라, 헬기를 타고 고산군을 둘러보는 프로그램이라고. 그것도 출도착일을 포함해서 단 5일 일정. 이렇게라도 히말라야를 보려는 사람들이 있다니... 새삼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내 발로 걸어 올라갈 수 있을 때 떠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비행기 타면서 난생처음 창가 쪽 자리를 선택했다. 혹시 착륙하면서 멀리 히말라야 산맥을 조망할 수 있으려나 하고. 그런데 카트만두 트리부반 공항엔 속절없이 비가 내린다.
트레킹 첫째 날 : 포카라(Pokhara)~나야풀(nayapool)~힐레(hille)~울레리(ulere)
다음날 포카라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아침 일찍 트리부반 공항으로 다시 갔다. 국내선 청사는 공항이라기보다는 지방의 버스대합실을 연상시킨다. 게이트 앞에 비행기는 보이지 않고 이동할 버스만 줄지어 서있다. 승객 대부분이 외국인 트레커 들일 줄 알았더니 의외로 현지인들이 많다. 7시 40분에 게이트가 열렸다. 버스로 이동하는데 좌석수만큼만 승객을 태우는 것이 이채롭다. 서있는 사람에겐 좌석에 앉으라고 한다. 이게 무슨 고속버스도 아니고 활주로 잠깐 이동하는 건데.
내가 이용한 비행기는 예티항공. 사전에 받은 팁대로 오른쪽 창가 좌석을 잡았다. 그래야 히말라야의 고산군을 조망하면서 갈 수 있다고 한다. 이륙 후 20분쯤 지나니 멀리 구름 위로 솟은 눈 덮인 봉우리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구름에 가려 보였다 사라졌다를 반복한다. 아쉽다. 직접 거기로 가서 보는 수밖에…
포카라 공항에 내려 택시를 탔다. 다가오는 기사에게 ‘산촌다람쥐’라고 하자 금방 안다고 한다. 400 네팔 루피(약 4000원)를 달라기에 흥정을 해서 300루피에 가기로 했다. 네팔에선 반드시 흥정을 해야 한다는 것도 사전에 받은 팁이다. 산촌다람쥐에서 브런치를 한 뒤 셰르파를 소개받고 10시경 출발했다. 나야풀까지는 택시로 이동해서 지프차로 갈아 탄 뒤 힐레까지 달렸다. 셰르파 이름은 갸누. 꽤 나이가 들어 보였지만 역시 나보다는 어렸다. 67년생.
나야풀을 지나자 안나푸르나 자연보호구역을 알리는 표지판이 보였다. 여기서부터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포카라도 카트만두 보다는 덜하지만 뿌연 매연에 덮여 있었는데, 여기서부터는 산림지역의 청명한 공기가 느껴진다.
힐레 마을을 통과하자 올레리까지는 가파른 오르막이 계속된다. 3km라고 해서 가볍게 생각했는데 북한산 구기 능선 코스를 두 번쯤 오른 느낌이다. 울레리의 해발고도는 1960m. 한 봉우리 정상에 자리 잡고 있다. 정상이라고 해도 아직 갈 길이 멀지만... 도착 20분 전부터 조금씩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롯지에 도착하고 5분도 안돼서 천둥번개와 함께 폭우가 쏟아진다.
보통 비가 아니다. 울레리 롯지에 도착한 시간이 3시경. 그 직후부터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6시가 넘어서도 그칠 줄 모른다. 앞으로 남은 7일 일정 동안 트레킹 도중에 이런 비를 만난다면? 역시 매력적인 산은 쉽게 허락하지 않나 보다. 그래서 더 매력적인 걸까?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저녁 6시경부터 숙소 바로 근처에서 대형 스피커를 통해 흥겨운 노래와 환호성이 들려오기 시작하더니 도무지 끝날 줄을 모른다. 10시경일까? 억지로 눈을 붙여 잠이 든 것 같은데 깨어보니 자정이다. 바깥 스피커에선 요란한 음악과 연설 소리가 아직도 흘러나오고 있다. 비도 다시 내리고 바깥은 칠흑 같은 어둠이어서 그쪽으로 가볼 엄두를 못 내겠다. 스피커는 결국 12시 반이 되어서야 꺼졌다.
2일째 : 울레리(ulere)~고레파니(ghoreapani)~푼힐(poonhill)
다음날 일출을 보기 위해 아침 5시경 일어나 전망 좋은 장소를 찾으려고 마을을 한 바퀴 도는데 만나는 청년들마다 눈이 벌겋다. 어제가 도대체 무슨 날이었냐고 물으니 1년에 한 번 있는 마을축제란다. 낮에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운동회’ 같은 행사를 갖은 뒤 6시부터 뒤풀이에 들어갔나 보다. 뒤풀이가 무려 6시간 반이라니... 더구나 3시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폭우가 간간히 멈추긴 했지만 밤늦도록 계속 퍼붓고 있었다. 어지간히 춤과 노래를 좋아하는 민족인가보다.
올레리에서의 일출은 가슴을 설레게 했다. 동쪽에서 뜬 해가 안나푸르나 남봉의 동쪽 벽면에 반사되면서 설산이 영롱하게 빛났다. 처음 설산 뒤에 후광처럼 빛나던 햇빛은 시간이 갈수록 전체로 번졌다. 그래, 저곳을 향해 가고 있는 거다!
올레리에서 고레파니까지는 비교적 평탄한 오르막길로 이어져있다. 중간중간 밀림지역을 통과해서 강한 직사광선도 피할 수 있었다. 길도 잘 닦여 있고, 기분 좋은 산행이다. 가는 길에 네덜란드인 커플, 멕시코 여성 한 명과 계속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 이들은 푼힐까지만 갔다가 돌아가는 일정이란다. ABC까지 가는 길이 의외로 외로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구간에는 곳곳에 도로공사 현장이 눈에 띈다. 셰르파 얘기로는 이 구간에도 도로를 놓고 있단다. 그렇게 된다면 푼힐 전망대 턱밑까지 차량으로 접근이 가능하게 되는 셈이다. 네팔로서는 현명한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안나푸르나까지 도로를 놓는단 얘기는 나오지 않기를...
고레파니에서 점심을 한 뒤 휴식을 취하고 5시경 선셋을 보기 위해 푼힐 전망대로 출발했다. 그런데 하늘에 구름이 점점 짙어진다. 3210m 전망대에 섰지만 화이트아웃 상태. 그래도 어제처럼 폭우만 쏟아지지 않기를... 그리고 내일 아침엔 오늘처럼 청명한 하늘을 기대해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