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째 : 도바토(dobato)~바일리(baili)~코프라((khopra)
5시경 눈을 떴다. 어제 그렇게 체력소모를 하고서도 저녁을 안 먹고 잠들었기 때문에 배가 고파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머리는 아프지 않으나 속이 계속 울렁거린다. 1시간에 걸쳐 천천히 스트레칭을 했다. 기분은 한결 좋아진 듯하다. 그러나 식욕은 돌아오지 않는다
7시경 다시 길을 나섰다. 오늘은 해발 3666m에 위치한 코프라로 이동한다. 그저께 물데 전망대에서 한눈에 들어왔던 그 능선길을 따라 이동하는 코스이다. 도바토보다 200m 정도 높은 곳이지만, 바일리까지 100m 이상 고도를 높였다가 하염없이 내리막 길을 걸은 뒤 마지막에 수백 미터를 치고 올라가야 한다.
처음 오르막길이 이어지자 어제 느꼈던 고산증세가 다시 격렬히 되살아난다. 대여섯 걸음 떼었다가 숨 고르기를 하고 다시 걷기를 반복한다. 도중에 고산증 약을 꺼내 먹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고산증 약을 빈속에 복용해도 되는지를 안 물어보고 왔다. 하지만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다.
전날 도바토에서 만난 영국인 여성 트레커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가다가 11시 반경 점식식사를 위해 중간의 한 롯지에 들어갔다. 아직도 식욕이 없다. 24시간째 아무것도 못 먹었는데도 도저히 음식을 넘기지 못할 것 같다. 마부치씨와 영국인 트레커가 커리 1인분씩을 뚝딱 비우는 동안 나는 사흘 만에 연결된 카톡에 회신을 보내느라 분주했다.
다시 출발했다. 여기서부터는 가파른 오르막이다.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았다. 오후 2시 반을 넘어서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면 본격적으로 쏟아질 조짐이다. 서둘러 롯지에 도착해야 한다. 그러나 마음뿐 몸이 따라주질 않는다.
점점 굵어지는 빗방울을 맞으며 코프라 롯지에는 4시가 되어 도착했다. 히말라야 들어와서 처음으로 본격적인 우중 산행을 했다. 젖은 옷과 등산장비들을 말리기 위해 난로가에 둘러앉았다. 영국인 트레커는 빗방울이 굵어지기 전에 도착했다고 한다. 반대편에서 넘어온 프랑스인 커플 한쌍도 보였다.
잠시 몸을 말리면서 얘기를 나누다가 방에 들어가 곯아떨어졌다. 깊은 잠이 든 건 아니지만, 몸을 움직이기가 힘들다. 몸이 일단 쉬어줘야 한다고 본능적으로 명령하는 것 같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정말 바닥까지 내려간 느낌이다.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구인가? 어쨌든 여기서 살아 돌아가야 한다. 대학생 시절, 서대문구치소에 갇혔을 때의 첫날밤도 떠올랐다. 녹초가 된 몸으로 독방에 들어가 모포 한 장에 의지해 잠을 청했었다. 그때처럼 혼자이고 춥다. 그러나 여긴 내가 원해서 왔다. 그래 나의 바닥을 보러 온 거다…
7일째 : 코프라(khopra)~타토파니(tatopani)
코프라에서의 일출은 지금까지와는 다소 다른 풍광을 연출했다. 안나푸르나 1봉이 롯지 바로 앞에 우뚝 솟아있고, 다울라기리에서 안나푸르나에 이르는 설산 봉우리들이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이윽고 일출이 시작되자 햇빛이 각 봉우리들에 반사되면서 동쪽 사면을 황금색으로 물들였다.
전날 밑바닥까지 내려갔던 멘털이 서서히 끌어올려지는 느낌이다. 태양은 여명이 되면 어김없이 다시 떠오르고, 그 태양의 빛을 받아 히말라야 봉우리들은 영롱하게 빛난다.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고, 높이 떠오른 해는 반드시 서산 너머로 지게 된다. 두려운 건 추위도 어두움도 아니다. 어두움 뒤에 이런 아름다운 일출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이다.
아침에 억지로라도 식사를 하려고 야채수프를 시켰다. 그러나 몸이 받아주질 않는다. 몇 수저 못 뜨고 음식을 물렸다. 다시 출발. 이제부터는 하산길이다. 몸이 따라준다면 오늘 해발 1200m 타토파니까지 한걸음에 내려갈 예정이다.
이틀 동안 음식을 입에 넘기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만 않으면 몸상태는 놀랍도록 정상이다. 해발 3600m에서 맞는 아침 공기는 더없이 상쾌했고, 다울라기리 쪽 설산들을 계속 조망하면서 산 능선을 따라 내려가는 트레킹 코스 또한 환상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늘 목표한 지점까지 내려간다면 온천을 즐길 수 있다는 희망에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그러나 식욕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점심을 거르고 온천마을 타토파니까지 한걸음에 내려갔다. 코프라 롯지를 오전 7시경 출발해서 타토파니에 도착하니 오후 3시가 됐다. 도착하자마자 어김없이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짐을 풀어놓기 무섭게 온천으로 향했다.
타토파니의 온천은 생각했던 것보다 넓고 쾌적했다. 남녀가 같이 수영복을 입고 들어가는 노천탕인데, 적당히 따뜻한 온탕과 좀 더 온도가 높은 열탕으로 구분되어 있다. 히말라야 산맥에서 솟아 오른 온천물에 몸을 담그니 지난 1주일 산행의 피로가 말끔히 씻겨 내려가는 것 같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