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째 : 도바토(dobato)~히든 레이크(Hidden Lake)~도바토
이번 트레킹의 하이라이트가 될 Hidden Lake에 다녀오는 날이다. 로컬 지도에는 거리 표시가 되어있지 않아 정확한 소요시간을 가늠할 수 없으나 현지인들 말로는 7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셰르파 5시에 출발하자는 걸로 봐서는 꽤 길고 험난한 여정이 예상된다.
롯지에서 은박지에 포장해준 빵과 계란, 삶은 감자를 챙겨서 셰르파, 마부치씨와 함께 5시 반쯤 길을 나섰다. 예정보다 30분이 늦어진 것은 롯지 주인이 늑장을 부린 탓도 있지만, 5시 10분 전후로 시작된 일출 광경이 너무 환상적이어서 이를 카메라에 담느라 시간을 지체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차푸차레와 안나푸르나가 타다파니에서 보다도 더 가깝게 조망되면서 지난 이틀간의 일출보다도 더 선명한 선홍색으로 하늘을 물들였다.
Hidden Lake로 가는 길은 안나푸르나를 향해 뻗어있는 산의 능선을 타고 가는 길이다. 어제 타다파니에서 손에 잡힐 듯 눈 앞에 펼쳐져 있던 바로 그 능선이다. 완만한 오르막으로 시작해서 갈수록 경사가 가팔라졌다. 고도와 경사도가 함께 높아지면서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가슴에선 요란한 박동이 느껴진다. 정말 심장이 터져나갈 것 같은 느낌? 몇 걸음을 못가 멈추고 숨 고르기를 반복한다. 워낙 가파르게 솟아있는 산의 능선길이기 때문에 오른쪽으로는 계속 까마득한 절벽이 이어졌다.
산행 도중에 야크 가족을 만났다. 어미 야크 한 마리가 두 마리의 새끼를 돌보고 있는 모습. 아슬아슬한 비탈길에서 평온하게 자연을 즐기고 있다.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지켜보고 있는데 산 정상에서 또 한 마리의 야크가 나타나 잔뜩 경계심을 품은 채 우리를 노려보고 있다. 셰르파 얘기가 아비 야크란다. 암컷이 새끼들을 돌보는 동안 수컷은 산 정상부에서 신선한 풀을 뜯어 가족에게 공급한다는 것. 가만히 보니 우리를 노려보는 그 눈에서 그런 책임감이 묻어 나오는 듯한다.
4시간쯤 걸었을까? 드디어 4000m 고도를 돌파했다. 하나의 봉우리에 올라섰다고 생각했더니 눈앞에 대평원이 펼쳐졌다. 마치 한라산 영실코스로 올라가 만나는 선작지왓 같은 풍경이지만, 규모는 비교가 안되었다.
셰르파는 그 평원을 가로질러 계곡 밑쪽으로 안내했다. 그런데 계곡을 건너서부터 셸파의 움직임이 이상하다. 길을 헤매고 있는 듯하다. 우리에게 잠시 기다려보라고 하더니 길을 확인해보겠다며 짐을 내려놓고 혼자 사라졌다. 이때가 오전 10시쯤.
셰르파가 돌아오지 않는다. 30분, 40분, 1시간이 가까워 오는데도 셰르파는 돌아오지 않는다. 이게 무슨 일일까. 미치도록 환상적인 경치 속에서 별의별 상상이 다 든다. 엉뚱한 곳으로 가서 길을 못 찾는 걸까? 서두르다 무슨 변고라도 당한 건 아닐까? 어쨌든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다. 결정을 내려야 한다.
히말라야의 5월 날씨는 일정한 패턴을 보였다. 오전 내내 맑은 하늘을 보이다가 오후가 되면 어김없이 비가 쏟아진다. 비는 이르면 2시, 늦으면 4시경부터 시작된다. 그냥 비가 아니라 천둥, 번개, 때론 우박을 동반한 요란한 폭우다. 그래서 지난 4일 동안 내내 아침 일찍 시작해서 오전 중에 이동을 마쳤다.
도바토 롯지에서 여기까지 걸린 시간이 5시간. 돌아가는데 최소한 3시간은 걸릴 것이다. 비가 오기 전에 안전하게 돌아가려면 11시에는 떠나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나 11시가 지나도 셰르파는 나타나지 않았다. 마부치씨와 30분만 더 기다리기로 했다. 설사 셰르파에게 무슨 일이 생겼더라도 그건 돌아가서 네팔 당국에 신고해서 처리할 일이고, 우리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셰르파 없이 무사 귀환할 수 있는 한계를 11시 반으로 판단했다. 준비해 간 도시락을 반만 풀어 비장한 각오와 함께 목에 넘겼다.
정말 11시 반이 되기 딱 2분 전에 멀리서 손휘슬 소리가 들려왔다. 점점 크게 들리더니 멀리서 셰르파가 거의 뛰다시피 내려오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Hidden Lake를 직접 확인하고 왔다며 1시간 정도 걸리니 서둘러 가자고 한다. 기가 막혔다. 다시 갈등... 셰르파 걸음으로 1시간이면 내 걸음으로는 2시간은 걸릴 것이다. 빨리 보고 내려오면 이론적으로는 해지기 전에 롯지로 귀환할 수는 있는 시간 여유는 있다.
어쩌면 지금까지 내가 해온 결정 중 가장 어려운 결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셰르파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사실이 공포감으로 몰려왔다. 길을 헷갈렸더라도 금세 정상 트레킹 코스를 확인할 수 있었을 텐데, 사람을 1시간 반이나 세워놓고 혼자 목적지까지 가서 확인을 하고 오는 저 판단력을 어떻게 믿고 따라가나. 이런 상황에서 나는 정상적 판단을 할 수 있는 걸까...
마부치씨와 서로 황당해하면서도 빠르게 의견을 나눴다. 그는 베테랑 산악인답게 최악의 경우 해지기 전에만 능선 길에 붙으면 렌턴을 켜고 야간산행을 해서라도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도 배낭에 헤드렌턴은 넣어왔다. 도중에 비가 오더라도 우중 산행 준비는 기본으로 되어있다. 어차피 안전함이 최우선 가치였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다. 여기서 철수하면 그 아쉬움을 나중에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이게 이성적 판단이란 확신이 들진 않았지만... 결정은 항상 그 순간 최선의 선택이다.
다시 출발했다. 예상대로 hidden Lake까지는 2시간이 더 걸렸다. 산 능선을 몇 구비 돌고 돌아 안나푸르나의 속살을 점점 파고들자 잔설에 밤새 내린 우박이 덧씌워져 겨울 풍경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곳곳에 눈밭을 이룬 등산로는 미끄럽고 위험했다. 아이젠을 준비해올걸... 이란 생각이 드는 순간 중심을 잃고 미끄러졌다. 5m 정도의 눈밭을 조심스럽게 건너고 있었다. 나름 힘주어 발을 내디뎠다고 생각했는데 도저히 몸의 균형을 잡을 수 없었다. 다리가 풀린 데다가 보통 한국산에서 만나는 눈밭과는 달랐다. 우박의 결집이기 때문에 점성이 전혀 없고, 다리를 뻗는 순간 그대로 미끄러졌다. 다급한 상황이었다. 절벽 쪽으로 몸이 미끄러져 내려가면서 가속도가 붙는다고 생각하는 순간 필사적으로 바위에 발을 부딪혀 속도를 죽이고, 손에 잡히는 것을 붙잡아 매달렸다. 위를 쳐다보니 5m는 미끄러져 내려온 것 같다. 다행히 크게 다친 데는 없고, 등산복에 덧입은 오버 트라우저 바지가 조금 찢기고, 다리에 가벼운 찰과상을 입은 정도이다. 정신을 차리고 눈이 없는 쪽을 찾아 절벽을 기어올라갔다.
다시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오후 1시 반쯤, 4400m 고지를 넘어서자 첫 번째 호수가 보였다. 한 구비를 더 돌자 이보다 좀 더 큰 호수가 나타났다. 맑고 아름답다. 이제까지 어디서도 보지 못한 풍경이다. 설산의 봉우리들로부터 쏟아져내린 구름에 가려있다가 지나가는 바람에 살짝살짝 모습을 드러냈다. 이 웅장한 설산에 푹 안겨 이런 고행을 치르고 찾아온 순례자들에게만 살짝 모습을 드러내는 그야말로 Hidden Lake이다.
호수의 아름다움도, 목적한 최고점에 도달했다는 성취감도 오래 누릴 시간이 없었다. 이제 되돌아갈 길을 생각해야 한다. 2시가 되기 전에 서둘러 하산을 시작했다. 계곡까지 나오는 과정은 순조로웠다. 그런데 갑자기 구름이 몰려오더니 이내 화이트 아웃 상태가 되어버린다. 3m 이상 떨어지면 서로 확인이 안 될 정도로 짙은 구름이다.
앞서가던 셰르파가 또 이상하다. 다시 길을 헤매는 것 같다. 길을 확인하고 오려는 듯 자꾸 발걸음이 빨라져 시야에서 사라지곤 한다. 여기서 오전과 같은 상황이 발생하면 낭패다. 혼자서는 길을 찾아 롯지까지 돌아갈 자신이 없다. 또다시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셰르파에게 ‘Stop! Walk slowly!’를 계속 외쳤다.
다행히도 화이트 아웃 상태에서 대평원을 무사히 가로질러 능선길로 접어들었다. 여기서부터는 길을 헤맬 일은 없다. 문제는 체력과 날씨다. 전체적으로 내리막 길이었지만 간간히 나오는 오르막 구간에선 한 번에 세 걸음을 떼기 힘들었다. 하체가 풀려 자칫 발을 헛디디기라도 한다면 발밑으론 천 길 낭떠러지다.
화이트 아웃 상태가 계속됐지만 다행히 빗방울은 떨어지지 않았다. 히말라야에 들어와 처음으로 비를 만나지 않은 날이다.
롯지에 도착하니 7시가 됐다. 무려 14시간의 트레킹이었다. 아무 생각이 안 들었다. 배도 안고팠다. 처음으로 400루피를 내고 핫 샤워를 한 뒤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