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의 낭만과 밤의 낭만

빈롱

by 소율


기대하면 안 되는 것을 하나 고른다면 에어컨이 나오는 카페.

동네에서 본 적이 없다. 적어도 내 발로 걸어 다닌 반경 안에서는 말이다. 반면 기대할 만한 것을 하나 고른다면 강과 함께 흐르는 소소한 낭만이랄까. 시원한 강바람이 불어오는 카페에서 한낮에 마시는 커피 한 잔과 밤바람을 만끽하며 들이키는 강변 노점의 맥주 한 캔. 에어컨 대신 얻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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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롱 시장 구석에서 작은 다리를 찾아냈다. 시장에서부터 강의 지류를 건너 반대편 마을로 가는 통로였다. 그 다리가 나를 불렀다. 여기는 또 어떤 동네일까. 강 저쪽 편과는 분위기가 달랐는데 훨씬 조용하고 허름했다. 강둑에는 색이 바랜 빨래들을 널어놓았다. 동네 사람 몇이 나를 쳐다본다. 호기심이 어린 눈빛도 아니고, 경계하는 눈빛도 아닌, 그저 의아한 눈빛이었다. 저 외국인이 여기까지 뭔 일로 왔을까, 하는. 강 저쪽이 숙소와 식당이 많은 관광 구역, 즉 번화가라면 이쪽은 구석진 변두리 구역이다.


아까부터 계속 걸었더니 목이 말랐다. 얼음을 가득 채운 커피 한 잔이 절실했다. 직진해봐야 카페는커녕 가게 비슷한 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앞에 없으면 뒤에 있었을까? 불현듯 내가 지나온 다리 근처로 돌아가 보았다. 유레카,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지나칠 법한 구멍가게를 발견했다. 동네 아저씨 두 명이 안쪽에 앉아 자잘한 얼음을 채운 커피를 마시는 중.


‘오라, 커피를 파는 구멍가게로군.’이라고 했다가 ‘야호!’를 외쳤다. 가게 앞에는 일종의 쉼터가 정원처럼 꾸며져 있었다. 잔디밭 위로는 열대 나무들이 초록색 머리카락 같은 줄기를 갈래갈래 늘어뜨렸다. 결정적으로 강이 바라보이는 시원한 벤치까지, 야외카페 느낌이로군. 얼핏 보기에도 쉼터는 아담하고 예뻤다. 빈롱 시내의 여느 카페보다 마음에 쏙 들었다. 구멍가게는 단지 기가 막힌 위치에 있을 뿐이었지만 그게 열일 했다. 나는 소담한 정원 카페를 전세 낸 기분이었다. 갑부가 아니어도 카페 전세가 가능하다니.


그늘진 벤치에 가방과 카메라를 내려놓고 커피를 주문했다. “카페 쓰어 다!” 아저씨는 커피 핀을 들어 올려 보여 준다. 혹시나 외국인이 주문한 걸 잘못 갖다 줄까 봐 확인하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나온 커피를 맛보고는 또 한 번 ‘야호!’를 외쳤다. 너무 진하지도 너무 달지도 않게, 입맛에 딱 맞았다. 과연 전세 낸 카페에 걸맞은 실력자 바리스타로군. 내가 진짜 갑부였다면 그를 베트남 커피 전용 바리스타로 채용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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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참을 앉아서 일기를 쓰다가 간간이 고개를 들어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쉬지 않고 불어오는 강바람이 농도 진한 햇빛을 식혀주었다. 빈롱의 카페마다 에어컨을 달지 않는 이유는 돈이 없어서라기보다는 굳이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거기에다 이 멋진 카페의 커피값이 겨우 만 동이라는 데에 세 번째 ‘야호!’가 터져 나왔다. 맛, 경치, 분위기, 친절도, 이 모든 항목이 별 세 개인 데다 혼자 전세 내기도 가능한 이곳에서 마시는 커피가 단돈 500원이라니. 이러한 가성비 갑의 낭만이라면 언제나 환영한다.


빈롱에서는 택시를 탈 필요가 없었다. 그만큼 도시가 작다는 이야기다. 나는 정말로 택시를 한 번도 타지 않았다. 택시 자체가 별로 없는 것인지 지나다니는 택시를 본 적도 거의 없다. 그런 면에서 어릴 적의 내 고향, 충주와 비슷했다. 코딱지만 한 충주 시내에서 버스나 택시를 타는 사람은 적었다.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한두 시간 거리는 걸어 다녔다. 빈롱에서는 택시는 물론이고 그 흔한 쎄옴(오토바이 택시)도 탈 일이 없었다. 도시 전체를 가본 건 아니지만, 적어도 여행자가 갈 만한 곳들은 두 다리만 있으면 되었다. 오토바이가 난무하는 베트남이지만 드물게 빈롱에서는 여유로운 산책을 즐길 수 있었다.


강변의 낮과 밤은 조금 달랐다. 낮에는 화장기 없는 시골 처녀의 모습이었다가 해가 지면 또각또각 하이힐을 신은 아가씨로 변신한다. 강변의 정취를 흠뻑 느끼려면 밤이 되어야 한다. 사위가 어둑어둑해지면 낮 동안 숨어있던 도시의 흥이 되살아났다. 밤이 되면 시민들은 오토바이 물결로 도로를 채우며 강변으로 몰려왔다. 낮의 강변을 꽃 노점들이 점령한다면 밤의 강변은 꼬치와 맥주를 파는 노점들로 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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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경을 화려하게 밝힌 ‘빈롱 사이공 호텔’ 앞이 ‘핫 플레이스’였다. 호텔 맞은편 강가는 맥주를 즐기는 사람들로 들어찼다. 나도 그 틈에 끼어 이름 모를 꼬치와 맥주 한 캔을 시켰다. 친구들끼리 모여 앉아 큰소리로 웃는 청년들, 둘이서 속삭이는 연인들, 나 같은 외국인 여행자들이 동등한 플라스틱 테이블에서 맥주를 마셨다. 어쩌면 맥주를 핑계 삼아 강바람을 마시는 거였는지도. 캄캄한 강물이 끊임없이 출렁이는 소리를 내었다. 주말 밤에는 호찌민의 부이비엔 거리와 비슷한 야시장이 열렸다. 차도 오토바이도 금지, 길에는 먹을거리를 파는 노점과 그걸 즐기는 사람들뿐이다. 물론 부이비엔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작고 한산했지만.


빈롱의 낮과 밤은 적당히 붐비면서도 적당히 조용했다. 홀로 여행자에게는 적당히 낭만적이지 아니한가. 나는 에어컨 대신 얻은 것들에 불만이 없었다. 강변의 소소한 낭만은 소박한 도시 빈롱에서만 가능한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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