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에도 유효기간이 있다

영원한 건 없다

by 소율


브런치의 글을 읽고 있었다. <죽음을 마주하고서야 깨닫는 것들>이라는 제목이었다. ‘여행 도중 두 번의 죽음을 경험했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글이었다. 실은 ‘죽음에 가까웠던 경험’이었다. 그녀(글쓴이)가 방콕에 도착하자마자 진도 6. 1의 지진이 발생했다. 호텔방 안의 물건들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고 한다. 또 한 번은 끄라비 섬에서 투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폭풍을 만났다. 작은 보트는 40분간 격렬한 비바람을 뚫고 겨우 정박했단다. 이후 죽음이라는 필터를 통해 인생을 돌아봤고 복잡하던 인생사가 단순 명료해졌다는 고백이었다.


세상에, 문득 떠올랐다. 지난주에 내가 8년 차 유방암 정기검진을 무사통과했다는 사실이 말이다. 겨우 5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나는 그걸 잊고 지냈다. 병원에서 의사를 마주하기 전 떨리던 심정이 불과 며칠 만에 이렇게 반들반들해질 수가 있다니! 예전처럼 블로그에 대문짝만 하게 ‘8년 무사통과!’라는 글을 올리지도 않았다. 브런치의 그녀가 ‘죽음을 옆구리에 차고 다니며’ 인생을 재구성하는 동안 나는 시간이라는 바늘구멍으로 엄정했던 깨달음을 다 흘려버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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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지난 것이다. 8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니 간절했던 마음이 무디어졌다. 아무리 절박했던 경험일지라도 영원한 건 없었다. 결국 유효기간의 막바지에 도달한 것이리라. 예전보다는 확실히 안전해졌다는 뜻이다. 내심 유방암 환자였다는 걸 그만 잊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동시에 그만큼 해이해졌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유방암 이전의 생활로 돌아가려고 하는 불감증일 수도 있었다.


총 6개의 검사 결과를 들여다보며 이상 없다고 말하는 의사에게 언제까지 정밀검사를 받아야 하냐고 물었다. 유방촬영과 유방초음파는 죽을 때까지 받는 걸 권하고 나머지 검사들은 보통 10년 정도 받는다고 한다. 복잡한 종합검사는 최소 2년이 남았구나. 유방암 치료 10년이면 이제 안심해도 되는 건가. 100% 보장이란 없다는 걸 잘 안다, 12년이나 15년이 지난 후에도 재발하는 경우가 있으니까. 물론 매우 적은 확률이라지만 그게 누군가에게 닥친다면 백 퍼센트인 게지. 그런데도 마치 유방암 환자가 아니었던 것처럼 잠깐 사이에 검사 결과조차 잊어버렸다. 나는 천년만년 살 것처럼 온갖 계획을 세우고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일들에 안달복달했다. 나 같은 사람에게는 일 년에 한 번 정기검사라는 과정을 통해 생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는데 단지 검사 결과를 듣는 순간에만 잠깐 긴장했다 말았구나.


어떠한 결정적인 경험에도 유효기간이 존재한다는 걸 깨달았다. 때가 되면 신용카드의 유효기간을 연장하듯이 죽음의 영역에 한 발을 들여놓음으로써 얻는 깨달음에도 유효기간을 연장해야 한다. 방법은 ‘만약’이라고 가정해보는 것. ‘만약’ 이번에 재발이나 전이라는 결과가 나왔다면? 나는 또 얼마나 절망하고 무너졌을 것인가. 모든 일상을 재정비하고 다시 험난한 치료에 돌입하기 위해 얼마나 마음을 다잡아야 했을까. ‘만약’ 죽음이 가까이 왔다면?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내가 당장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 아니 당장 하지 않으면 후회할 일은 무엇일까. 하얀 노트를 앞에 두고 손 글씨로 천천히 적어보아야겠다. 고요히 침묵하며 내 마음속을 깊이 들여다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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