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빛 창문이 점점 거뭇해진다. 나무들 사이 산자락 너머로 분홍색 노을이 슬쩍 보인다. 바쁜 하루였다. 아침 8시부터 만보를 걷고 나서 차를 몰고 시내로 나갔다. 다이소, 생협, 이마트, 속옷 가게, 떡집, 빵집. 목록을 적어 장을 봤다. 닫았던 사무실을 다시 열기로 했으니 챙겨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5월에 새로 시작하는 프로그램도 준비해야 하고. 종종거리면서 몸은 몸대로 머리는 머리대로 분주했다. 그래도 날이 저무는 순간만큼은 창 밖을 바라보았다. 초록이 어두워지다가 시커메지다가 결국 캄캄해지는 걸. 순간이다. 영화가 끝나는 것처럼 색깔은 사라진다. 그러나 여전히 할 일은 남아있고 그게 힘들면서도 동시에 즐거웠다. 의욕 없이 늘어져 있던 시간에 비하면 고맙고 말고. 일이 많은 것보다 일이 없는 게 훨씬 괴롭더라. 매일 잠깐씩 초록과 어둠 사이의 순간을 즐겨야겠다.
<2일 차 소재>
최근에 마신 술
얼마 전에 아들과 신나게 캔맥주 2개를 먹었다가 얼굴이 붓고 숙취에 시달렸다. 신장에 문제가 있나 싶을 정도로 충격이었다. 맥주 두 개가 뭐라고! 보통 1캔만 하는데 그날은 목도 말랐고 안주도 맛있었고 배도 고팠다. 이십 대엔 주량이 파악되지 않을 정도로 술이 세었다. 나의 주량 그래프는 출산 후에 뚝 꺾이고 유방암 수술 후에 심하게 고꾸라지고 이젠 별 일이 없어도 바닥을 기어가는구만. 맥주가 체질에 맞지 않는다는 건 알았지만 힘든 일과를 마치고 쭉 들이키는 그 맛이 좋았다. 나는 눈물을 머금고 맥주 사랑을 뒤로하기로 했다. 대신 어제는 와인 두 병을 사왔지롱. 냉동 치킨과 감자튀김을 에어프라이어에 굽고 샐러드를 만들어 와인을 곁들였다. 이번에도 늦게 퇴근한 아들과 둘이서. 맥주 사건을 교훈 삼아 일인당 한 잔씩만. 딱 좋네!
<3일 차 소재>
오늘을 위한 준비물
오늘은 새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날이다. 작년에 인기가 좋았던 <걷기의 여왕>을 <시즌 2-소율소풍> 으로 만들었다. 4월 내내 준비하느라 애를 썼다. 알람이 울리기 전에 일찍 눈이 떠졌다. 미리 싸놓은 가방을 점검하고 아침에 챙길 것들을 집어넣었다. 핸드드립 커피, 펜과 편지지, 리넨 테이블보 등등. 가장 중요한 준비물은 '나를 믿는 마음, 자신감'이었다. 세 명의 참가자를 만나는 순간, 모든 게 잘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역시. 예상만큼 아니 예상보다 즐겁고 완벽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준비도 결과도 성공이다. 잘했어, 치타! 아니 소율!
<4일 차 소재>
먹기 싫은 음식
음식을 별로 가리지 않는 편이지만 싫어하는 종류가 있다. 곰탕, 설렁탕, 일본 라멘, 백숙, 순댓국. 즉 돼지나 소의 뼈를 고아 만든 하얀 국물류. 나는 뼈가 싫어요! 누구처럼 외치고 싶다. 특히 특유의 고기 비린내가 나면 고개를 돌린다. 갈비탕처럼 고기로 끓인 맑은 국은 좋아한다. 구워 먹는 살코기도 오케이. 남편과는 식성이 맞지 않아 둘 다 만족하는 경우가 드물다. 평생 곰탕을 싫어하는데 잊을 만하면 곰탕 먹으러 가자는 사람이다.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그 심리가 연구 대상감이다. 박사는 몰라도 석사 논문 하나는 나오지 않을까. 남들처럼 여행 갈 때 한 솥 곰탕을 끓이는 일도 당연히 일어나자 않는다. 대신 생협 곰탕을 냉동실에 몇 개 넣어두지. 먹고 싶은 사람이 알아서 뎁혀 먹으세요.
<5일 차 소재>
오늘 이상한 일은
1시쯤에 장을 보러 나갔다. 사무실에 소소하게 갖추어야 할 물건들이 아직도 남아있었고 반찬거리도 사야 했다. 다이소, 이마트, 생협을 모두 들르기로. 별생각 없이 주차하기 편한 이마트에 차를 댔다. 하지만 가장 많이 물건을 산 곳은 역시 다이소. 슬리퍼, 수저통, 테이프, 콘센트, 물 청소포, 싱크대 수전기...... 다음으로 생협 매장이다. 계란과 햄, 유채유, 후추, 표고버섯. 막상 이마트에 가니 꼭 사야 할 것이 없었다. 그래도 주차비를 내지 않으려면 뭐라도 사야 한다. 그냥 공영주차장에 차를 댈 걸. 경차라 주차비도 얼마 안 나오는데. 그동안 두 시간이 훌쩍 넘어 액수를 채우기 위해 억지로 식재료를 골랐다. 세일하는 삼겹살, 연어, 밑반찬, 생수...... 물론 사놓으면 다 먹을 테지만 이건 좀 우습다. 주객이 전도되었어, 이상한 장보기로군.
<6일 차 소재>
비가 와서 좋은 것
어제오늘 줄기차게 비가 온다. 올해엔 봄 가뭄이란 말이 쏙 들어갔다. 비가 자주 오니 해갈이 잘 되겠지. 거실 창으로 비 오는 모습을 바라보며 커피 한 잔을 마신다. 내가 좋아하는 순간 중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일. 눈으로 귀로 세상을 적시는 빗줄기를 감상한다. 흠뻑 젖어 짙어진 건너편 산자락이 든든하다. 바로 그것 때문에 이 집을 선택했으니까. 밖에 세워두어 황사로 더러워진 내 차도 시원하게 샤워를 하겠네. 주말 내내 오는 비 때문에 아쉬운 사람도 많겠지만 나는 외려 괜찮다.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혀 주는 느낌이랄까. 비가 오면 우산장수 아들이 좋고 해가 나면 짚신장수 아들이 좋은 것이여.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기를'.
<7일 차 소재>
나의 잠옷
잠옷의 바지는 세심하게 고른다. 나에겐 바지가 중요하다. 배를 조이면 소화가 안 되는 체질이라 널널한 고무줄과 편안한 품이어야 한다. 가격과 상관없이 반드시 입어보고 산다. 저렴해도 맘에 꼭 드는 것이 있고 비싸도 별로인 것이 있다. 직원이 추천하면 귓등으로 듣는다. 하체비만 스타일인데 상체만 언뜻 보고 늘 작은 걸 권하기 때문이다. 이보시오, 내 몸은 내가 잘 안다오. 까다로운 나에게 합격점을 받으면 거짓말 안 하고 천이 닳을 때까지 입는다. 그만큼 맘에 드는 걸 고르기가 쉽지 않다. 며칠 전에 이마트 근처를 지나가다가 메리야스 가게로 직행했다. 마네킹에 입혀놓은 파자마 바지가 딱 내 스타일. 일명 냉장고 천이라 부르는 시원한 재질에 스페인 안달루시안 풍의 통바지였다. 눈대중이 정확했다. 살랑살랑 헐렁헐렁, 입어보니 이건 그냥 내 거네. 단돈 9천 원? 땡잡았다. 길이가 조금 긴 게 아쉬웠다. 집에 돌아와 밑단을 접어 재봉틀로 박아주니 완벽하다. 한편 잠옷 윗도리는 면티셔츠 아무거나 입는다. 별로 불편을 못 느끼니까. 잠옷 바지에만 민감한 녀자, 나는 그런 녀자.
<8일 차 소재>
요즘 처음 만난 사람
작년 9월부터 올해 4월까지 8개월 동안 온라인 모임만 했었다. 5월부터 심기일전, 사람들을 직접 만나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새롭게 만든 것도 있고 중단했던 것을 이어하는 것도 있다. 지난주 목요일 걷기와 글쓰기를 같이 하는 '소율소풍 1차'를 진행했다. 총 3명의 참가자 중 한 분은 오래된 회원이고 다른 두 분은 처음 오신 분들이다. 오랜만에 만난 회원도 반가웠고 특히 새로 오신 분들이 어찌나 귀하고 고맙던지. 눈빛을 주고받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너무나 즐거웠다. 세 명 모두 백 프로 만족하셔서 준비하느라 고생했던 것이 눈 녹듯 사라졌다. 역시 사람은 사람을 만나야 하는 것이여! 이번 주 토요일부터 재개하는 '여토여토'에도 새 회원이 참여하신다. 어떤 분들이 오실지 잔뜩 기대된다. 처음 만나는 설레는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오. 새로운 경험, 새로운 만남은 내 인생의 비타민.
<9일 차 소재>
우리 집에서 가장 유용한 가전제품
냉장고, 세탁기는 너무 당연해서 빼놓고 말하자면. 바로 음식물 처리기. 한 10년은 되었나 보다. 당시 80만 원의 거금을 주고 남편이 억지로 거래처 물건을 사 온 것이었다. 이른바 강매. 그런데 이것이 효자일 줄이야! 음식물 찌꺼기를 넣으면 흙으로 변신한다. 냄새 하나 안 나고 잔 고장도 없다. 어느 정도 흙이 차면 퍼다가 밖에 버리면 끝. 일종의 거름이다. 말 그대로 붉은 흙이다. 전혀 더럽지 않다. 우리 집은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사본 적이 없다, 필요가 없으니까. 얼마나 편리한지 모른다. 냄새나고 물기 흐르는 음식물 쓰레기에서 완전 해방된 지 오래다. 집에 오는 사람마다 다들 부러워한다. 오렌지나 귤껍질이 유일하게 냄새를 유발하고 나머진 전부 오케이! 본전을 빼고도 남아도는 착한 가전제품이니 강추 강추. 환경도 살리고 주부도 살린다. 다른 데 엄한 돈 쓰지 말고 이거 꼭 장만하시라.
<10일 차 소재>
오늘 마지막으로 만진 것
물론 핸드폰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은 안경이다. 돋보기안경을 벗어야 하루가 끝난다. 폰을 보던 책을 읽던 침대에서 뭔가를 하다가 마치는 순간, 마지막으로 놓는 것이 제2의 눈이로다. 졸리다. 얼른 안경을 벗고 눕고 싶다. 편안하게 어둠으로 빠지고 싶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것이고 오늘의 태양은 져야 한다. 오늘이여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