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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율 Jun 24. 2022

쓸모없는 테라스가 효자가 되었다, 장마철 한정

테라스의 변신은 무죄


드디어 장마철이 도래했다. 제주살이를 마음먹었을 때 가장 걱정했던 계절이었다. 두 번째로 두려웠던 계절은 막바로 마주칠 겨울이었고. 어찌어찌 겨울을 넘기고 봄이야, 어디서든 찬란한 시간이니까. 이번 주부터 장마라고 했지만 일기 예보는 계속 바뀌었다. 월요일부터 비가 온다더니 흐리다가 해가 나길 반복했다.


어제 목요일 밤부터 비가 내렸다. 아침에 거실은 흐린 날보다 외려 시원한 편이었다. 통밀빵 자투리 조각 두 개를 굽고 우유에다 블루베리 한 줌을 넣어 갈았다. 간단한 아침밥. 봄까지는 표고버섯, 당근, 고구마, 브로콜리, 계란 등을 삶은 것에 핸드드립 커피를 곁들였다. 그러나 요즘 주방에서 뭔가를 끓이면 더워진다. 삶은 채소에 질리기도 했다.


얼마 전 홈쇼핑으로 믹서기를 구입했다. 고장 난 티브이를 수리한 후 홈쇼핑이란 걸 처음 해보았다. 이젠 뭔가를 갈아먹는 취미가 생겼다. 오이에 레몬 한 조각을 넣어서 주스를 만들고 당근에 꿀을 넣어 갈아 보았다. 여름이라 시원한 게 어울린다. 삶은 채소 대신 각종 주스가 아침밥으로 등극했다.



우리 집엔 두 개의 테라스가 있다. 현관에서 거실로 향하는 짧은 복도 양쪽의 통창으로 드나들 수 있다. 한쪽엔 세탁기와 에어컨 실외기, 보일러가 설치되어 있다. 다른 쪽엔 나무 테이블과 의자 세트가 놓여 있다. 이곳은 바비큐용 공간이다. 천정은 유리로 덮었고 옆은 새시 없이 뻥 뚫렸다. 빨래를 돌리고 너는 왼쪽 공간이야 늘 사용한다. 천장 모서리에 제비 부부가 무허가 집을 지어 새끼를 기르는 중이기도 하고요.


비가 조금 잦아들 무렵, 제비 부부는 부지런히 둥지를 오갔다. 문을 열고 둥지를 올려다보았다. 그새 새끼들이 커서 고개를 삐죽 내민다. 제비집 아래 하얀 똥이 가득하더니 많이 먹고 많이 자랐구나. 비가 다시 거세졌다. 유리 천장에 부딪치는 빗소리가 요란스럽다. 커피가 당긴다. 블루베리 우유만으론 역시 부족해. 좋아하는 원두 시다모를 갈고 한 잔만 내렸다.



기왕이면 테라스에서 커피를 마실까? 세탁기 쪽은 앉을 데가 없어 테이블 쪽으로 눈을 돌렸다. 테이블과 의자는 봄에 날아온 송홧가루와 그동안 쌓인 먼지로 무척 더러웠다. 실은 한 번도 청소를 하지 않았다. 이곳은 쓸모가 없었던 탓이다. 혼자서 무슨 바비큐씩이나 해 먹을까. 게다가 겨울은 물론 봄에도 추워서 나가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럼 여름엔? 반대로 햇빛이 들고 더워서 소용없다.


그런데 장맛비가 쏟아져서 덥지가 않다! 나는 테이블과 의자를 꼼꼼히 닦았다. 송홧가루와  먼지와 붉은색 염료가 섞여서 뒤범벅이었다. 여러 번 닦은 뒤에야 사람이 앉을 만해졌다. 천장에 부딪치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커피를 마시는 기분이 괜찮네. 오 핸드폰에 와이파이도 연결이 된다! 그렇다면 노트북을 사용할 수 있겠구나.


항상 거실에서 일을 했는데 (장마철 한정으로) 테라스에서도 가능하겠다. 당장 노트북을 들고 나와 실험을 해보았다. 된다 돼! 작업실이 하나 더 생겼다. 다른 집들은 바비큐 식탁으로 이용하는 테라스가 내게는 야외 작업실로 탈바꿈했다. 그동안 습하고 더운 제주의 장마철을 어떻게 보낼까 막막했다. 비 오는 날엔 오름도 숲길도 한두 번이지, 번거롭기 짝이 없다. 지금 이 글이 야외 테라스에서 쓰는 첫 결실이 되시겠다. 가슴 한 켠이 든든하다. 쓸모없던 테라스가 효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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