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 대리만족용 과일이라오
세화리 하나로마트에서 발견한 용과, 이름하여 드래건 푸릇. 7월부터 나오기 시작해 현재 8월도 판매된다. 처음 용과를 봤을 땐, 수입산인 줄 알았다. 동남아에서 흔하게 먹던 과일이었으니까. 설마 제주도에서 재배되리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세상 좋아졌다고 해야 하나, 우리나라가 완연한 아열대 기후가 되었다고 해야 하나. 수도권에선 제주산 용과를 본 적이 없었다. 아하, 어쩌면 하나로마트에선 팔았을지 모르겠다. 나는 대부분 생협과 이마트를 이용했는데 거기선 보지 못 했다.
포장지에 국산, 제주산이라고 박혀 있다. 나는 반가워서 얼른 집어왔다지. 두 개 들이가 한 박스인데 과일 크기는 중간 정도. 동남아시아에서 자주 사 먹던 용과는 이것보다 훨씬 컸다.
2011년 아들과 함께했던 세계여행 중 방콕에 머물 때였다. 길거리 노점 식당에서 주로 아침밥을 해결하던 우리. 용과를 필두로 한 두어 가지 열대 과일을 섞어 요거트를 끼얹은 메뉴를 자주 먹었다. 시원하고 상큼한 한 끼 식사. 모자의 입맛에 안성맞춤.
2014년엔 약 두 달간 필리핀의 작은 도시 따가이따이에서 어학연수를 했다. 나는 학원이 쉬는 주말마다 현지인 시장에 가서 용과와 망고를 사 왔다. 유일한 늦깎이 아줌마 학생에게 간식으로 즐기던 열대과일은 응원이자 위로였다. 용과를 볼 때마다 내가 여행했던 동남아시아의 도시들이 생각난다.
제주 용과의 가격은 하나에 3500원가량. 이마트에서 보았던 수입산은 칠팔천 원쯤 했던가? 나는 칼로 윗동을 약간 잘라낸 뒤, 껍질을 줄줄 벗긴다. 아마 과일 중에 바나나 다음으로 껍질 벗기기가 쉬울 것이다. 접시에 반을 갈라 엎어놓고 다시 조각낸다. 냉장고에 넣어 차게 먹어야 더 맛있다고들 하는데 나는 바로 먹어도 상관없다.
단맛이 강한 한국 과일(딸기, 복숭아, 포도 등)은 호불호가 뚜렷한 한국인의 성격과 닮았다. 과일과 국민성의 상관관계를 연구한 사람은 없나요? 하여튼 용과를 처음 삼키면 '이게 무슨 맛이야?'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선명한 자주색과 용의 여의주 모습이라는 외양이 무색하게도.
겉은 화려하기 그지없는데 맛은 심심하기 그지없다. 밍밍하고 물컹하다. 실망을 하려는 순간, 끝 맛이 살짝 달큰해서 또 한 입을 먹어보게 만든다. 싱겁고 은근한 단맛. 뭐라 딱 정의하기 힘든 애매모호함. 그것이 용과의 본질이랄까. 용과가 맛있어지려면 친해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단번에 입맛을 확 잡아끄는 매력은 없다. 하지만 이 엉뚱한 녀석에게 길들면 종종 생각이 난다.
내가 산 건 '홍용과'라고 겉과 속이 모두 붉은 것. 겉은 붉고 속살이 하얀 종류가 제일 흔하다. 껍질이 노랗고 속이 하얀 것도 있다는데 아직 본 적은 없다. 나는 단연 속이 붉은 것을 좋아한다. 어쩐지 그게 더 맛나다. 세화리 하나로마트에선 항상 홍용과를 팔더라고. 결론은 내 맘대로 홍용과 승이요!
아침 식사 때 토스트와 함께 반 개를 먹는다. 오후 간식으로 나머지 반 개. 나는 용과가 보일 때마다 들고 왔다, 두 팩씩. 곧 9월이다. 제철이 끝나지 않을까? 한여름에만 나오는 귀한 것이니 있을 때 열심히 먹어두어야지. 해외여행을 대리 만족하는 추억용으로도 그만이다.
하나로마트에서 놀랄 일은 용과만이 아니었다. 어느 날 두둥, '백향과'라는 과일이 등장했다. 저건 또 뭐지? 무심히 지나쳤다가 돌아와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백향과란 과일이 우리나라에 있었던가? 제주에서만 나는 건가? 그러나 백행과 아래 쓰인 'Passion Fruit'을 발견하곤, 아 그 패션 프룻! 역시 동남아시아에서 먹어 봤던 무지하게 새콤한 과일. 패션 프룻 주스를 몇 번 사마셨던 기억이 났다.
레이다에 걸린 이 놈도 잽싸게 들고 왔다. 2, 3일 후숙 시켜 껍질이 쭈글쭈글해지면 당도가 높아진다고 적혀 있다. 나는 반을 잘랐다. 노란색 씨앗이 알알이 들어 있다. 숟가락으로 긁어내어 설탕 없이 탄산수에 섞어 먹는다. 새콤한 맛을 진하게 즐기면 더위가 가시는 듯하다.
탄산수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자면, 나는 탄산수를 아주 좋아한다. 순수하게 가스만 들어있는 탄산수. 예를 들어 초정탄산수 같은 것. 콜라나 사이다 같은 탄산음료는 싫다. 목구멍을 넘어가는 지독하게 단맛도, 먹고 나서 갈증이 심해지는 것도 싫어하는 이유다. 한여름엔 시원한 탄산수 한 잔이 갈증을 몰아낸다.
탄산수에 맛 들인 계기 역시 여행. 남아공 케이프타운의 슈퍼마켓에서 탄산수를 생수로 알고 잘못 샀다. 그때는 이게 뭐야, 이상했다. 몇 년 뒤 독일 드레스덴의 에어비앤비 숙소, 주인장이 탄산수 제조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나에게 작동법을 알려주어서 매일 탄산수를 만들어 마셨다. 참 괜찮은 물이로세? 이후로 나는 탄산수 애용자가 되었다네.
자꾸 샛길로 빠지는 이야기라 죄송합니다. 다시 패션 푸릇으로 돌아가서. 한 번은 껍질이 쭈글 해지도록 놔두었다. 얼마나 달아지나 보겠다는 심정이었다. 아 그건 비추입니다. 칼로 자를 때 속이 질질 흐른다. 패션 프룻은 어차피 단맛보단 신맛으로 먹는 거니까. 그냥 탱탱할 때 먹는 걸로.
나는 홈메이드 패션 프룻 주스를 씹지 않고 꿀꺽 삼킨다. 왜냐고? 씨앗 때문에 치아가 시리다. (한시적) 제주도민이 귤도 시어서 꺼리는 판에 패션 프룻을 씹다니. 완전 무리죠. 그냥 마셔도 아무 이상 없다.
8월의 마지막 장에 이르렀다. 머지않아 용과와 백향과를 볼 수 없겠지. 흘러간 추억의 과일이 될 테지. 혹시 제주에 사시는 분들은 얼른 달려가세요! 더 늦기 전에 말이죠. (참, 오일장에도 있다. 오일을 맞추는 게 번거로워 나는 하나로마트를 애용한 것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