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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율 Sep 13. 2022

길고 느리게 걷고 싶을 때, 절물자연휴양림 장생의숲길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입니다


장마철에 걷다가 중도 포기했던, 장생의숲길을 마침내 완주했다. 절물자연휴양림에 조성된 11.1km의 다소 긴 코스다. 7월 초에 갔다가 4km 지점에서 되돌아왔다. 습해도 너무 습했다. 걷는 게 괴로울 정도였다.


나는 날이 시원해지기를 기다렸다. 9월 초, 이제는 가도 되지 않을까. 여행 중일 땐 흐리던 습하던 비바람이 불던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행이 가지는 특성, 즉 '한정적인 시간'이라는 마법이 모든 악조건을 뛰어넘게 한다. 일종의 콩깍지 효과라고 할까. 그러나 아무리 제주일지라도 '생활'하는 입장에선 콩깍지가 벗겨질 수밖에. 현실적으로 최대한 쾌적한 상황을 따지지 않을 수 없다.



그날의 일기예보는 '구름 많음'이었다. 습도는 높았지만 아침 기온이 23도. '최대한 쾌적한'은 아니어도 걷기에 무리는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서둘러 7시 반에 출발했다. 차에 올라타기 전 하늘은 파란 바탕에 새털 같은 구름이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예쁘다! 쭉 이런 상태라면 좋겠고만. 8시, 절물자연휴양림에 도착. 오 일찍 왔다. 아직 하늘은 푸름. 기분이 좋음.


제주도의 휴양림 중 유일하게 오전 7시에 문을 여는 곳. 바로 절물자연휴양림이다. 제주시내 인근이라 방문객이 많아서일까? 제주시민은 입장료 면제. 경차 주차료 1500원. 소소하게 혜택을 받을 때마다 괜히 으쓱해지는 기분이란.


요즘 체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11. 1km를 걷는 게 쉽지는 않을 것 같은 예감. 언제나 그렇듯 나만의 속도로 천천히 느리게. 내가 혼자 숲길을 걷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여럿이 걸으면 사진 찍기가 힘들다. 둘이 걸으면 수다에 빠져 주변이 잘 보이지 않는다. 기록을 남기고 그 순간에 깊이 빠져들기 힘들다. 결론은 혼자가 제일 편하다.



매표소를 지나 오른쪽의 무장애 산책로 삼울길로 들어섰다. 삼나무 숲 사이로 데크가 깔렸다.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다가 깨달았다. 손바닥만 한 핸드폰 가방을 집에 놓고 왔구나. 봄에 플리마켓에서 건진 것. 어깨를 가로질러 매면 사진을 찍을 때 폰을 얼른 꺼냈다가 다시 쏙 집어넣기가 아주 편했다.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거나 손에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 두 손에게 자유를 선사하는 기특한 아이템이다. 모처럼 일찍 나왔다고 좋아했더니 이런 실수를. 



곧 장생의숲길 입구가 보였다. 그런데 또 뭔가 허전했다. 머리 쪽이 이상하게 시원하네? 아 모자를 차에 두고 내렸다. 오늘도 실수 만발. 차로 다시 돌아가야 하나. 하늘엔 점점 구름이 덮이기 시작했다. 구름 낀 숲길이니까 모자가 없어도 괜찮겠지? 나름의 합리화였다. 장거리 코스인데 거리를 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림자가 길어졌다가 없어졌다. 해가 들락날락 날이 흐려지고 있었다. 노루생태관찰원 팻말이 보였다. 400미터 지점. 트레킹은 아직 시작도 안 한 셈. 울퉁불퉁한 돌이 튀어나오고 나무뿌리가 거미줄처럼 드러난 길을 따라 걸었다. 곧 0. 5km 지점 팻말이 나타났다. 장생의숲길엔 이렇게 500미터마다 팻말이 서있다. 너무 맘에 들어! 길을 잃을 염려가 전혀 없으니까요.



자연휴양림에 조성된 숲길은 비교적 이정표가 잘 관리되고 있다. 올레길 열풍과 함께 제주도 구석구석에 정말 다양한 숲길이 만들어졌다. 문제는 사후 관리가 안 되는 것이다. 숲 한가운데 갈림길에서 아무 표시도 없을 땐 그야말로 멘붕이다. 나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길을 잃었다고 이야기한다. 입장료를 받더라도 팻말과 이정표만큼은 제대로 세워놓기를 소망한다. 하다못해 리본이라도. 헤매지 않을 수 있다면 입장료야 얼마든지 낼 용의가 있다.


숲길은 가능하면 시작점과 종점이 연결된 환원형 루트가 좋다. 혼자 걸어도 안전하고 출발점으로 자연스레 돌아올 수 있으므로. 시작점과 종점이 다르면 양방향 주차를 하거나 버스를 타야 한다. 사려니숲길이 그런 경우. 매우 불편하지.



쭉쭉 뻗은 삼나무들 아래 관중이 동그랗게 잎을 펼쳤다. 관중 밭이군. 나는 관중만 보면 사진을 찍게 된다. 춤추는 무희의 치마 같은 모습에 항상 눈길이 끌린다. 어떤 나무는 밑동에 연두색 이끼를 밍크코트처럼 둘렀다. 살짝 만져보았다. 보들보들했다. 아직도 고사리가 푸르렀다. 가을이 다 뭐야, 숲은 아직 여름이었다.


장생의숲길의 전반부는 습기가 많은 토양 같았다. 7월에도 그렇게 습하더니 여전히 땅이 축축했다. 그래서인지 동글납작한 돌길이 자주 나왔다. 이끼가 많은 것 또한 습도가 높다는 증거겠지. 노부부가 마주 오고 있었다. 중간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것이리라. 7시에 문 열자마자 오신 걸까. 까마귀 소리가 계속 들렸다. 활엽수림이 나타났다가 다시 삼나무 숲이 이어졌다. 2km 지점. 이쪽엔 조릿대 밭이 자리했다.



무려 여섯 개의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등장했다. 갈림길이다. 직진하면 장생의숲길 출구 쪽, 방향을 오른쪽으로 틀면 한라생태숲으로 이어진다. 여기가 절물휴양림에서 한라생태숲으로 넘어가는 그 길이다. 정식 명칭은 임도사거리. 정자와 벤치에서 쉬어갈 수 있다. 그러나 겨우 2.4km 지점. 쉬기엔 너무 일렀다, 화장실이라면 모를까.


화장실 가는 길이 이렇게 이뻐도 되는 건가? 숲 속 오두막같이 생겼다. 피아노 선율까지 흘러나왔다. 오십 대의 철칙, 화장실이 나오면 무조건 들르기. 깨끗하고 기분 좋은 화장실이었다. 나는 거울을 보고 선스틱을 꼼꼼히 덧발랐다. (새로 장만한 스틱형 선크림. 손에 묻히지 않고 여러 번 바를 수 있어 애용 중. 봄에 알았더라면 덜 시커메졌을 것임) 오늘은 모자가 없으니까요. 제주도 생활하면서 피부가 말도 못 하게 상했다. 시커멓게 타고 기미가 더욱 올라왔다. 뒤늦었지만 이제라도 신경을 써야지.


와우, 4km 지점에 도달했다. 7월에 여기까지 왔다가 돌아갔다. 이제부터 처음 걷는 길이다. 노란색 리본에 장생의숲길이라 적혀 있다. 야자수 매트는 깔렸다가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조릿대 숲이 다시 나왔다. 앞서 걷는 부부가 보였다. 나는 그들을 모델 삼아 뒷모습을 찍었다.



숲이 조금 환해졌다. 나뭇가지 사이로 하얀 구름과 드문드문 파란 하늘이 보였다. 햇빛이 비친다! 역시 흐린 것보다는 해가 나는 게 좋다. 상쾌한 공기가 폐 속 깊이 스며들었다. 토도독 토도독. 무슨 소리지? 아하 실시간으로 도토리가 떨어지고 있었다. 부부는 쉼터가 있는 곳에서 사라졌다. 장생의숲길 말고 탐방로로 빠지는 갈림길이었다.


5. 5km 지점. 딱 절반을 왔다. 마른 나뭇잎이 깔린 바닥이 보송보송했다. 아까보다 훨씬 마른땅이었다. 밝고 건조한 쪽이 역시 내 취향. 이러니 내가 장마철에 맥을 못 추지.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여긴 핸드폰이 터지네? 아들이었다. 잘 지내는지 한참 통화를 했다. 아들은 지금 여자 친구가 사는 알래스카에 가있다. 둘이 알콩달콩 재밌게 지내는 모양이다.



사랑나무가 등장했다. 두 나무가 서로 맞닿아 한 나무가 되는 연리목이다. 보통의 연리목과는 생김새가 달랐다. 서로에게 얼키설키 단단히 얽힌 모습이 나는 솔직히 기이하게 느껴졌다. 동화 같은 사랑이 아니라 지독한 애증 관계를 떠올리게 했다. 사랑하고 미워하며 수십 년 같이 산 현실 부부의 모습이랄까. 내가 너무 메말랐나.


어쨌든 나는 여기서 쉬었어야 했다. 돌판으로 만든 테이블과 의자가 있어 간식을 먹기에 알맞은 장소였거든. 무심코 지나쳤다가 쉼터를 찾지 못했다. 6km 지점이 넘어서자 급격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다리가 축축 쳐졌다. 요즘 나의 체력은 6km가 한계인가? 좀 앉고 싶었다. 때는 10시 30분. 두 시간 반을 걸어왔다.



나무 아래 그루터기 두 개 발견! 공간이 제법 아늑했다. 등산용 방석을 꺼내 그루터기에 깔았다. 가져온 간식은 삶은 달걀과 에너지바. 숲길을 걸을 때마다 먹었던 편의점 김밥에 질려 버렸다. 사실 삶은 달걀도 내가 선호하는 간식은 아니다. 가져올 게 마땅치 않아 아침에 간단히 달걀을 삶았던 것뿐. 잘 넘어가지 않아 하나를 겨우 먹었다.



나는 물을 마시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와아. 여긴 하늘 명당이다! 푸른 나뭇잎들이 공중을 모조리 뒤덮었다. 시야가 나뭇잎으로 가득 찼다. 그 틈으로 햇살이 살며시 스며들었다.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혀야 발견할 수 있는, 앞만 보면 절대 알 수 없는 경치였다. '진정한 숲'이란 이런 것. '초록의 향연'이란 말이 진실로 어울리는 곳. 내가 자리를 기가 막히게 잡았군.


초록빛 하늘과 달걀의 힘으로 7.5km 지점까지 왔다. 공기는 다시 습해졌다. 그려, 장생의숲길은 전반적으로 습한 지역인 걸 인정한다. 그런데 절물오름 가는 길이라고? 계단과 함께 절물오름 입구가 나타난 것이다. 어쩌지? 올라가곤 싶은데 이미 지친 상태. 무리를 하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오름의 고장 동쪽 마을에 살면서 오름과 퍽 친해졌다. 눈앞의 오름을 지나치긴 어려운 일이었다만. 다음을 기약하자. 집까지 멀쩡하게 돌아가야 하니까.



아쉬운 마음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동그란 돌길이 나타났다. 돌길을 밟으며 통통통 걸었다. 어쩐지 걸음이 빨라지는 느낌일세? 언제 끝나나 두고 보았는데 무려 500미터가 넘었다. 장생의숲길 중 최장 돌길 구간이었네. 그 끝은 조릿대 밭. 무성한 조릿대 사이로 아예 물이 흘렀다. 비가 많이 오면 완전 개울이 되겠다.


손목에 찬 스마트밴드가 윙윙 울렸다, 만 오천 보를 알리는 소리. 8. 5km를 지난 시점이었다. 그러고 보니 장생의숲길엔 쓰러진 나무가 없었다. 태풍 피해를 전혀 받지 않았나 보다. 붉은오름 휴양림의 해맞이 숲길엔 여기저기 나무들이 넘어져 있었다. 여기라도 무사해서 다행이다.



와와 드디어 10. 5km 지점! 600미터가 남았다. 끝이 보인다. 저기 앞에서 한 부부가 나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으름덩굴이 달렸다는 것이다. 남편 분이 으름을 땄다. "저도 그거 사진 좀 찍을게요!" "이거 처음 보세요? 하나 드릴까요?" 맘씨 착한 부부 덕에 으름을 얻었다. 씨는 뱉고 하얀 부분만 먹으라는데 그게 분리가 안 돼요. 조금 덜 익었나?



숲 한가운데 느닷없이 데크 길이 나타났다. 이건 뭐지? 장생의숲길 코스는 아니었다. 나는 가던 대로 오솔길을 걸었다. 그 끝엔 포장도로가 이어졌다. 이게 출구일 리 없었다. 막판에 또 헤맬 줄이야. 일단 도로를 걸어 숲길을 빠져나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근처에서 '장생의숲길 출구'라는 팻말을 발견했다. 그러니까 대망의 결말은 저 길로 나왔어야 했던 것이다.




억울했다. 나는 거꾸로 출구를 걸어올랐다. 곧 아까 그 데크길이 나왔다. 오라 여기서 오른쪽 오솔길로 빠져야 했구나. 그런데 이정표가 없구나. 옥에 티였다. 출구 쪽으로 나가는 화살표 하나만 있었으면 완벽했는데. 절물휴양림에 자주 와본 도민이 아닌 다음에야 어느 방향이 출구인 줄 알겠는가.


8시에 출발해 12시 10분 도착. 장생의숲길 11. 1km에 4시간 10분이 걸렸다. 길고도 느린 여정이었다. 12시까지 돌아오는 게 나의 목표였으므로 결론은 성공인 걸로. 그러나. 나의 실수는 끝나지 않았다.


핸드폰의 배터리가 20% 남았다. 곧 폰이 고이 잠드실 예정. 총 5시간 가까이 사진을 찍고 카톡에 메모를 했다. 배터리가 나갈 밖에. 왜 보조 배터리를 챙겨 오지 않았을까! 원래는 근처 카페에서 커피와 샌드위치를 먹으려고 했다. 카페를 찾아가면 아마 핸드폰은 완전히 방전될 것이다.


그 상태로 차에서 충전이 될지 확신하기 어려웠다. 한 번도 그렇게 해본 적이 없다오. 카페에서 충전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내비를 못 보면 나는 미아가 된다. 집까지 어떻게 가냐고요! 당장 차에 핸드폰을 꼽고 집으로 달렸다. 아무튼 차에선 충전이 되니까요.


걷고 나면 휴식하던 루틴을 지킬 수 없었다. 흑. 꿀맛 같은 나의 휴식 시간이 날아갔다. 집에 와서 나는 거의 쓰러졌다. 명언이 생각났다.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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