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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율 Sep 17. 2022

'가볍게주의자'가 되어야겠어, 서우봉둘레길

명품 해변 함덕


어젯밤에 일기예보를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1주일이 넘게 흐리고 비가 왔다. 지난주 금요일에 장생의숲길을 다녀온 이후 도통 걷질 못했다. 오늘 토요일 아침 10시까지는 해가 나오신단다. 태풍 난마돌이 들이닥치는 와중에 잠깐 날이 개는 것이다. 습도는 여전히 높지만 해라도 나는 게 감사할 뿐. 오전에 한두 시간 정도 가볍게 걸을 수 있는 길이 어디 있을까?


요즘 일기예보는 잘 맞지 않았다. 하늘이 온통 흐린데 현재 해님이 반짝이라고 뜬다. 같은 행원리라도 바다 쪽이랑 우리 집 쪽이 다른 건지. 그냥 예보가 틀린 건지. 그럼에도 일기예보에 기댈 수밖에 없는 신세. 내가 살고 있는 구좌읍보다 옆 동네 조천읍이 더 맑을 예정이었다. 오랜만에 함덕 서우봉을 걸어볼까?


서우봉 둘레길에는 입장 시간이 따로 없으니 무조건 일찍 가는 걸로. 7시에 일어났다. 늦어도 8시까진 도착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 예보가 나를 또 헷갈리게 한다. 여전히 잿빛 하늘인데 핸드폰엔 해가 둥실. 아 뭐냐. 함덕리도 해가 둥실인데 믿어도 되나? 우물거리다 늦게 출발, 결국 9시에 함덕 해변에 도착했다.


함덕은 파란 하늘이었다. 구름도 적잖이 끼었지만 예보대로 10시까진 괜찮을 것 같았다. 역시 함덕 바다! 김녕과 월정, 세화와는 다른 느낌이다. 깨끗하게 정비된 넓은 잔디밭과 이쁜 다리, 옥색과 코발트블루가 조화를 이룬 바다색. 그 옆 서우봉과 어우러지는 풍경이 압도적이다. 김녕, 월정, 세화가 아마추어라면 함덕은 프로의 느낌이랄까.



제주도 여행 중 여러 번 찾아갔던 함덕 해변과 서우봉. 많이 와봤던 곳이라 제주살이에선 오히려 가지 않았다. 나는 해변을 잠깐 감상하다가 서우봉 쪽으로 향했다. 서우봉을 걷는 길은 여러 갈래다. 기분대로 체력대로 내 멋대로 고르기가 가능하다.



안내판 흰색의 서우봉 산책로, 오렌지색의 서우봉 둘레길, 분홍색의 제1숲길, 하늘색의 제2숲길, 노란색의 제3숲길. 거기에 제주올레길 19코스까지 섞여 있다.


자주 왔던 만큼 나는 저 길들을 구석구석 모두 걸어보았다. 오늘의 루트는 간단 버전. 해변에 바짝 붙은 서우봉 둘레길을 먼저 갔다 온다. 그 후 제1숲길을 통해 서모 정상, 망오름 정상을 밟고 제3숲길로 낙조 전망대까지. 거기서 처음의 산책로로 돌아온다.


서우봉 둘레길은 미완성이다. 몇 년 전과 마찬가지로 아직도 미개통 구간이 그대로였다. 미개통을 개통할 생각이 있긴 한 건지 모르겠다. 미개통 구간 때문에 산책로와 연결이 되지 않는다. 즉 갔던 길로 고스란히 되돌아와야 한다. 그래서 둘레길과 산책로가 갈라지는 지점에서 사람들은 살짝 고민을 하다가 산책로로 빠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나의 선택은 언제나 서우봉 둘레길 먼저. 요즘 계속 비가 왔던 여파인지 바닥이 미끈거리고 질척하다. 왼쪽으로 오묘한 빛깔의 바다를 끼고 걷는 길. 아름다운 이 풍경을 어떻게 건너뛰나요? 곧 숲 터널이 나타난다. 서우봉 둘레길의 하이라이트. 나무들로 뒤덮여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연한 바다 냄새가 밀려온다. 쏴아 파도 소리가 들린다. 숲 터널에서 듣는 파도 소리는 정말 환상적이다.



곧 길이 끝나고 출입금지 팻말이 서있다. 저 안쪽으로 더 걷고 싶다! 언제나 미개통 구간이 개통되려나? 단점이라면 엄청나게 습하다는 것. 예전엔 햇빛을 막아주어 시원했었는데? 태풍이 다가오는 중이어서일까. 땀이 줄줄 흐른다. 장마철에 걷는 것 이상으로 땀에 절었다.



이제 왔던 길을 고대로 돌아간다. 바닥에 낙엽이 쌓였다. 아까는 옥색이었던 바다에 회색 물결이 밀려들었다. 마치 물감을 푼 것처럼 색깔이 흐려진다. 갈림길에 다다랐다. 여기서부터는 제1숲길이다. 정자에 사람들이 서있다. 정자 주변은 이미 가을이다. 나무의 잎들이 거의 떨어져 가지만 앙상하다. 왜 너에게만 벌써 계절이 된통 닥쳤니?


진지동굴 입구로 내려가는 길이 나왔다. 동굴에 들렀다 갈까 말까. 얼굴에 흐르는 땀이 제 맘대로 방향을 결정했다. 동굴을 포기하라고. 너무 습해서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건 도저히 못 하겠다고. 오늘 무슨 일일까, 습기 폭탄을 맞은 것 같았다.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다. 손수건이 푹 젖었다. 간간이 부는 바람마저 없었다면 당장 입구로 발길을 돌렸을지도 모른다.


갈색 낙엽 위에 연두 초록 잎사귀가 잔뜩 떨어져 있다. 비가 온 후엔 너희들도 색깔이 변하겠지. 그렇게 낙엽은 쌓여간다. 숲길에 파도 소리가 들린다. 서모 정상으로 향하는 길. 볼에 붙인 햇빛 차단 패치가 땀에 젖어 너덜거렸다. 아예 떼어버렸다. 나는 땀을 닦고 선 스틱을 덧발랐다. 여기가 서모 정상. 벤치와 나무 두 그루가 서있다. 붉은 꽃이 가지 끝에 희미하게 달려 있다. 꽃이 한창일 땐 다들 줄 서서 사진을 찍었겠네.



오거리가 나타났다. 나는 망오름 정상으로 향했다. 예전에 바람 부는 망오름에서 경치를 내려다보던 기억이 난다. 서우봉의 두 번째 하이라이트다. 오늘의 망오름은 무덤과 푸른 잔디밭, 흐린 바다의 콜라보. 벤치가 몇 개 있지만 뜨끈해서 앉을 수가 없다. 나는 등에 맨 가방만 내려놓았다. 저 아래 멀리 경치가 보인다. 오른쪽으로 해변가 집들이 가득하고 왼쪽은 뿌연 바다. 날이 많이 흐려졌다.


오거리에 돌아왔다. 여러 방향으로 가는 길이 사방으로 아니 오방으로 나있다. 나는 낙조 전망대로 가는 길을 들여다보았다. 좁고 어두운 숲길이다. 괜히 가기가 싫다. 아직 만 보도 걷지 않았는데 이만 보를 걸은 것 같은 이 느낌은 뭐지. 땀을 너무 많이 흘렸더니 기운이 빠진다. 나는 입구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다시 해변. 구름이 몰려오면 바다에 회색빛이 늘었다가 해가 나오면 다시 옥빛으로 돌아간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함덕 바다는 역시 명품 해변. 배가 고프다. 해수욕장 근처엔 혼자 먹을 메뉴가 별로 없다. 나는 해변 뒷길을 걷다 고기 국숫집을 발견했다. 뜨거운 고기 국수는 사양합니다, 비빔국수로 먹을래요.



함덕 해변을 갈 때마다 들르는 카페, 사계. 바다 바로 앞에 자리한 델 문도보다 나는 여기가 좋다. 서우봉과 해변이 동시에 내려다보인다. 전경이 참 예쁘다. 상대적으로 한적한 것도 마음에 든다. 점심을 먹은 뒤라 배가 불렀다. 에스프레소에 설탕 한 줌. 씁쓸 달콤한 맛을 혀로 음미한다. 나는 가만히 풍경을 바라본다. 노곤하고 편안하다.


오랜만에 여행자가 된 기분이다. 일 년 살이를 하면서 오히려 여행자의 여유가 줄어들었다. 자꾸 생활자의 태도가 된다. 순간을 즐겨야 하거늘. 오늘처럼 가볍게 걷는 시간도 참 괜찮네. 맨날 흐리다, 습하다, 비 온다... 불평만 말고 가볍게 지내기. 걷는 것도 가볍게 마음도 가볍게. '가볍게주의자'가 되어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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