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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율 Sep 19. 2022

혼자 걷기 무서우면 2코스를 추천함, 삼다수숲길

바람의 숲, 삼다수 숲

아침에 갈팡질팡하느라 또 늦게 집을 나섰다. 머체왓 숲길과 삼다수 숲길 중 어디를 갈까? 어젯밤 일기예보가 다음날 아침이면 달라진다. 제주 날씨는 기상청도 모르고 며느리도 모른다는 얘기. 머체왓이 있는 남원읍 한남리는 10시까지 해님이고 28도에 바람이 7~8미터. 삼다수 숲길이 있는 조천읍 교래리는 1시까지 해님이고 25도에 바람은 3미터. 습도는 남원읍이 외려 낮았다.


어제 함덕 서우봉에서 습도가 높아 고생했다. 오늘은 가능한 한 건조하고 바람이 많이 부는 곳을 가고 싶었다. 내일은 태풍 난마돌이 온다니 나가지 못할 것이다. 마음이 머체왓 쪽으로 기울었다. 금방 흐려지고 기온이 높은 것이 살짝 걸리는 점이었다. 나는 운전석에 앉아서 네이버 지도에 머체왓 숲길을 쳤다. 어머나 35km에 45분이나 걸리네? 좀 멀다. 난 왜 30분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지?


아침마다 결정 장애에 시달리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나는 삼다수 숲길로 갈아탔다. 25km, 30분. 가까운 게 최고다! 겨울에 삼다수 숲길을 두 번 갔었다. 처음엔 나 혼자 2코스를 걸었고 두 번째엔 남편, 아들과 함께 3코스를 걸었다. 혼자 갔을 때 한적하고 사람이 없어서 조금 무서웠다. 9월이고 일요일이니까 괜찮겠지?


숲길을 걸을 때 토요일, 일요일 같은 휴일엔 사람들이 훨씬 많이 찾아온다. 혼자서 느긋하게 사진 찍으며 메모하며 걷는 건 참 좋지. 그래도 오고 가는 사람들이 있어야 겁이 나지 않는다. '따로 또 같이' 동행이랄까.



삼다수 숲길은 입구와 주차장이 꽤 먼 편이다. 교래리 소공원 주차장에서 약 20분을 걸어가야 한다. 처음 나 혼자 간 날은 숲길 입구를 찾느라 한참 헤맸다. 어쩐 일인지 표지판이 제대로 박혀 있지 않았다. 숲길을 포함해서 걷고 나니 기운이 탈탈 털렸다. 가족과 같이 갔을 땐 표지판 정비를 했는지 잘 달려 있었다. 두 부자에게 이 길을 왜 헤맸냐고 구박을 받았다. 그땐 이렇게 잘 되어있지 않았다고요, 변명을 했지만 그냥 길치로 취급받음.


하여튼 두 번의 경험으로 알게 된 것. 길은 좁아도 내 차 모닝이라면 충분히 입구 근처까지 갈 수 있겠다. 그래서 오늘은 소공원 주차장을 지나쳤다. 나는 길 안쪽까지 계속 들어갔다. 그런데 길을 잘못 들었나, 어쩐지 자꾸 좁아지는 데다 울퉁불퉁한 돌길까지 나왔다. 대충 마을 공터에 세우고 걸어갈까? 그때 맞은편에서 차 한 대가 다가왔다. 두 차가 맞닿을 듯 간신히 지나갔다. 휴.


아니, 이건 안 되겠다. 또 마주 오는 차가 있으면 진짜 곤란하다. 깔끔하게 주차장에 세우고 걸어가자. 쓸데없이 왔다 갔다 뭔 짓인지. 나는 차를 돌려 주차장으로 갔다. 새가슴 인정! 마음 편하게 살자고. 그러느라 20분 낭비. 그냥 걸어갔으면 이미 숲길에 도착했겠구먼. 꼼수를 부리려다 실패했다.



생각보다 해가 쨍쨍해서 목덜미가 따가웠다. 표고버섯 농장 두 개를 지나갔다. 바람이 시원하게 불었다. 오늘 날을 잘 잡은 것 같네. 가는 도중에 빈터마다 차를 세워둔 게 보였다. 나 같은 사람들이 많구나. 



드디어 숲길 안내판이 서있는 입구, 10시였다. 바로 앞까지 주차해둔 차들이 많았다. 다들 재주도 좋다. 경차가 아니라 중형 차인데 그 좁은 길로 어떻게 왔을까? 아하 내가 모르는 큰 길이 있나 보다.


그러나 과연 좋아할 일인지는 나중에 판명 난다. 숲길을 다 걷고 다시 입구에 나왔을 때 사건은 벌어지니까. 그 사연은 이따가 푸는 걸로. 일요일답게 안내도 앞에는 사람들이 여러 명 서있었다. 괜히 반가웠다. 세 명의 남자분이 나와 비슷하게 출발했다. 나는 2코스 입구로 직진했다.


길이 질척했다. 어젯밤에 비가 왔나 보다. 오늘은 미끈거리는 진흙길을 조심해야겠다. 넘어지기 쉬우니까. 곶자왈사람들의 숲길 걷기 모임에서 비 맞은 바위에서 미끄러진 뒤로, 나는 신경을 바짝 세운다. 그날도 남자 회원분이 뒤에서 나를 잡아주어 다치지 않았다. 비 온 다음엔 흙길도 바위도 조심조심 다녀야 한다.



2코스의 시작은 삼나무 숲이다. 공기는 습했다. 바람이 불어 다행이었다. 나무 아래 제주말로 적어놓은 팻말들, 귀엽다. 삼나무 숲을 벗어나자 활엽수 아래 조릿대 밭이 펼쳐졌다. 천미천 팻말이 보였다. 오른쪽에 천미천을 끼고도는 길이다. 머리 위로 바람 소리가 들렸다. 조릿대 밭은 꽤 길게 이어졌다.


조릿대 밭을 지난 숲길은 마른 땅이었다. 햇빛이 비치니 살 것 같았다. 하늘을 단풍나무가 뒤덮었다. 단풍철엔 훨씬 아름답겠지? 그때 다시 한번 더 와야 할까? 또 나타난 조릿대 지역. 삼다수 숲길의 우점종은 조릿대인 듯.


3코스로 갈라지는 분기점이다. 오늘은 무리하지 않고 2코스(5. 2km)만 걸으려고 마음먹었다. 3코스로 가는 길이 눈에 밟힌다. 아직은 기운이 팔팔한 게 3코스까지 가능할 것 같은 기분. 내 앞에 걷던 여자분 세 명은 3코스로 향했다. 어쩐지 부럽네. 그러나 자제하자. 에너지를 잘 분배해야 다음날도 걸을 수 있을 테니.


울퉁불퉁한 돌길과 진흙탕 길이 이어졌다. 길도 새카맣고 하늘도 어두웠다. 왼쪽은 삼나무 숲이고 오른쪽은 활엽수 숲이었다. 반반 치킨처럼 반반 숲인가? 출입 금지 표시가 보였다. 안 그래도 야생스러운데 일부러 저기로 가는 사람이 있을까? 새가슴은 하지 말라는 일은 안 한답니다.



10시 50분. 쉼터가 있다. 주차장에서부터 1시간 10분을 걸었다. 왠지 출출하네. 편히 앉아서 간식을 먹고 싶으나, 벤치가 젖었다. 나는 서서 소시지 하나를 까먹었다. 평소엔 거들떠도 안 보는 음식인데 숲길 간식으론 괜찮은 듯. 가끔은 먹어도 괜찮아. 먹고 쉬고 다시 출발.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참 듣기 좋았다. 속이 시원해졌다. 땅바닥엔 도르르 말린 잎사귀들이 떨어져 있었다. 하나를 주웠다. 다시 분기점이 나타났다. 3코스로 갔다면 이 길을 통해 2코스와 합류한다. 길 안쪽 숲속에 사람 몇이 서성거렸다. 도토리를 줍는 것 같았다. 동물들도 먹어야 하니까 너무 많이 줍지는 마세요. 재미로 조금만 주워가세요.



바람 소리가 꼭 음악소리처럼 들렸다. 숲이 연주하는 악기 소리. 눈을 감고 한참 들었다. 나무 아래 그림자가 하얗게 반짝반짝 빛났다. 해가 나타날 때마다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나뭇잎의 그림자만 보아도 바람이 느껴졌다. 삼다수 숲은 바람의 숲이었다. 일기예보엔 바람이 별로 안 분다고 나왔는데 예보가 틀려서 참 다행이다.


아까보다 공기가 훨씬 상쾌해졌다. 습도가 내려갔나 보다. 평탄한 길을 걸었다. 전에 왔을 땐 사람들도 없고 휑한 숲길이 무서웠다. 초록으로 가득한 오늘의 삼다수 숲길은 아름답기만 했다. 계절에 따라 느끼는 바가 참 달라진다.



경찰숲터 도착. 경찰들이 열심히 나무를 심어 이렇게 울창한 숲이 되었단다. 삼나무 사이에 I Love You가 서있다. 사진 찍는 포인트. 나는 혼자니까 너만 찍을게. 길 한가운데 또 쉼터가 있었다. 산들바람을 맞으며 쉬기에 딱 좋네. 나는 삼각김밥을 꺼내 먹었다. 땀이 흐른 얼굴에 선 스틱도 더 발라주고. 립스틱도 바르고. 숲 한가운데서 멋 낼 일은 없지만 입술이 건조해지니까.


작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숲길은 이어졌다. 이쪽에도 차들을 주차해 놓았다. 길을 잘 아는 도민이겠지. 12시 10분, 다시 입구로 돌아왔다. 2코스만 2시간 10분을 걸었다. 생각보다 빨리 왔는걸? 기특하다!


그런데 입구에선 난리가 났다. 공사하는 트럭이 지나가야 하는데 주차해둔 차들 때문에 움직이질 못 하는 상황이었다. 앞창에 붙여둔 차주 번호로 전화하느라 분주했다. 빨리 와서 차를 빼란다. 숲길 한가운데서 차를 빼라는 전화를 받으면 얼마나 맘이 급해질까. 이래서 주차장에 주차를 해야 하는 것이여. 나는 나의 새가슴을 칭찬했다.



숲길 밖은 여름처럼 해가 뜨거웠다. 28도에 바람은 초속 8미터, 습도는 70%. 아침보다 훨씬 건조하고 쾌적했다. 올 때처럼 20분을 걸어 주차장으로 돌아갔다. 총 3시간을 걸었네. 스마트밴드엔 만 사천 보가 찍혔다. 딱 좋다. 주차장 앞에 마침 카페가 보였다. 나는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쉬었다. 에너지 충전, 다시 집으로 달리자.


단풍이 물들 때 3코스에 재도전해 볼까? 그건 그때 가서 결정하는 걸로. 오늘의 행복은 꽉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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