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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율 Sep 22. 2022

혼자서 헤매지 않고 걷는 법, 머체왓소롱콧길

혼자라도 괜찮아

머체왓숲길엔 세 개의 코스가 있다. 머체왓숲길, 머체왓소롱콧길, 서중천탐방로. 그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머체왓소롱콧길이다. 6. 3km의 짧지도 길지도 않은 거리는 혼자 걷기에 알맞다. 또한 야생스러운 숲과 조림지가 적당히 섞여 있다. 전체적으로 나무가 빽빽한 그늘 길인 점도 나에겐 매력적이다(네, 땡볕 길을 아주 싫어합니다).


승마 코치였던 S쌤과 4월에 처음 왔었다. 그때도 소롱콧길을 걸으려다가 중간에 길을 잃었다. 수다에 정신이 팔려서 엉뚱한 샛길로 들어선 것이다. 한참을 헤매다 간신히 입구로 돌아왔다. 결국 소롱콧길과 머체왓숲길을 섞어서 걸었는데 무려 이만 보가 넘었다. 우리는 '덤 앤 더머'라며 웃었다.


7월 한창 장마철에 아들과 함께 머체왓숲길에 갔다. 사실 그날은 너무 더워서 나는 굳이 가고 싶지 않았다. 바람 불고 시원한 구좌읍 오름 쪽을 가자고 했는데 아들이 고집을 피웠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던가. 이곳 남원읍 한남리는 물에 푹 적신 듯 습했다. 머체왓숲길은 소롱콧길보다 그늘이 적어 더욱 힘들었다. 게다가 또 중간에 길을 잃은 것이여. 왜 여기만 오면 바보가 되는가.



그래서 이번엔 헤매지 말고 제대로 걸어보자, 결심했다. 날씨는 구름이 가득하다가 오후에 개인다고 했다. 바람이 불고 습도가 60%여서 걷기엔 괜찮을 것 같았다. 나는 10시 10분쯤 도착했다.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조금 보였다. 주차장 바로 앞에 식당과 족욕 카페가 자리했다. 카페 옆길의 문 앞에 안내도가 서있다.


소롱콧길의 주요 지점과 걷는 순서는 다음과 같다.


안내 센터-사슴목 쉼터-산불감시 초소-머체왓 움막쉼터-머체왓편백낭 쉼터-소롱콧 옛길- 중잣성-편백낭 치유의 숲-오글레기도궤-서중천 습지-서중천 전망대-서중천 숲터널-올리튼물-연제비도-숲유치원-안내센터



머체왓숲길은 왼쪽으로 소롱콧길은 오른쪽으로 간다. 소롱콧길 입구로 들어서면 어두운 숲이 우거져 있다. 기온이 생각보다 낮아서 썰렁했다. 더운 것보단 백 배 낫다. 주차장에서 보았던 노란 점퍼를 입은 할아버지가 앞서 걷고 계셨다. 걸음이 빠르시네. 그런데 초반부터 다리가 아팠다. 이틀 전에 다랑쉬 오름에 올라갔던 탓인가? 아님 요즘 며칠째 연달아 걸어서인가? 이 놈의 저질 체력은 정말 대책이 없다.



곧 작은 쉼터가 나타났다. 이것이 '사슴목 쉼터'인가 보다. 5번이라고 적혀 있다. 나는 깜빡 잊은 발목용 스패치를 배낭에서 꺼냈다. 모래나 먼지, 진드기 등이 신발 속에 들어가는 걸 방지해 준다. 특히 우거진 숲길을 걸을 때 아주 유용하다.


소롱콧길의 유일한 단점이 바로 이정표. 머체왓숲길은 노란색 한라봉 모양의 동그란 이정표가 곳곳에 달려 있다. 그러나 소롱콧길은 앞에 적었던 주요 지점 중 일부에만 안내판이 서있다. 몇 킬로미터 지점인지 얼마나 왔는지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예전에 그래서 길을 잃었던 것이고요. 저 번호라도 끝까지 잘 쓰여있길 바랄 뿐이다. 오늘은 그저 번호만 잘 따라가야지.


오른쪽 아래에 흐르는 계곡이 서중천이다. 흐른다고 했지만 물은 없었다. 아마 여름철 비 오는 날이 아니라면 대부분 건천일 것이다. 혼자 걷는 숲길이 한적했다. 바람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바람은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이다.



갑자기 목초지가 나타났다. 저런 풀밭은 소나 말을 먹이는 용도라고 들었다. 초록과 누런색이 겹쳐 있었다. 아마 곧 황금빛으로 물들겠지. 뽕짝 거리는 노래를 틀고 지나가는 아저씨. 과천 청계산에서도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등산하는 아저씨, 할아버지들이 많았다. 그때는 시끄럽고 싫었는데 한적한 이 길에서는 오히려 반갑네.


어디선가 희미한 향기가 흘러나왔다. 앗 이건? 작은 편백나무 숲이었다. 삼나무와 편백나무는 수피만 봐선 구분하기 어렵다. 거의 똑같으니까. 잎사귀가 납작하고 부드러운 것이 편백나무, 바늘처럼 뾰족뾰족한 것이 삼나무다. 더 쉬운 방법이 있다. 바로 냄새, 시원한 향기! 하늘로 쭉쭉 뻗은 조림지에서 아무 냄새가 없으면 삼나무 숲이고 시원하고 상큼한 향기가 나면 편백나무 숲일 확률 99%.



제주도에서 여러 숲길을 걸어보았지만 실제로 대부분은 삼나무 조림지였다. 편백나무 숲은 생각보다 드물었다. 이렇게 우연히 발견하면 얼마나 반가운지. 나는 눈을 감고 향기를 들이마셨다. 귀하디 귀한 숲의 향취. 편백나무 숲이 명품이라면 삼나무 숲은 짝퉁이랄까(그저 나만의 소견이다). 삼나무가 사람이라면 화낼지도 모르겠네.


포장도로가 가로지르는 갈림길을 만났다. 안내도가 서있다. 화살표의 머체왓 옛집터나 서중천 전망대는 머체왓숲길이다. 나는 소롱콧길 화살표를 따라가야 한다. 그러니까 여기가 머체왓숲길과 소롱콧길이 만나는 지점이자 헷갈리는 지점이었다. 아마 4월에 여기서 길을 잘못 들었던 것 같다.


마침 세 명의 가족도 나처럼 길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들도 소롱콧길을 간단다. 우리는 안내도 옆 야자수 매트 길이 진행 방향이라고 판단했다. 덕분에 쉽게 길을 찾았다. 같은 길을 간다니 괜히 즐거웠다. 살짝 뒤따라 가고 싶었다만. 나는 메모하며 사진 찍으며 걷기 때문에 걸음이 느릴 수밖에 없다. 가족은 진작에 사라졌다.



'머체왓 편백낭 쉼터'에 도착했다. 평상 옆에 시가 적힌 나무판.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 시와 숲이 멋지게 어울렸다. 아이디어 괜찮았어! 편백나무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평상에 누우면 딱이겠지만 쉴 시간은 아니었다. 까만 돌이 죽 늘어선 길로 들어섰다. 그 옆엔 삼나무 숲길. 돌길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바람도 차고 분위기가 좋구먼!


이번엔 활엽수 숲길. 모델이 패션쇼장에서 옷을 갈아입듯 여러 나무가 골고루 나타났다. 숲길을 걷는 재미가 있네. 곰솔은 안 보이는데 바닥에 바싹 마른 솔잎이 덮여 있었다. 푹신푹신 발바닥이 포근했다. 새소리와 바람소리가 음악처럼 들렸다. 이것이 자연이 연주하는 교향곡이렸다.


바닥엔 햇빛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반복했다. 단풍나무 잎이 하늘을 수놓았다. 아늑한 벤치가 두 개. 장생의숲길에서 달걀을 먹었던 그루터기가 생각났다. 두 곳의 분위기가 비슷했다.



앗 아까랑 똑같은 돌길이 나타났다. 설마 다시 돌아온 건가? 결국 이번에도 길을 잃었나?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더니. 낭패감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여기는 '중잣성'이라고 적힌 안내판이 있었다. 너무 낡아서 사진은 안 보이고 글자만 간신히 보였다. 이건 정비를 좀 해야겠군요. 시각은 11시 15분.


처음에 찍었던 소롱콧길 입구의 안내판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중잣성' 지점이 있었네. 그럼 맞게 왔다. 아까 지나왔던 돌길도 중잣성과 똑같이 생겼다. 약도에 의하면 '소롱콧옛길'에 해당한다. 그런데 카톡에 쓰던 메모가 11시경부터 입력되지 않았다. 인터넷이 안 터지는 장소란 뜻이었다. 삼다수 숲길에서도 이러진 않았다. 여기 의외로 굉장히 깊은 숲 속인가 보다.


중잣성 길 뒤로 향기가 몰려왔다. 아 편백나무 숲이다! 편백낭 쉼터와는 차원이 달랐다. 확연하게 느껴지는 시원한 향기. 일명 '편백낭 치유의 숲'. 나는 편백나무 잎사귀를 주워 줄기에 대고 사진을 찍었다. 이 납작한 편백나무 잎이 그리도 귀하단 말입니다.



쭉쭉 뻗은 편백나무들 사이에 평상이 두어 개. 햇빛이 환한 가운데 공터엔 둥그런 돌탑이 여러 개 만들어져 있었다. 소롱콧길의 딱 중간지점이었다.


"와, 향기 좋다!"

"이게 무슨 냄새야? 너무 상큼하다!"


친구로 보이는 세 명의 여자분이 감탄했다. 나는 편백나무라고 알려 주었다. 삼나무와 비슷해 보이지만 잎사귀와 향기가 다르다고 설명했다.


"혼자서도 잘 다니시네요. 여기 많이 오셨나 봐요?"

"세 번째 왔어요. 일행이 없으니 혼자서라도 올 수밖에요."



그녀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나는 평상에 백팩을 내려놓았다. 이곳이야말로 점심을 먹고 쉬기에 안성맞춤이었으니까. 오늘도 편의점 김밥. 참치김치 김밥인데 맛있네요. 절반을 왔으므로 점심 먹은 후 나머지 반을 걸으면 소화도 잘 되겠군. 


중간 쉼터답게 사람들이 여럿 지나갔다. 저쪽 평상엔 나처럼 혼자 와서 쉬는 여인이 보였다. 그저 사람만 봐도 즐거운 강아지가 된 느낌이었다.



나는 돌탑 옆에 가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핸드폰 카메라를 위로 뒤집었다. 편백나무로 둘러싸여 가운데 뻥 뚫린 하늘. 시야를 바꾸니 다른 풍경이 나타났다. 여기 참 마음에 든다! 납작하고 부드러운 잎사귀와 그윽한 향기가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만들었다. 12시가 넘어서자 날도 점점 맑아지는 것 같았다.


아직 나에겐 절반의 숲길이 남아있사옵니다. 다시 출발. 바닥은 이미 깊은 가을처럼 낙엽이 쌓였다. 계속 건천이었는데 물이 고인 소가 있네? 나는 자세히 보려고 아래로 내려갔다. 서중천이다. 갖가지 모양의 흰색과 회색의 돌들이 가득했다. 대부분 말라 있고 그 사이로 물이 조금 고였다. 물은 의외로 맑고 깨끗했다. 바닥은 건천이요, 양옆으로 브이 자 모양의 숲이 둘러쌌다. 그 위로 세모 모양의 하늘이 파랬다.


숲길로 올라와 걸음을 재촉했다. 이끼가 깔린 땅과 나무들을 지나 나무다리가 나왔다. 오랜만에 보는 이정표였다. 종점까지 2. 87km가 남았다. '서중천 습지'로 가는 길이다. 이젠 제법 햇빛이 비추었다. 가지와 잎들이 일렁이자 하늘도 일렁이는 것 같았다. 앗 노란색 리본 발견! 제발 자주 나타나 주면 안 되겠니?


포장도로를 가운데 두고 갈림길이 나왔다. 아침에 세 명의 가족과 만났던 그 갈림길에서 200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내가 걸어온 길이 지도와 일치했다. 오늘은 정말 제대로 길을 잘 찾았다. 훌륭하다, 강소율! 막상 혼자서 찬찬히 걸으니 길을 잃을 일이 없었다. 전에는 왜 헤맸을까? 역시 수다가 문제야. 떠드는데 정신이 쏠리면 '덤 앤 더머'로 변신하는 거야.


그런데 도로 건너 서있는 저것이 서중천 전망대? 전망대치고는 매우 낮았다. 그래도 올라가 봐야지. 정확히 이 지점부터 머체왓숲길과 겹치는 부분이다. 두 길의 끝부분이 같다. 이제 1. 3km가 남았다. 


노란색 국가지점번호 표시판이 서있다. 숲길이나 오름에 저런 것이 종종 보였다. 처음엔 뭔지 몰랐다. 119나 112에 신고하면 이 번호를 보고 찾아온단다. 위급상황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릴 수 있는 수단이다. 절대 신고할 일이 없기를 바란다.



남은 길은 그저 천천히 즐기며 걷기. 머체왓숲길이라고 적힌 한라봉 표시판이 자주 나타났다. 소롱콧길에도 이런 걸 달아주면 얼마나 좋겠냐고요. 아무리 수다를 떨어도 길을 잃지 않을 텐데. 왼쪽에 서중천을 끼고 걷는 길이다. 햇빛이 쨍하니 비추어 오솔길이 밝았다. 한여름 뜨거운 햇살은 사양하지만 봄가을의 맑은 햇빛은 대환영이다.



'올리튼물' 표지판을 읽었다. 다른 곳의 물이 말라도 여기만큼은 항상 물이 고여 있다고 한다. 파란 하늘과 나무가 올리튼물에 비쳤다. 그림 같았다. 그런데 저 나무는 도대체 가지가 몇 개나 뻗은 거야? 세어보니 자그마치 여덟 개! 하나의 몸통으로 자라지 못하고 여러 개로 뻗은 나무는 아픈 사연이 있단다. 어릴 때 훼손을 당해서 살아나기 위한 안간힘으로 저렇게 많은 가지를 뽑아낸다고 한다.


어느새 허벅지 아픈 게 풀렸다. 언제부터였지? 오름을 오르느라 아픈 다리는 숲길에서 치유하는 건가. 가지에 '나무를 사랑해요'라고 삐뚤빼뚤 쓴 하얀 리본이 달렸다. 여기가 마지막 지점인 '숲유치원'인가 봐. 좁은 오솔길 안에서 차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이거 무척 아이러니하군. 입구가 가까웠다.



드디어 숲길을 완전히 빠져나왔다. 1시였다. 풀밭과 그 뒤로 녹색 방풍림과 청색 라인의 한라산이 보였다. 하늘은 여전히 흰 구름으로 덮였다. 그런데 핸드폰 배터리가 30%밖에 남지 않았다. 에고, 보조 배터리를 가져오지 않았어. 장생의 숲길에서 그리 고생을 하고는 또 같은 실수를. 1일 1 실수가 나의 본질이런가.


나는 족욕카페에 가서 혹시 핸드폰 충전이 가능한지 물었다. 다행히 된단다. 고마워서 커피와 쿠키를 주문했다. 바람 부는 야외 테이블에서 느긋하게 휴식을 즐겼다. 날씨가 정말 서늘했다. 그러고 보니 걷는 동안 손수건을 꺼내지 않았다. 즉 땀을 흘리지 않았다는 소리. 세상에, 5월 초순 이후 처음이다. 그러나 제주 날씨는 변덕이 죽 끓듯 하므로. 담주에 다시 27도쯤 올라갈지 알 수 없다. 어쨌든 오늘의 숲길은 대만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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