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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율 Sep 24. 2022

저질체력이라도 문제없어, 한라생태숲 숫모르숲길

편안하고 쉬운 길





아침 8시, 하늘에 점점이 새털구름이 가득하다. 오늘은 한라생태숲의 숫모르숲길을 걸을 계획이다. 상큼한 공기에 출발하는 기분이 가볍다. 네이버 지도는 집에서 30km, 40분이 걸린다고 한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다. 초보운전에서 벗어났지만 아직 베테랑 운전자와는 거리가 먼 나에게 적당한 장소랄까.


중간에 편의점에 들러 소시지와 김밥을 샀다. 교래 사거리를 자주 거쳐가는데 늘 이 동네 편의점을 이용한다. 교래에서 한라생태숲 쪽으로 들어가는 도로 양쪽에 편백나무 숲이 한참 이어진다. 잘 닦인 도로와 들어서자마자 어두워지는 빽빽한 숲. 사열하는 근위대처럼 웅장하기 짝이 없다. 볼 때마다 감탄한다.



주차하고 발목에 스패치를 두르고 화장실을 다녀왔다. 9시다. 그런데 입장료와 주차료가 무료군, 은근히 기분 좋다. 안내소 앞에 세워진 지도판은 희미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너무 낡았다. 아고 좀 새로 만들지. 나는 팸플릿 뒷면의 지도를 확인했다. '숫모르숲길'은 한라생태숲 안을 크게 도는 4.2km의 길이다.


내가 가려는 코스는 숫모르숲길 2.4km 지점에서 절물휴양림(장생의숲길) 쪽으로 빠져 '숫모르편백숲길'의 일부를 걷는 것이다. 전에 걸었던 장생의숲길에서 한라생태숲으로 빠지는 길(임도사거리)이 있었다. 바로 거기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일정이다. 편도 4km, 왕복 8km 되시겠다.


'숫모르숲길'과 '숫모르편백숲길'. 이름이 비슷해서 무척 헷갈린다. '숫모르편백숲길'은 한라생태숲에서 시작해 노루생태관찰원까지 이어지는 8km의 길이다. 쉽게 말해 '한라생태숲의 숫모르숲길 일부 + 절물자연휴양림의 장생의숲길 일부 + 거친 오름 + 노루생태관찰원'이다. 노루생태관찰원에서 절물자연휴양림으로 돌아와야 해서 실제론 훨씬 거리가 길어진다고 한다.



안내소에서 오른쪽 길 입구에 '숫모르숲길' 팻말이 서있다. 알록달록한 등산복을 입은 세 명의 여인이 앞서간다. 숲길은 그늘이 지고 바닥엔 연푸른 나뭇잎들이 떨어져 있다. 이쁜 고사리가 활짝 폈다. 흔히 보던 고사리보다 화려하다. 이름이 궁금하다. 네이버 렌즈로 찍어보니 루모라 고사리. 다시 확인하니 보스턴 고사리. 둘 중 뭐가 맞는 건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토종이 아니었어? 관중처럼 크고 둥근 모양이 특이하다.


아직도 차 소리가 시끄럽다. 더 깊이 들어가야겠다. 나무다리가 여러 개 나온다. 초록 초록한 나무와 풀에 둘러싸여 예쁘다. 까마귀와 까치가 동시에 운다. 맨발의 할아버지가 지나간다. 요즘 맨발 걷기가 유행이라던가. 뾰족한 현무암에 찔리진 않을까? 진드기와 뱀이 무서워서 별로 권하고 싶진 않다. 한라생태숲처럼 넓은 숲길에 야자수 매트까지 깔려 있으면 조금 덜 위험할 수도 있겠다.



내가 사진을 찍고 메모를 하는 사이 여러 명이 앞서간다. 5월에 여기 왔을 때도 그렇고 숫모르숲길엔 햇빛이 잘 든다. 하얀 막대 기둥에 1.6km 지점이라고 쓰여있다. 다리가 무겁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왜 이러지? 기온이 22도에 습도 65%. 시원하지만 바람이 없다. 숲길엔 바람이 불어줘야 걷는 맛이 나는 법이거늘.


드디어 2.4km 지점. 절물자연휴양림의 숫모르편백숲길로 향하는 길이 나왔다. 여기까지 숫모르숲길은 안전하고 편안했다. 직진하면 이런 길을 똑같이 절반을 걷는 것이다. 아침 일찍 40분을 달려와 겨우 4.2km만 걷는 건 억울하지. 역시 계획대로 간다. 변화가 있어야 재미도 더해지니까.


갑자기 길이 두 개로 갈라진다. 마주 오던 아주머니에게 어느 길로 가야 하냐고 물었다. 그녀는 "여기 처음 걸으세요?"라고 되묻는다. 그렇다고 하자 그럼 왼쪽 길로 가란다. 오른쪽은 아주 가파른 오르막 계단이라면서. '가파른'을 강조하는 그녀는 '생각만 해도 아우 힘들어!' 하는 표정이다. 말보다 태도가 확실하네.



나야 늘 '현지인 말을 잘 듣자'라는 주의이므로. 평탄한 숲길을 지나 편백림 산림욕장에 도착했다. 편백나무 숲에 평상이 여러 개 놓여 있다. 제주시민으로 보이는 가벼운 차림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평상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나도 배낭을 내려놓고 앉았다. 소시지를 꺼내 먹었다. 적당한 MSG 맛이 힘을 내게 해준다.


다음엔 한적한 삼나무 숲 지역. 편백나무보단 삼나무가 많다. 화산송이가 깔린 넓은 길이 근사하다! 숲 사이로 이어지는 붉은 길이 인상적이다. 이쪽으로 오길 잘했군. 곧 삼거리가 나타났다. 왼쪽이 절물휴양림 방향이다. 엉? 얼마 안 걸었는데 벌써 임도 사거리라니! 10시 15분, 생각보다 빨리 왔다.



간식을 조금 전에 먹었지만 웬일인지 출출하다. 아침밥을 심히 가볍게 먹었나 보다. 나는 사 온 김밥을 반만 먹었다. 10시 30분에 점심을 배불리 먹긴 너무 이르니까. 내가 항상 걷는 도중에 밥을 먹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걷기를 끝낸 뒤 식당에서 편하게 먹을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먹고 바로 앉거나 운전을 하면 절대 소화가 되지 않는다. 나란 사람은 아주 성격 나쁜 위장을 가진 것이다. 흑흑.


걷기가 끝나기 한 시간 전쯤에 먹는 게 딱 좋다. 먹고 나서 마저 걸으면 소화가 잘 되고 돌아가는 운전 길도 무리 없다. 그래서 언제나 편의점 김밥을 챙길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붉은 길을 걸어 편백림 산림욕장으로 돌아갔다. 똑같은 길을 또 걷기는 싫다. 이번엔 아까 극구 말렸던 계단 길로 가봐야지. 이쪽 길은 사람들이 적다. 역시 오르막은 다들 선호하지 않는다. 그러나 계단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 충분히 갈 만한 정도. 계단을 올라 능선 길이 나왔다. 하늘이 보이고 바람이 분다. 여기가 혹시 개오리 오름을 가는 길일까?


맞다. 능선을 지나 정상에 도착했다. 개오리 오름이라고 안내판이 서있다. 정상이라고는 해도 풍경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나무로 둘러싸여 빼꼼히 하늘만 볼 수 있을 뿐. 오름이라 하면 보통 정상 아래로 커다란 분화구가 보이고 저 멀리 멋진 전경이 펼쳐질 거라고 상상한다. 그러나 이처럼 평범한 숲길인 경우도 많다.


내려가는 계단에서 세 명의 아주머니와 마주쳤다. 아래에서 헉헉거리며 올라오고 있다. "오랜만에 이 길로 왔더니 정말 힘드네!" 아까 갈림길에서 '가파른'을 강조하던 여인이 떠오른다. 그 말이 이것이었어. 나는 그저 내려가는데도 우와, 계단이 엄청나게 이어진다. 다시 평지 숲길에 들어섰다. 갈 때는 평지로 가서 돌아올 땐 계단으로 내려오기. 나는 가장 쉬운 방법을 선택한 셈이다.



돌아가는 길에 해가 반짝 빛난다. 요즘 날씨는 오후에 더 맑아지는 추세인가? 갔던 길을 다시 걷는 건 누워서 떡 먹기다. 슬렁슬렁 예쁜 숲길을 걷는다. 그런데 어느새 무겁던 다리가 풀린 걸 알아챘다. 초반엔 허벅지가 아프고 걸음이 힘들었다. 언제부터인지 아픈 게 사라졌다. 며칠 전 소롱콧길을 걸을 때도 똑같았다. 걸으면서 깊이 호흡하고 초록에 감탄하는 게 치료법인 게지.


차 소리가 들리네? 입구가 가까웠다. 숲길을 빠져나오자 빨간 병아리들을 발견했다. 아이구 귀여워라! 선생님 인솔 하에 쪼르르 걸어가는 아이들. 나는 뒷모습이 이뻐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오늘 걸은 코스 '숫모르숲길 2.4km 더하기 숫모르편백숲길 1.6km 왕복'은 난이도 '상 중 하' 중에서 고르라면 '하'에 해당한다. 걷기에 아주 편했다는 소리다. 지금까지 걸었던 숲길 중 어이없을 정도로 쉬웠다. 결론, 저질체력이라도 충분히 가능하다. 체력이 안 따라주는 분들에게 이 코스를 강력 추천합니다.


집으로 가는 길, 나는 오늘도 카페에 들렸다. 간식 먹고 김밥 먹고 쉬는 시간까지 합해 약 3시간이 걸렸다. 좀 쉬고 가야 한다는 얘기다. 커피는 필수죠. 걷지 않는 날은 집에서 핸드드립 커피를 한 잔 내려 마신다. 걷는 날은 카페에서 휴식하며 커피 마시기. 날씨가 좋을 때 부지런히 걸어야겠다고 새삼 결심했다. 제주의 날씨가 언제 무섭게 돌아설지 알 수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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