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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율 Oct 03. 2022

굳이 다 걷지 마세요, 사려니숲길

끝까지 걸어야 맛은 아니다


사려니 숲길을 갈까 말까 여러 번 망설였다. 총 10km, 요즘의 나에겐 부담스러운 거리였다. 8km 이상 걸으면 체력이 급격히 떨어진다. 특히 시작점과 종점이 완전히 다른 것도 부담을 주는 요인이었다. 사려니 숲길은 서귀포시 남조로와 제주시 비자림로, 두 군데에서 들어갈 수 있다.


어디에서 시작해도 상관없지만 주차는 남조로 쪽에만 할 수 있다. 남조로에서 시작해 종점인 비자림로 쪽에 다다르면 돌아올 방법이 애매해진다. 버스를 타거나 콜택시를 불러서 차가 있는 남조로로 돌아와야 한다. 일행이 있다면 양방향 주차가 해답이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혼자 걸을 수밖에 없는 한시적 도민.


2019년 5월에 사려니 숲길을 걸었다. 그때는 버스 여행을 하던 시절이었다. 숙소가 숲길 인근이라 버스로 금방 비자림로 입구에 도착했다. 길을 다 걷고 남조로로 나왔을 땐 운 좋게도 친절한 여행자를 만났다. 그는 붉은 오름만 다녀왔고 나는 막 숲길 전체를 걸은 참이었다. 그가 내일 숲길을 걸을 계획이라길래 나는 오늘 경험을 이야기해 주었다. 대화 끝에 그분이 렌터카로 나를 숙소까지 태워다 주셨다. 당시 사려니 숲길에 대한 기억은 '매우 좋음'으로 입력되었다.



제주도의 대표적인, 그 유명한, 사려니 숲길을 다시 한번 걸을 것인가 말 것인가. 나는 두 가지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걷기로 결심했다. 9월의 마지막 날, 집에서 아침 일찍 출발했다. 남조로를 여러 번 지나다녔는데 항상 주차 전쟁이었다. 사려니 숲길 입구를 두고 길 양쪽에 차들이 빈틈없이 주차되어 있었다. 개인 차량이나 단체 버스 등이 섞여 그곳은 늘 번잡했다.


나는 가능한 한 일찍 도착하면 주차가 쉬우리라 예상했다. 8시 45분, 역시 자리가 넉넉했다. 나는 입구에서 가까운 노른자 위치에 차를 세웠다. 숲길로 들어가는 사람은 나 혼자뿐. 붉은 화산송이 길이 시작되었다. 가운데 난 도로 말고 양옆에 무장애나눔길이 따로 있었다. 삼나무 숲 사이로 데크를 깔아놓은 (흔한) 길이었다.



갈 길이 멀었다, 장장 10km. 무장애숲길 따위는 그냥 통과! 삼나무 데크 길이야 질리게 걸어보았다. 이젠 신기하지도 않았다. 제주살이 초반이었던 겨울과 봄만 해도 10km쯤이야 가뿐하게 걸었다. 9월이 끝나가는 지금은 아우, 힘겹다. 그동안 열심히도 걸어 다닌 결과, 에너지가 거의 떨어져간다.


초입은 산수국이 늘어섰다. 6월엔 탐스러웠겠지만 이젠 그저 꽃의 흔적만 남았다. 한때는 화려했으나 밀려오는 계절에게 속절없이 자리를 내어준다. 오늘도 날씨는 완전 맑음. 파란 하늘과 붉은 길의 대비되었다. 시멘트 포장도로를 걷다가 돌길이 나왔다. 붉은 길과 합해 세 종류의 길이 번갈아 이어졌다.


진한 그늘 아래 뚜르르 뚜르르 풀벌레 소리가 가득했다. 한참을 가도 설마 혼자 걸을 줄은 몰랐다. 까마귀 소리, 풀벌레 소리 그리고 내 발자국 소리만 들렸다. 2km 지점, 8번이라고 쓰인 표지판. 오솔길이 보이는데 그쪽으로 빠지기엔 갈 길이 까마득하구나. 아직도 수국 길이었고 양옆은 삼나무 숲이었다.



가지에 누리장 나무 열매가 매달렸다. 붉은 꽃받침에 파란 열매여서 눈에 확 띈다. 드디어 다른 사람들을 만났다. 마치 경보하듯 스쳐가는 부부. 아내 걸음이 얼마나 빠른지 뒤에서 남편이 부리나케 따라갔다. 막 피기 시작하는 억새가 불그스름했다. 누리장 열매들이 계속 보였다. 마름모꼴 붉은 껍질 안에 파란 알맹이가 담겼다. 비단 보자기가 귀한 선물을 감싸고 있는 것처럼.


길 곳곳에 벤치가 놓였다. 표지판에 7번이 적혔다. 1km마다 표시를 해놓은 것 같았다. 까마귀들이 여기저기서 울어댔다. 먹을 것 좀 내놓고 가라고 성화를 부리는 듯했다. 10시에 3.6km 지점. 월든 삼거리에 도착했다. 난 네 방향으로 풍경을 찍었다. 햇빛이 환해서 예뻤다.



그런데 여기까지 쭉 단순하고 평탄한 직진 길. 영 재미가 없었다. 아까 왼쪽에 있던 미로 숲길로 들어갔다 나올 걸. 나는 정자에 앉아 쉬었다. 걷는 사람들이 점점 자주 나타났다. 자 또 걸어보자고. 이후로는 삼나무 말고 자연스러운 숲이 펼쳐졌다. 살짝 완만한 오르막길이 나왔다.


나무들 아래로 넓은 조릿대 밭이 펼쳐졌다. 나무를 감싸고 올라간 덩굴식물이 특이했다. 덩굴의 잎사귀가 꼭 개모시풀을 닮았다. 이름이 궁금했다. 한남시험림길 삼거리 도착. 5.4km 지점, 딱 절반을 왔다. 옆에 '멧돼지와 들개 출몰시 행동요령' 플래카드가 두둥(!) 붙어 있었다. 으으 무섭다. 나는 멧돼지보다 들개가 더 겁난다.


그래도 점심을 먹기로 했다. 겨우 10시 40분이었지만 출출했다. 아침밥을 가볍게 먹으므로 걸으면 금세 배가 고파진다. 게다가 앉기 좋은 평상이 떡 하니 놓여 있잖우. 적당히 배고프고 앉을 자리가 있으니 내 맘대로 점심 식사 시간. 먹는 동안 멧돼지나 들개가 나타나진 않겠지? 그렇진 않을 거야.


가방에서 김밥을 꺼냈다. 늘 그렇듯 숲길 점심은 편의점 김밥. 시골에서 이른 아침에 문 여는 김밥 집은 없다. 편의점조차 흔하지 않아 미리 검색해 두어야 한다. 그나마 김밥 종류가 다양해서 괜찮았다. 아예 김밥이 남아있지 않을 때도 있는데 그러면 어쩔 수 없이 삼각김밥을 산다. 나는 그저 아무 김밥이나 있기만 하다면 땡큐다. 한 입을 먹자마자 불청객이 날아들었다.



음식 냄새를 맡고 귀신같이 다가오는 까마귀. 놈은 평상 옆의 나뭇가지에 앉아 나를 주시했다. 혹시나 남겨 줄까 봐 기다리는 중. 아서라 너 이런 거 먹으면 탈 난다. 스스로 사냥해서 먹으셔. 나는 절대 김밥이나 간식을 새들에게 주지 않는다. 일부러 땅콩을 준비했을 때를 제외하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숲길에서 까마귀가 대담하게 음식을 낚아채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들었다. 애초에 사람들이 먹이를 던져줘 버릇하니까 그런 일이 생겼을 것이다. 얻어먹다 보니 이게 쉬운 길인 걸 눈치챈 거지. 기다리면 먹이가 나오니까 힘들게 사냥할 필요가 없는 것이리라. 한 술 더 떠 뺏어 먹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야생동물의 본능을 바꾸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사람들이 먹는 음식 자체가 동물에겐 해롭다. 병들게 만든다. 까마귀는 기다렸지만 끝내 국물도 없었다. 나는 김밥을 야무지게 말아 쥐고 하나씩 먹어치웠다. 살짝 매워서 후식으로 달달한 에너지바까지 꿀꺽, 식사 끝. 실망한 까마귀는 날아갔다.



다시 걷는 길. 여기서부턴 제주시 권역이다. 물찻오름 팻말이 나왔다. 사려니 숲길에는 통제 구간이 여러 개 있다. 물찻오름과 더불어 한남시험림과 사려니 오름이 그렇다. 사려니 오름이 포함된 한남시험림은 예약을 통해 5월에서 10월 사이에만 갈 수 있다. 봄에 친구들이 왔을 때 함께 시험림에 갔었다. 여느 오름과 달리 험한 산길이었던 사려니 오름 길이 생각난다.


이쪽 편 길은 벤치도 적고 관리가 덜 된 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주차를 막아놓은 길이라 오는 사람들이 적어서 그런가? 조릿대 밭, 삼나무, 활엽수들이 이어졌다. 조릿대 밭 사이로 말라버린 천미천 계곡이 보였다. 조금 더 걸어가자 물이 약간 고여있는 부분도 있었다. 그런데 길이 오직 직선뿐이야. 돌길, 붉은 화산송이 길, 포장도로가 반복되어 이어졌다. 다른 길은 둘째치고 포장도로가 끝까지 나있을 줄은 몰랐다. 정말 지루했다.


갑자기 숲 안에서 부스럭 소리가 들렸다. 저기 고라니 두 마리닷!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았다. 새끼일까. 오늘도 고라니를 만났다. 지루한 와중에 반가운 손님이었다. 둘은 잠깐 나를 보았다가 후다닥 도망갔다. 다치지 말고 잘 살아라.


숲길 가장자리에 기세가 등등한 관중. 얘네가 지금이 봄인 줄 아나? 왜 이렇게 기가 살았지? 제주섬의 식물들은 겨울만 아니라면 언제나 제 세상인 것 같았다. 하긴 한겨울에도 곶자왈의 풀들은 푸르기만 했다. 식물의 입장에선 참 행복한 땅을 차지한 거지.



걷기 시작한 지 3시간이 지났다. 쉽고 평탄하고 재미없는데 몸이 말했다, 이젠 힘들다고. 역시 10km의 위용 앞에서 내 몸은 힘을 잃었다. 2km가 남았다. 30분만 걸으면 종점이겠다. 그러나 나는 쉬어야 했다. 벤치가 어디 있나... 저기 있다! 낡은 벤치가 여러 개 모여 있었다.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앉았다.


아까 새왓내숲길 순환로를 지나쳤다. 길이 너무 지루해서 순환로에 들르려다 말았다. 허벅지가 아프고 두통이 생겼다. 무리한다는 신호였다. 그냥 막바로 이 걷기를 끝내야겠다. 힘을 짜내어 걸었다. 드디어 끝이 보였다. 비자림로에 도착한 것이다.


입구의 안내소 직원에게 버스정류장이 어디인지 물었다. 남조로 쪽으로 가려면 길을 건너지 말고 232번 버스를 타란다. 그런데 1시간 30분 뒤에나 온다고요?! 나는 20분 간격으로 버스가 다니는 줄 알았다. 누군가가 블로그에 그렇게 써놓았다. 완전히 틀린 정보였네. 제대로 확인을 했어야 했다.



돌아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나 같은 사람이 한둘이겠나. 안내소 벽에 지역 콜택시 번호가 크게 적혀 있었다. 직원은 택시비(15000원)가 아깝다며 버스를 두 번 타란다. 교래 사거리에서 내려 남조로행 버스로 갈아타라는 것이다. 복잡하군요. 그러기엔 이미 지쳤어요. 나는 지나가던 택시를 잡았다. 남조로 주차장까지 9400원이 나왔다.


보통 사려니 숲길로 검색하면 온통 찬양하는 글뿐이다. 나 또한 처음 갔던 2019년만 해도 즐거웠던 기억이 남았다. 그러나 제주의 여러 숲길을 섭렵한 지금은 사려니 숲길에 도통 매력을 느낄 수 없었다. 기준이 높아져서 그럴 수도. 길 자체가 단조롭고 지나치게 넓다. 특히 그 포장도로는 정말 꼴 보기 싫었다. 숲길이라기보단 숲을 관통하는 긴 도로에 불과했다면, 너무 박한 평가일까.


경험자로서 10km 전체를 걷는 건 말리고 싶다(물론 체력이 넘친다면 괜찮겠지). 비자림로나 남조로 어디에서 시작하든 초반부를 걷다가 샛길(무장애숲길, 제주산림문화체험 오솔길, 미로숲길, 새왓내숲길 중 한두 곳)을 거쳐 돌아오는 걸 추천한다. 그것이 최대한 다양하게 재미있게 숲을 만끽하며 걷는 법이 되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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