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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율 Sep 30. 2022

은근히 성깔 있는, 교래자연휴양림

결국 숲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교래자연휴양림을 떠올리면 어쩐지 마음이 편했다. 집에서 차로 30분, 비교적 가깝다는 점이 첫 번째 이유였다. 작년 11월에 일 년 살 집을 알아보러 왔을 때 혼자서 완주를 했었다. 두 번째 이유는 그때 걷기가 크게 힘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내가 일 년 살이를 오고 나서 겨울에 언니가 우리 집을 방문했다. 제주도 여행이 10여 년 만이었던 언니는 까만 현무암 돌을 그리도 신기해했다. 나는 언니 취향에 맞춰 돌문화박물관에 데려갔다. 교래자연휴양림과 돌문화박물관은 서로 붙어있다. 온 김에 언니에게 휴양림도 맛 보여 주고 싶었으나 시간이 여의치 않았다. 아쉬웠다.


매표소와 매점


태풍 두 개가 지나간 후 9월 말의 제주 날씨는 더없이 쾌청했다. 이날도 구름 없이 해가 빛났다. 나는 9시경 휴양림에 도착했다. 교래자연휴양림은 매표소와 매점이 초가집이다. 전부터 그게 인상적이었다. 새파란 하늘에 정다운 초가집이 반가웠다. 신분증을 내밀고 도민이라고 했다. 직원은 밝은 얼굴로 "도민은 무료입니다!"라며 무사통과를 허락했다. 어허, 이건 선물인걸.



휴양림 숲길은 아주 단순하다. 직선으로 큰지그리 오름까지 올랐다가 그대로 돌아오면 된다. 약 4km, 왕복 8km. 숲길 입구에 초록색의 예쁜 안내판이 서있었다. 행사 중인가? 포스터가 산뜻해서 들여다보는데 어라, 아는 얼굴이다? 안내판 앞에 앉아 있던 두 명의 직원. 봄에 '곶자왈사람들(환경단체)'에서 진행한 숲 걷기 모임을 함께한 분들이었다.


가을 모임을 신청하지 못해서 안 그래도 여러 선생님들 안부가 궁금하던 차였다. 우리는 손을 맞잡고 "어머 어머! 너무 반가워요! 여기서 다 만나네요. 어떻게 지내셨어요?" 방방 뛰었다. 우연히 만나서 기쁨도 두 배!

두 분은 <곶자왈 워킹 챌린지>라는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1. 포토카드를 들고 사진을 찍는다 2. 카톡으로 카드의 코드를 스캔한다 3. 곶자왈공유화 재단 카톡 방에 참여 완료 댓글을 남긴다. 4. 제주특별자치도 개발공사가 무려 2만 원(!)을 기부한다. 잠깐의 수고로 2만 원의 곶자왈공유화 기금을 기부하게 되는 것이다.



얼떨결에 좋은 일을 하고 걷기 출발! 9시 30분이었다. 두 선생님은 오름까지 갔다가 돌아오는데 3시간 30분 정도 걸릴 거라고 하셨다. 두툼한 야자수 매트가 깔린 길이 시작되었다. 발밑이 든든했다. 곧 연두색 이끼가 잔뜩 낀 돌들이 양쪽에 늘어섰다. 곶자왈의 전형적인 오솔길이다. 내가 참 좋아하는 모습이기도 하고요.


표지판이 어찌나 자주 나타나던지. 나는 몇 미터마다 나오나 지켜보았다. 200미터마다 서있었다. 입장료가 없는 숲길엔 이정표가 너무 없어서 탈인데 여긴 지나치게 많이 만들어 놓았네. 없는 것보단 낫지만. 장생의 숲길처럼 500미터 간격으로 있는 게 제일 적당했다.



새벽에 비가 왔었나, 이슬이 내렸나. 땅이 조금 젖어있었다. 조천읍을 지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제주도 북동쪽 지역은 전부 비가 뿌렸나 보다. 물기가 비치는 고사리가 지천으로 널렸다! 초록이 꿈틀꿈틀 살아서 생동감이 넘쳤다.


한라생태숲에서 보았던 화려한 모양의 고사리와 똑같은 종류로 보였다. 루모라 고사리 또는 보스턴 고사리라고 했던 그것. 그러나 네이버 렌즈 기능이 틀릴 때가 많기 때문에 믿지 않는다. 설마 외래종이 그렇게 많을 리 없었다. 아마 토종 고사리일 거야. 이따가 꼭 이름을 물어봐야지.


오른쪽 생태관찰로로 빠지는 샛길이 나왔다. 나는 당연히 큰지그리오름까지 갔다 올 것이다. 고로 직진. 아 저 푸른 고사리밭! 온통 고사리 천지였다. 오늘 '고사리의 날'인가? 아님 여긴 '고사리 천국'인가? 해가 완전히 쨍한 날이어서인지, 고사리는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야자수 매트 길과 돌길이 번갈아 나타났다. 남은 거리 2900미터, 이제 1km를 걸어왔다. 여기서부터 약간의 오르막과 내리막이 이어졌다. 나는 배낭에서 스틱을 꺼내 들었다. 예상보다 길이 험한 편이었다. 작년엔 무리 없이 걸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현실과 다르네? 기억이 문제인 건가, 나의 체력이 문제인 건가.



뒤에서 따라오던 부부에게 길을 양보했다. 나는 비교적 천천히 걸으므로 누가 뒤에 오면 먼저 가도록 하는 게 마음이 편하다. 저 앞에서 반가운 손님을 또 만났다. 눈이 까만 고라니 한 마리. 가만히 나를 쳐다보다가 펄쩍 뛰어갔다. 우리 둘이 지금 눈이 마주친 거니! 나는 평소 고라니 운이 좀 없는 편이랄까. 남들은 숲길에서 자주 본다던데 나에겐 그런 행운이 드물었다. 오늘 여러모로 운이 좋았어!


그런데 교래자연휴양림 길은 은근한 오르막이 많았다. 대부분 울퉁불퉁한 돌이 깔려있고요. 한마디로 그리 평탄하고 쉬운 길은 아니었다. 앞서갔던 부부가 벤치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제 내가 앞장 설 차례인가.



2100미터 지점. 남은 건 1900미터. 절반까지 왔다. 다시 매트 길과 돌길이 이어지고 딱 1km가 남았다. 오솔길 평상에서 쉬어가야겠다. 나는 배낭과 모자를 벗고 물을 마셨다. 하늘은 여전히 파랬다. 내내 잠잠하던 바람이 불었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새소리를 들었다. 맑은 하늘과 새소리가 잘 어울렸다.



어머, 편백나무 쉼터가 코앞이었다. 작년에 여기 지나갔던 생각이 나네. 이 숲에서부터 큰지그리 오름을 올라가는 길이다. 편백나무 사이로 길을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바닥은 흙길이고 양쪽 테두리만 나무판. 조금 요상했다. 이건 뭐지 싶은 엉성한 길??



편백나무 숲 끝에 드디어 가파른 오르막이 시작되었다. 고지가 머지않았다. 헉헉대며 계단을 올랐다. 이전의 기억이 잘못 편집된 게 틀림없었다. 이렇게 힘든데? 표지판엔 300미터가 남았단다. 할아버지 한 분이 노래를 틀면서 지나갔다. 이 현상은 거의 국룰이랄까? 전 국토의 등산길엔 노래와 함께하는 노인분들. 그나마 조용한 노래라서 다행이었다.


아직도 100미터가 남았다. 낙엽이 쌓인 오솔길을 지나 마침내 정상! 11시 30분, 2시간이 걸렸다. 바람도 시원하게 불고 햇빛도 뜨겁게 내리쬐었다. 바람 덕에 그리 덥진 않았다. 나는 해를 등지고 앉았다. 오른쪽엔 한라산이 보였다. 왼쪽엔 겹치는 오름들이 죽 늘어섰다. 시야는 약간 흐릿했다.



표지판에서 저쪽 진 초록색 가까운 오름이 바농 오름. 딴 건 몰라도 그건 확실히 알겠다. 빽빽한 조림지가 선명하게 보였으니까. 반대편 내려가는 길의 전망이 탁 트였다. 맞아 맞아, 작년에도 이 길로 내려갔었다. 물론 왔던 길로 돌아가도 상관없다. 길이 없는 게 아니라면 다른 길로 내려가는 게 나의 법칙이지.



오래 쉬기엔 햇빛이 너무 강렬했다. 맞은편으로 내려가 아까 그 편백나무 숲에서 김밥을 먹어야겠다. 오르막보다 내리막이 훨씬 수월한 건 당연지사. 나는 곧 편백나무 숲에 돌아왔다. 김밥을 배낭에서 꺼냈다. 맛있게 먹고 있는데 모녀 한 쌍이 나타났다. 그들은 직진해야 하나 망설이는 것 같았다. 갑자기 편백나무 숲에 들어서서 당황한 것이다.


"그 위로 계속 올라가시면 큰지그리 오름이 나와요."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아 그렇군요! 여기 엄청 독특한 곳이네요. 이런 숲이 나와서 놀랐어요. 혹시 오름 가는 길은 많이 힘든가요?"

"조금 가파르긴 해요. 쉽진 않아요."


그들은 결국 올라가기로 결정했다. 그쵸, 고지가 코앞인데 끝까지 가야죠. 모녀는 식사 맛있게 하라며 발길을 돌렸다. 저쪽 평상에서도 두 명의 남자가 쉬고 있었다. 밥을 먹고 앉아 있으니 서늘했다. 숲 안은 온통 그늘이니까. '서늘'이 '싸늘'이 되기 전에 움직이자.



'이제부터 전속력으로 달려라!'는 무슨. 다리가 매우 아팠다. 숲길 초반엔 걸음이 무겁다가 돌아올 땐 풀리던 패턴이 달라졌다. 오늘은 처음부터 끝까지 힘들었다. 체력이 비상 상태를 맞이한 듯싶었다.


그리고 내 핸드폰도 비상이었다. 배터리가 37% 남았다. 아 또 보조 배터리를 안 챙겨왔네. 거실 바닥에 놓아두고 그냥 나왔다. 돌아가는 길은 사진도 카톡 메모도 없다, 막바로 전진해야 한다. 나는 자꾸 돌멩이를 밟고 미끄러졌다. 다리에 기운이 다 빠져버렸다.



겨우 절반 지점까지 돌아왔다. 그런데 아까 그렇게 생생하던 고사리가 조금 빛을 잃은 것 같았다. 아침보다 생기가 없어 보였다. 마치 영재가 둔재로 탈바꿈한 느낌? 너도 나도 아침 컨디션이 더 낫구나.


입구에서 두 분의 선생님을 다시 만났다. 숲길을 왕복하는데 총 3시간 30분. 그들은 내가 빨리 걸었단다. 그런가요? 교래자연휴양림 자체가 돌이 많은 곶자왈인데다 전체적으로 오르막 지형이라 그리 만만한 곳은 아니란다. 어쩐지요, 저도 힘들었어요.


나는 사무실에 핸드폰 충전을 부탁했다. 지인 찬스로 흔쾌히 승낙. 한 분이 보온병에 담아온 커피를 따라주셨다. 오늘은 카페 말고 숲길 의자에서 수다 떨며 휴식하기. 이런 게 야외 카페지 뭐유.


참참, 궁금했던 고사리 사진을 내밀었다. 척 보더니 바로 튀어나오는 말 '일색고사리!' 앞뒤가 같아서 이름이 일색고사리란다. 북방계 시원한 지역에서만 자라는 종이다. 한라생태숲에서도 보았다고 하자 맞다고 하셨다. 서귀포 권역의 남쪽 곶자왈에선 자라지 않는다고. 역시 전문가는 달라. 속 시원하게 궁금증이 풀렸다.


오늘 여러 가지 도움을 받았다. 핸드폰도 충전하고 커피도 얻어 마시고 고사리 이름도 확인하고. 무엇보다 우연한 만남 자체가 가장 큰 행운이었다. 나는 속으로 '숲길을 걷는 사람들끼리는 결국 숲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라는 명언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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