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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율 Oct 07. 2022

거꾸로 걸어도 매력적인, 동백동산

나의 참새방앗간




한 달여 만에 동백동산을 찾아갔다. 겨울과 봄엔 참새방앗간처럼 수시로 드나들었다. 집에서 가까운 데다 5.2km의 거리는 산책하기에 적당했으니까. 장마철부터 여름이 끝나기까지 겨우 세 번만 갔다. 습도가 높고 모기가 많아서 걷는 게 짜증 났다. 나는 시원해지기만을 기다렸다.



낮 1시 20분 도착. 입구 위로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이 어우러져 근사했다. 숲 안으로 들어서면 항상 나무 번호가 적혀있는 순서대로 오른쪽을 먼저 돌았다. 생각할 것도 없이 자동으로 발길이 향했다. 돌연 '왜 반대로 갈 생각을 한 번도 안 했을까?'라는 물음이 떠올랐다. 나는 왼쪽으로 몸을 돌렸다. 나무 번호 50번부터 거꾸로 시작이다.


뒤통수에 약한 통증이 느껴졌다. 요즘 체력이 떨어지면 두통이 생기곤 한다. 심할 땐 타이레놀을 먹지만 보통은 집에서 쉬는 걸로 대신한다. 두통은 관자놀이나 정수리 혹은 뒤통수를 옮겨 다닌다. 오늘 숲 공기를 마시면 좀 나아지려나?


숲 안은 서늘하다 못해 써늘했다. 약간 추위가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걷다 보면 금세 몸이 덥혀지니까 걱정하진 않았다. 새들이 요란스레 노래했다. 수십 번을 왔던 동백동산에서 거꾸로 걷기는 처음이었다. 방향만 다를 뿐인데 마치 다른 장소인 것처럼 느껴졌다.


전엔 이곳이 시작이 아니라 막바지 부분이었다. 길의 끝에 다다르면 풍경도 눈에 안 들어오고 종점을 향해 전진만 하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숲의 한쪽 방향만 본 것이다. 이번엔 찬찬히 숲길의 뒷면을 밟아갔다. 눈에 익었던 모습이 아니었다. 굉장히 색다른 맛이었다.


방향이 이리도 중요한 걸까. 어느 쪽을 바라보느냐가 장소를 바꾼 것만큼이나 영향을 미치는 걸까. 뭔가를 바라보는 나의 시각을 바꾸면 환경을 바꾼 것처럼 극적인 효과가 있을까. 혹시 인생이 달라질까. 어쩌면? 개똥철학 같은 의문들이 떠올랐다.



동백동산을 비롯해 제주도의 대부분의 숲은 일 년 내내 낙엽 길이다. 가을에 잎이 떨어지는 육지와 달리 봄에 새 잎이 날 때 비로소 헌 잎이 진다. 봄부터 낙엽이 쌓이는 것이다. 곶자왈의 나무와 풀은 일 년 내내 푸르고 땅바닥엔 사계절 낙엽이 떨어져 있다. 신기하지, 제주도만의 특징이다.


마주 오는 사람들에게 "안녕하세요?" 인사를 했지만 무표정에 묵묵부답. 민망하네. 나쁜 의도는 아니리라. 아마 낯선 사람들끼리 인사를 주고받는 게 어색한 모양이었다. 수줍음이 많은 걸로 쳐드릴게요.



여름에 무성하던 고사리가 눈에 띄게 수그러들었다. 오솔길이 고사리에 덮이다시피 했건만. 고사리를 건드리지 않고는 지나갈 수 없었던 길이 뻥 뚫렸다. 39번 팽나무를 지나 선흘 마을로 나왔다. 종점에서부터 여기까지 겨우 1.1km밖에 안 되었구나. 순방향으로 걸을 땐 훨씬 멀게 느껴졌었다.


마을 길엔 연두색에서 주황색으로 익어가는 감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여름엔 이 길에 내리쬐는 햇볕이 싫어서 얼른 지나가곤 했다. 20도의 서늘한 날씨에선 햇빛이 도리어 반가웠다. 저편에 거의 주황색이 된 감나무들이 나타났다. 가지에 많이도 달렸다. 잎은 거의 떨어졌다. 파란 하늘 아래 가지에 매달린 감들이 제 몸을 온통 드러내었다. 완전히 익을 일만 남았군.



먼물깍까지 가는 길엔 콩짜개덩굴에 뒤덮인 나무들이 수두룩했다. 여름보다 가을이 콩짜개덩굴의 전성기인가? 이 나무도 저 나무도 온통 덩굴에 지배된 상태였다. 공생이라고는 해도 심하지 않나? 어쩐지 나무들보단 콩짜개덩굴이 이득인 것 같았다. 덩굴로 덮인 나무의 뿌리가 바위를 알처럼(!) 품었다. 돌과 바위를 지지대 삼아 자라는 곶자왈 식생의 특성이다. 나무야말로 바위에게 기생하는 것인가.



동백동산의 하이라이트, 먼물깍에 이르렀다. 여름에 기세 좋게 솟았던 올방개는 힘을 잃어 아예 누워버렸고 연못을 점령했던 연둣빛 순채는 시들어갔다. 계절엔 장사가 없는 거야. 순리대로 사그라져 가는 거지. 세월의 무상함과 허무함이 이런 걸까나 싶을 때, 나를 흥분시킨 저것!



아기 궁둥이같이 동글동글한 열매, 네 쪽으로 갈라졌다. 세상 귀엽다! 연두색이 붉은빛으로 변해가는 듯. 나중엔 아주 빨개질까? 나무 이름이 뭔지 궁금했다. 집에 와서 찾아보니 '참빗살나무'인 것 같은데 확실하진 않았다. 누구 아는 분 계시면 알려주세요!


먼물깍에 왔을 무렵 몸에서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어느새 추위는 사라지고 조금 더워진 듯?? 나는 여름용 등산 장갑을 벗고 소매를 걷어올렸다. 어라, 모기가 없네. 8월 말엔 모기 때문에 걷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이젠 모기 철도 지나갔나 보다.


태풍을 정통으로 맞은 것처럼 뿌리째 뽑힌 나무. 이미 죽은 나무 하나와 동백나무가 같이 붙어 있었다. 동백나무가 죽은 나무를 의지해 자라고 있던 것 같았다. 서로 다른 나무들이 맞붙어 한 몸이 된 연리목은 자주 보았다. 그런데 죽은 나무를 기대고 자라는 나무라니. 그저 썩어서 거름이 되는 게 아니라 죽은 몸 자체로 도움을 주는 존재라니. 상상도 못 했다.


죽음을 당당히 이용하는 동백나무도 영리하기 짝이 없었다. 두 나무에 박수를 쳐주고 싶다. 더구나 동백은 아직 죽지 않았다. 가지와 잎사귀들이 초록으로 반들거렸다. 누가 봐도 살아있는 모습이었다. 비록 뿌리가 뽑혔지만 어떻게든 이겨낼 것 같았다. 저렇게 누운 채로 다시 뿌리를 뻗어 살아가는 나무를 얼마 전에 본 적이 있다. 그 인내와 기발함에 깜짝 놀랐다. 누가 식물을 수동적이라고 하는가. 동물 못지않게 치열하게 삶과 싸우는 생명체가 식물이다.



땅을 단단하게 지탱하는 판근과 위로 뻗은 가지들이 서로 닮았다. 멋지다. 그 모습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늘 사진을 찍고야 만다. 숲 안쪽은 죽은 나뭇가지들이 땅에 많이 떨어져 있었다. 간벌한 흔적인가. 가을이라곤 해도 숲 안쪽이 휑한 건 그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입구가 가까웠다. 벤치가 있는 곳을 양 방향으로 찍었다. 정면은 하늘이 하얗고 해가 등 뒤에서 비치는 뒤쪽은 하늘이 파랬다.


드디어 숲 밖으로 빠져나왔다. 주차장 위로 진초록의 나뭇잎이 파란 하늘과 어울렸다. 그런데 자꾸 손바닥이 가려웠다. 모기에 물렸네? 얼굴 위로 쫓아다니던 모기도 없었고 먼물깍의 물이 거의 말랐다. 나는 이제 동백동산엔 모기가 전부 사라진 줄 알았다.


나도 모르는 새에 손바닥과 손목을 물렸다. 아까 더워서 장갑을 벗고 소매를 걷어올린 부분이었다. 이야, 모기 너 참 똑똑하구나. 그리고 옷을 입은 팔뚝도 물렸다. 이야, 모기 너 참 끈질기구나. 습지도 마르고 날도 시원한데 여전히 강건한 모기들. 동백동산의 진짜 주인은 모기, 너희들이 아닐까.


앞으론 동백동산에 자주 올 것 같다. 일단 시원해서 말이지. 모기가 거슬리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조금의 헌혈을 해야겠죠. 당최 물리지 않을 재간이 없으니. 거꾸로 걷는 동백동산도 역시 좋았다. 거꾸로 걷든 바로 걷든 동백동산의 매력은 그대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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