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율 Sep 11. 2022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붉은오름 자연휴양림 1편

정반대의 기억

붉은오름 자연휴양림에 세 번 갔다. 4월 중순(22일), 6월 말(30일), 9월 초순(7일).


처음 갔던 날이 생각난다. 나는 매우 흥분한 상태였다. 날씨가 마치 영화 속에 등장하는 봄날 같았다. 단지 해가 나서가 아니라 공기 자체가 달콤했달까.  4월이라 해도 행원리 우리 집은 여전히 추웠다. (5월까지 추웠다면 믿으시겠어요?) 그곳은 포근하고 따뜻했다. 서귀포시라 그랬을까?


그래 봐야 제주시와 서귀포시의 경계선에 불과한데. 내비에 '서귀포시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란 글자가 뜨자마자 바로 붉은오름 휴양림으로 들어선다. 그러나 따스함 이상의 뭔가가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숲이 두 손 들어 나를 반기는 기분이었다.



기운이 하늘까지 뻗친 나는 공격적으로 안내도를 훑었다. 총 세 곳의 포인트가 자리한다. 먼저 붉은오름(1. 7km), 상잣성 숲길(2. 7km), 해맞이 숲길(6. 7km). 우연이겠지만 끝에 모두 일명 '행운의 숫자 7'이 들어가는 길이다. 의미는 부여하기 나름이니까. 나는 순서대로 세 곳을 모두 걸을 생각이었다.


자연휴양림 이름에 오름이 들어간 건 이곳뿐이다. 그만큼 붉은오름이 중요하단 이야기 아닌가. 붉은오름은 지도의 붉은색 삼나무 데크길과 오렌지색 상잣성 숲길의 일부를 거쳐 파란색 오름 등반로로 가야 한다. 오름에서 내려오면 위쪽 상잣성 숲길을 지나 해맞이 숲길 입구로 간다. 여기까지 벌써 목표 중 두 개를 달성하는 것이다.


나는 씩씩하게 '붉은오름 정상등반길' 팻말로 들어섰다. 마침 무료 숲해설 시간과 겹쳤나 보다. 노란색 재킷을 입은 해설사 님이 설명을 하고 계셨다. 주위에 여러 명의 관광객이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해설사 님은 지나가던 나에게 같이 들으란다. 그냥 가면 무안할까 봐 잠시 서있다가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마음이 급했다. 총 11km를 걸어야 하는데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어차피 곶자왈사람들의 '제주숲을 걷다'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중이었다. 이미 숲해설은 매주 듣고 있다고요.



데크 길을 지나자 야자수 매트 길과 계단이 번갈아 나타났다. 게시판이 나타났다. 오름에 덮인 흙(화산송이 스코리아)이 유난히 붉다고 해서 붉은 오름이란다. 뿌리를 다 드러내고 나무 하나가 쓰러져 있다. 보송보송한 솜털이 달린 새순이 올라오는 새덕이가 많았다. 이 길은 그냥 오르막이다. 올라갈수록 가파른 계단이 이어졌다. 힘든 줄도 모르고 전망대에 도착했다. 멀리 한라산과 주변의 오름들이 보였다. 전망이 끝내준다!


정상 둘레길을 한 바퀴 돌아 오름 등반로 시작점으로 돌아왔다. 평탄한 상잣성 숲길. 가장 쉬운 구간이다. '상잣성 숲길'이란 글씨가 박힌 노란색 리본에 나뭇가지에서 달랑거렸다. 곧 해맞이 숲길 입구 팻말이 보였다. 여기까지가 워밍 업. 본격적인 트래킹은 이제부터였다.



나는 구름에 붕 뜬 기분으로 숲을 걸었다. 새로 돋아난 연두색 풀과 나뭇잎이 반짝반짝 빛이 났다. 나는 살짝 취해 동화 속을 걷는 느낌이었다. 솜털에 쌓여 도르르 말린 관중이 귀여웠다. 독을 가졌다는 천남성조차 기특했다. 보라색 야생화, 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송악과 마삭줄까지 신기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예뻐, 예뻐! 너무 예뻐!"



내내 소리 질렀다(속으로). 말찻오름에 올랐고 아담한 나무다리 세 개를 지났다. 어느새 출구에 도착했다. 미친 듯이 걸었나 보다. 이후로 누군가 숲길을 추천해 달라고 하면 망설이지 않고 '무조건 해맞이 숲길을 가세요!'라고 외쳤다.     


이쯤에서 두 번째 방문을 떠올려 본다. 6월에 붉은오름 자연휴양림을 간 건 사람들과 함께였다. 곶자왈사람들의 '제주숲을 걷다'의  12회 차 모임. 장마철이라 흐리고 습하고 더웠다. 우리는 곧바로 해맞이 숲길로 들어갔다.


이때는 세상에, 사진을 한 장도 찍지 않았다. 걷는 것만으로 지쳤나 보다. 더위와 습기에 취약한 나는 장마철 걷기가 힘에 겨웠다. 단체로 걸을 땐 특히 속도를 맞춰야 한다. 혼자 뒤처질 수 없다. 내 맘대로 멈추었다 사진을 찍기가 힘들다는 뜻이다. 아마 이도 저도 귀찮아서 사진을 포기한 것 같았다.


혹시 오해할까 봐 덧붙이자면. 곶자왈사람들의 '제주숲을 걷다' 프로그램이 내내 싫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4월에서 6월 초까지는 괜찮았다. 오히려 혼자 갈 수 없는 험한 길을 함께 걸을 수 있어서 즐거웠다. 인솔자 선생님이 안전하게 안내해 주셔서 편하게 마음을 놓았다. 여럿이 걷는 건 그것대로 맛이 있으니까. 이 날만 유독 힘들었다는 야그여요.


아무튼 나는 이곳이 과연 봄과 같은 장소인지 의심스러웠다. 4월에 느꼈던 사랑스러움이 완전히 퇴색되었다. 그냥 평범한 숲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배로 걸리는 느낌이었다. 길이 빨리 끝났으면 싶었다. 계절에 따라 기분에 따라 이렇게 달라지다니. 계절이 문제인 건가 내가 문제인 건가.


숲길을 내려와서 원하는 사람은 붉은오름에 가기로 했다. 나는 깨끗하게 빠졌다. 봄엔 분명 수월하게 올랐던 오름이거늘. 계단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무서운 오르막이 떠올랐다. 기억이 재편집된 것이다. 인간의 아니 나의 두뇌는 이리도 간사하단 말인가. 하나의 기억이 기분에 따라 극단적으로 갈라졌다. 나는 정반대의 기억이 공존한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아 봄날은 갔는가.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이전 10화 처음도 아닌데 제대로 바보 인증, 거슨세미오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