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율 Sep 20. 2022

태풍 난마돌이 오는 날, 다랑쉬오름

다랑쉬 오름의 네 가지 포인트 




태풍 난마돌이 온다는 날이었다. 뉴스에선 서귀포 앞바다에 파도가 높다고 떠들어댔다. 지난번 태풍 힌남노를 겪고 알게 되었다. 제주는 지역마다 편차가 심하다는걸. 더욱이 우리 동네는 해변과 떨어져 있어 큰 영향이 없었다.


요즘 아침마다 하는 일, 일기예보를 심각하게 분석(?)한다. 바람은 초속 10미터 내외. 오후로 갈수록 심해진단다. 겨울바람 정도이기에 걱정할 상황은 아니었다. 중요한 건 해가 나온다는 사실. 바람이 좀 부는 데다 맑기까지 하면 사실 땡잡은 날씨다.


아무리 내일의 걷기 계획을 알차게 세운들 아침이면 또 날씨가 바뀐다. 눈 뜨자마자 날씨를 검색하고 어디를 갈지 결정해야 한다. 태풍이 살짝 걱정되어 가까운 오름에 가기로 했다. 다랑쉬 오름이 좋겠다!


다랑쉬 오름은 인근 세화리에 있고 집에서 12km 지점. 20분이면 간다. 여긴 2월, 5월, 7월에 갔었다. 9월까지 합해 네 번째 방문이다. 겨울, 봄, 장마철, 초가을. 사계절을 전부 경험하는 셈이다. 아 아직 억새 철이 남았구나. 오름의 고장 구좌읍에 살아서 제일로 좋은 점, 오름에 쉽게 갈 수 있다. 덕분에 오름과 많이 친해졌다.


나는 창문을 열고 달렸다. 길가의 나뭇가지들이 흔들렸다. 이런 날 나가는 게 과연 잘하는 일일까? 오름으로 향하는 주변 도로는 아직도 공사가 끝나지 않았다. 거의 마무리 단계인 것 같지만 포장이 안 된 돌길이 남아 있었다. 이 길을 갈 때면 모닝의 바퀴가 무사하길 기도한다. 뾰족하고 불퉁거리는 제주의 돌이 나는 겁난다.



주차장엔 차가 대여섯 대 서있었다. 지대가 높아 벌써 바람이 달랐다. 차고 시원했다. 다랑쉬는 계단길로 시작한다. 요즘 평지인 숲길만 걸었다. 계단은 오랜만이네. 도중에 내려오는 부부를 만났다.


"오름 위쪽에 바람은 괜찮나요? 태풍이 온다고 해서요. 갈 만한가요?"

"저희도 조금만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이에요. 바람은 뭐 괜찮은 것 같아요."


아무래도 태풍 걱정을 완전히 놓을 순 없었다. 그러나 직접 바람을 맞아보니 별 탈이 없을 것 같았다. 생각보다 양호하네. 야자수 매트 길이 나타났다. 두툼하고 깨끗했다. 5월 말에 친구들과 왔던 날, 마침 계단을 교체하고 매트를 깔던 중이었다. 덕분에 먼지를 잔뜩 마셨는데 이렇게 말끔해졌군.



야자수 매트 길과 계단길이 번갈아 이어졌다. 커다란 곰솔 아래 자리한 쉼터. 아래에 있는 아끈다랑쉬를 감상하는 명당이었다. 바람이 마주 불고 주위는 고즈넉했다. 풀벌레 소리가 들렸다. 저 아끈다랑쉬를 올라보겠다고 7월에 갔다가 '어머나 무서워라!' 하며 물러났었지.


저기 평지의 길부터 허리까지 자란 풀이 무성했다. 겨우 풀을 헤치고 오르막 입구에 섰는데 와. 도무지 발밑에 뭐가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물론 길 자체도 흔적이 사라졌다. 풀이 다 덮어버린 것이다. 오르막이 짧아서 금방 오른다고들 하는데. 도저히 발을 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는 가을을 기약하고 포기했다.



아끈다랑쉬 오름 위로 흘러가는 구름 그림자를 따라 허연 풀(억새?)들이 물결쳤다. 오름 정상은 허연 파도 같고 아랫부분은 연두와 초록이 섞여있었다. 다랑쉬 중턱에서 바라보는 아끈이의 조망이 근사했다. 어쩌면 아끈다랑쉬는 여기서 보는 모습이 제일 아름다울지도 모르겠다. 


인간관계도 경치도 마찬가지 아닐까. 그 안에 속해 있는 것보다 조금 떨어져야 제대로 보인다. 나를 들여다보고 타인을 파악할 약간의 거리가 필요한 것이리라.


에고, 오랜만에 오르는 계단이 힘들었다. 앞에서 부러진 가지들을 치우는 여자분이 계셨다. 일종의 플로깅을 하시는 건가?


"안녕하세요? 태풍 때문에 부러진 가지들을 치우시는 거예요? 참 좋은 일 하시네요."

"아 제가 여기 관리소 직원입니다. 태풍 피해는 없고요. 방문객들 다니기 편하시라고 튀어나온 가지들을 잘라내는 거예요."

"이렇게 관리를 하시니까 늘 길이 깨끗하군요. 감사합니다."


그녀는 세화리에 산다고 했다. 행원리에서 왔다고 하니까 바로 옆 동네라며 반가워하셨다. 여기서 잠깐 수다 타임. 당신 집 2층도 일 년 살이로 내놓았고, 지인이 살고 있단다. 내가 12월에 돌아간다고 하니 다시 또 제주도에 오라며 아쉬워하셨다. 정이 많은 분이었다.



오르막 끝에 평상이 보였다. 오름에 다 올라온 것이다. 이 지점부터는 정상 둘레길. 왼쪽으로 돌까 오른쪽으로 돌까. 나는 항상 오른쪽을 선택했었다. 이번엔 반대쪽을 가려고 했다. 그러나 태양이 정면에 떠있다. 역시 오른쪽이군. 눈을 찌르는 햇빛보단 등 뒤에서 미는 햇살이 나으니까.


이쪽은 곰솔 숲이 이어지는 오르막이다. 솔잎이 바닥에 쌓여 푹신했다. 기분이 좋아졌다. 마주 오는 사람들 몇 명. "안녕하세요?" 나는 인사를 건넬 수 있어 기뻤다. 한창 코로나 시국엔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서로 외면했다. 타인에게 인사를 하는 게 무례인 상황이었다. 참 요상한 세상이었지.


오름에서 숲길에서 어쩌다 스치는 사람들, 완벽한 타인이다. 그러나 타인과 인사를 주고받을 수 있는 순수한 마음. 소소하고 단순한 그것이 얼마나 사람을 말랑하게 만드는지. 나는 참말로 이런 게 그리웠다. 그리고 지금 서로 "안녕하세요?"를 나누는 시간이 소중하다.



나는 스틱을 꺼내 들었다. 어머 오르막 오르기가 엄청 편하다! 바보, 진작에 짚고 가지. 스틱이 세 번째 다리란 말이 맞구나. 실은 사진 찍고 메모하면서 스틱까지 들기가 번거로웠다. 그래서 두 개가 아닌 한 개만 가방에 넣고 다닌다.


이제 바람은 모자를 날려버릴 듯이 몰아쳤다. 파란색 산불감시 초소가 보였다. 다랑쉬 오름이라고 적힌 붉은 표지판 뒤로 커다란 분화구가 펼쳐졌다. 언제 봐도 감탄이 나온다. 분화구 안은 풀과 나무로 빽빽했다. 그 안을 볼 수 있어 다행이었다. 오름에 지나치게 녹화 사업을 잘 한 나머지, 분화구 안이 나무로 가려져 보이지 않는 곳들이 늘었다. 어느 정도는 간벌을 하는 게 좋지 않을까?


나는 모자마다 달린 끈을 빼내어 버렸었다. 육지에선 굳이 필요 없었으니까. 덜렁거리는 게 귀찮기만 했지. 제주에선 모자의 끈이 필수가 되었다. 안 그럼 바람에 모자를 잃어버린다. 내 모자는 끈이 없기에 한 손으로 정수리를 누르며 걸었다. 오름의 참맛은 뭐니 뭐니 해도 바람이지! 바람 없는 오름은 상상도 하기 싫다.



능선 위로 구름이 달리기하듯 도망쳤다. 오름에선 구름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다랑쉬 능선의 풀들은 반쯤 누렇게 물들었다. 억새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완전히 황금물결이 되면 환상이겠다! 여기에서 내려다보이는 사방이 오름들이었다. 또한 사방이 바람 소리였다.


바로 앞에 용눈이 오름이 서있다. 온통 회색빛 연두색이다. 저렇게 뻔히 보이는데 아 가고 싶다! 얼른 훼손이 복구되어 다시 걸을 날이 왔으면. 그 옆엔 X자형 숲이 돋보이는 손지 오름. 여름에 진드기가 많다고 해서 아직 못 갔다. 풀들이 시들고 억새가 한창일 때 꼭 가야지.



길에 출입 금지 팻말이 서 있는 곳은 분화구가 잘 보이는 지점들이다. 나도 분화구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가끔 사진이 실제보다 아름다울 때도 있지만 여기선 카메라가 '눈'을 못 따라간다. 한눈에 들어오는 저 압도적인 풍경이 카메라엔 도저히 담기지 않으니까. 사람의 시각은 종합적이다.


능선을 천천히 걸으며 바람을 한껏 들이켰다. 아직은 9월, 바람이 귀한 계절. 아마 10월이 되어야 바람이 흔해질 것이다. 곰솔 숲이 다시 나타났다. 이 숲길에선 능선이 보이지 않는다. 곰솔 길을 지나 드디어, 소사나무 군락지! 겨울에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소사나무숲을 보고 반했다. 울퉁불퉁한 회백색 가지들이 서로 얽혀 팔을 벌리고 서있었다. 어쩐지 영화 같은 풍경. 기이하면서도 환상적이었다.



겨울에는 잎이 과연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했다. 잎맥이 뚜렷하고 작은 잎이다. 약간 반전이지. 지금은 조금씩 시드는 중이다. 뒤에 따라오는 사람들을 먼저 보내고 나는 느리게 걸었다. 소사나무숲을 최대한 즐기고 싶었다. 그늘지고 아늑했다. 숲의 끝에 '소사나무 군락지'라고 적힌 안내판이 서있다. 겨울엔 낡아서 글씨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이젠 튼튼하고 이쁘게 바꾸었네.


다시 나타난 곰솔들. 벌써 정상 둘레길을 다 돌았다. 11시 40분. 아쉬웠다. 한 바퀴 더 돌아? 그런데 앞에서 걸어오는 저분은? 아까 그 관리소 직원이었다. 반가워서 또 아는 척을 했다. 그녀는 낫을 들고 튀어나온 가지들을 쳐냈다. 버려진 쓰레기도 주웠다. 그게 당신의 업무군요.


나는 정상 입구의 붉은 계단에 앉아 잠시 쉬었다. 일을 마쳤는지 그녀가 나를 지나쳐 갔다. 갑자기 "괜찮으시면 관리소에서 커피 한잔하고 가세요."라는 게 아닌가. 커피는 아침에 마시고 왔다만. 친절을 거절할 충분한 이유는 못 되지. 흔쾌히 승낙하고 같이 계단을 내려갔다.


그녀는 가면서도 일을 멈추지 않았다. 길가에 생수병 몇 개가 찌그러져 뒹굴었다. 그걸 얼른 쓰레기봉투에 담았다. 나는 자기가 쓴 물건을 치우지 않는 사람들을 불평했다.


"저렇게 보이는 곳에 버리면 차라리 다행이죠. 숲길 안쪽으로 쓰레기를 던져 놓거나 풀숲에 숨겨 놓는 경우도 있어요. 그게 더 골치예요."


아하, 버려도 잘 보이는 곳에 버려야 한다고라. 그런 팁 아닌 팁이 있다니. 하여튼 제발 자기가 먹은 건 자기가 가져갑시다!



정 많은 직원은 나에게 달달한 믹스 커피를 내주었다. 관리소 앞 벤치에 앉아 커피를 같이 마셨다. 우리는 제주살이에 대해, 그리고 내 얼굴에 붙인 패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햇빛을 가려주는 패치에 관심을 보였다. 나는 쿠팡에서 샀다고 알려주었다.


다음엔 내 쪽에서 궁금했다. 정식으로 관리되지 않는 작은 오름들은 언제 가는 게 좋은지. 10월 중순은 되어야 갈 만할 거란다. 그전엔 풀이 무성해서 뱀과 진드기가 위험하다고 했다. 넵,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야죠. 태풍 덕에 시원하고 사람 덕에 따스한, 다랑쉬 오름이었다. 오름은 언제나 옳다.




<다랑쉬 오름의 네 가지 포인트>


1. 중턱 쉼터에서 아끈다랑쉬 오름 감상하기

2. 정상에서 분화구 구경하기

3. 능선을 걸으며 사방의 오름들을 조망하기

4. 소사나무 군락지 산책하기

이전 12화 해맞이숲길만 콕집어 걷는법, 붉은오름 자연휴양림 2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