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소율 Sep 25. 2022

백약이 오름_부드럽고 착한 순둥이

누구라도 언제라도 오를 수 있는


<2022. 9. 24>


토요일은 걷기를 쉬기로 했다. 그런데 날씨가 맑다. 아, 또 아까워지는걸. 오전에 한라생태숲 다녀온 이야기를 썼다. 오후가 되니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이럴 땐 가까운 오름에 다녀오는 거다.


작은 오름에 가고 싶지만 아직은 풀들의 기세가 꺾이지 않았을 것이다. 길이 잘 나있는 큰 오름을 골랐다. 20분 거리의 백약이 오름이 떠올랐다. 표선면의 날씨를 검색했다. 2시에서 4시까지 구름과 해님 동시 등장. 지금은 딱 2시. 얼른 갔다 오면 되겠다.




백약이는 경사가 완만해서 누구라도 쉽게 걸을 수 있다. 오름이 가파르지 않은 건 큰 장점이다. 그래서일까, 오늘따라 가족들이 많이 보였다. 나는 3월과 5월에 왔었고 이번이 세 번째 방문. 개인적으론 초록이 가득한 계절이 훨씬 예쁘다.


길 옆의 풀들이 절반쯤 누레졌다. 10월이면 전체가 색깔이 변하겠지? 해가 앞에서 비춘다. 뒤돌아서 찍는 하늘이 더 파랗다. 양옆에 솔숲이 자리한 구간, 강아지를 데리고 가는 가족과 마주쳤다. 강아지가 어쩐지 나를 쳐다보길래 "안녕?" 하고 인사를 했다. 이 댕댕이 좀 보소, 갑자기 반색하며 나를 따라온다. "까미야, 어디 가? 일루 와야지!" 주인이 당황해서 소리친다.


우리는 하하 웃으며 헤어졌다. 분화구 능선에 도착했다. 길이 양쪽으로 이어진다. 왼쪽으로 갈까 오른쪽으로 갈까. 해의 위치가 어중간하다. 하긴 2시가 좀 넘은 시각이니까. 나는 솔숲이 우거진 오른쪽 길을 택했다. 능선은 꼭대기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가는 형태였다. 풀벌레가 울고 잠자리가 춤을 춘다.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내 마음도 간질거린다.



저 멀리 성산 일출봉과 우도가 보인다. 사진으론 잡을 수 없다. 그저 눈에 담는다. 한라산과 그 아래 봉우리들이 겹겹이 겹쳐 있다. 저런 모습은 처음이네. 마치 어머니가 올망졸망한 자식들을 품고 있는 모양새. 웅장하면서 한편으로 푸근하다. 능선에서 내려다보이는 경치가 나머지 절반의 아름다움을 꽉 채운다. 유명한 오름들이 유명해진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우리 동네 구좌읍 행원리에선 한라산이 잘 보이지 않는다. 한라산 조망이 어려워서 늘 아쉬웠다. 여긴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역시 서귀포 쪽이 '한라산 조망 부문' 갑이다. 행원리 패, 성읍리 승! 나는 능선의 누런 풀들을 보면서 작은 오름들엔 언제나 갈 수 있을까, 생각했다. 저 풀들이 쓰러지고 약해져야 작은 오름의 길을 걸을 수 있을 텐데. 역시 10월 중순은 돼야겠지.



능선을 반쯤 돌자 해가 뒤로 갔다. 평탄한 분화구 둘레길을 느리게 걷는다. 백약이는 오르는 길도 분화구 길도 모두 부드럽다. 사람을 힘들게 하지 않는 착한 오름이다. 이쪽 방향은 바람이 제법 차다. 반대쪽보다 낮게 풀들이 누웠다. 



작은 오름들도 저렇게 풀들이 넘어졌을까? 그동안 가고 싶던 숲길은 거의 걸었다. 10월은 오름 차례였다. 찜해둔 작은 오름들을 부지런히 다닐 계획이다. 따라비 오름, 다랑쉬 오름, 여기 백약이 오름같이 유명한 곳들은 언제라도 갈 수 있다. 길이 넓고 관리가 잘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한여름에도 더위만 견딘다면 오를 수 있다.


그러나 알려지지 않은 작은 오름들은 가는 게 진짜 힘들다. 더위나 습기, 햇빛이 문제가 아니다. 풀들이 허리까지 자라 길 자체가 보이지 않으니까. 오르는 길도 좁디좁은 오솔길인데 그 흔적을 찾기 힘들다. 낙상은 물론이고 억센 풀 속에 뱀이나 진드기 등이 숨어있을 수도 있다. 즉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단 얘기.


백약이 오름에서 나는 더 작고 유명하지 않은 오름을 떠올렸다. 사랑스럽고 그리운 오름들. 오름의 계절 10월이 다가온다. 모두 안녕히 기다리고 있으렴. 곧 갈게.

매거진의 이전글 한라생태숲 숫모르숲길, 저질체력이라도 문제없어!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