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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율 Sep 29. 2022

무시해서 미안했다, 아부 오름


<2022. 9. 26>


오후 2시가 되자 하늘이 쨍해졌다. 아침부터 흐렸다 맑았다 반복하는 중. 요즘 매일이나 격일로 숲길과 오름을 걷고 있다. 오늘은 건너뛸까 싶었다. 그러면서도 수시로 제주기상청의 일기예보를 확인한다. 날마다 예보를 들여다보는 게 일상이 되었다.


2시에서 4시까지 해가 나다가 그 이후에 완전히 흐려진단다. '아까움증'이 도진다. 맑은 시간에 집에 있는 게 심히 아까워지는 증상 말이다. 그저께 백약이 오름을 갔을 때와 같았다. 나는 얼른 선 스틱을 얼굴에 바르고 나섰다. 오늘도 막간의 두 시간을 알차게 활용해 보자고.



오늘의 간택지는 아부 오름. 오름이라기엔 지나치게 만만한 곳. 슬리퍼를 신고도 올라갈 수 있는 곳. 규모에 비해 주차장은 또 엄청 넓고 화장실까지 갖춘 곳. 아부 오름보다 훨씬 아름다운 (알려지지 않은) 오름들이 겨우 갓길에나 주차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무척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곳.


나는 그동안 아부 오름을 무시하는 편이었다. 너무 쉽고 너무 단순하다. 왜 유명한 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효리가 뮤직비디오를 찍었다고 해서 널리 알려졌다는데, 그냥 연예인 효과잖아? 솔직히 오름으로써의 매력은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장마철에 아들과 같이 왔을 때도 "오름이, 이게, 다야??"라는 말을 들었다. 흐리고 습한 날씨여서 평가절하된 측면이 있었지만. 딱히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아부 오름은 그냥 '나도 오름에 발자국 찍었어.' 하고 싶을 때, 잠깐 들리기 좋은 정도랄까. 딱 관광지 느낌.



어쨌든 오후 2시 반, 하늘이 예술이다. 등 뒤에서 따가운 햇살이 내리쬔다. 올라가는 길은 양쪽에 곰솔이 가득하다. 오르막은 솔숲 그늘과 양지가 번갈이 나타난다. 조금 올라가나 싶으면 벌써 정상이다. 허탈할 지경으로 금세 오른다.


아부 오름의 유래가 적힌 표지판. 송당리의 앞쪽에 자리한다고 해서 아부 오름이라는 건 수긍이 간다. 그런데 '가정에서 어른이 믿음직스럽게 앉아 있는 모습을 닮았다'라고 하는 설명은 피식 헛웃음이 나온다. 억지를 부려도 너무 부렸다. 전설의 고향도 아니고 말이 안 되잖아. 가끔 '믿거나 말거나 옛날이야기' 같은 걸 무리하게 만들어 놓는다.



여느 오름의 능선처럼 양쪽 방향으로 오솔길이 나 있다. 나는 해가 등 뒤에서 비추는 오른쪽 길로 걸었다. 잘 다져진 길이 이어진다. 곰솔이 가득해서 왼쪽의 분화구는 보이지 않는다. 이곳도 그늘과 양지가 번갈아 나타난다. 솔잎이 쌓여 바닥이 푹신하다. 아부 오름의 정상 둘레길엔 스패치나 스틱이 필요 없다.


오름인지 보통의 숲길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그냥 멍 때리며 걷기 좋은 길. 아무 생각 없이 솔 숲길을 걷는다. 다시 표지판이 나타났다. 750m 지점, 한 중간이다. 표지판의 사진이 매우 현실적이다. 입구에서 위쪽 절반은 녹색, 즉 솔숲 지역이고 아래쪽 절반은 허옇다. 다시 말해 풀밭 길이다.


거꾸로 오는 사람들과 마주쳤다. 방향은 자기 맘대로죠. 앗, 갓 떨어뜨린 소똥이다! 물결 모양이 아주 살아있네. 곧이어 탁 트인 하늘이 나타난다. 솔숲이 걷히고 능선이 뚜렷이 보인다. 여기서는 바람이 부는군. 시원하다. 오늘 귀한 바람인걸.



진한 갈색의 저 풀은 수크령인가? 강아지풀보다 뻣뻣한 게 브러시를 닮았다. 손으로 이삭을 쓸으니 씨앗들이 떨어진다. 부드럽지도 아주 까칠하지도 않지만, 나름의 기세가 느껴진다. 동물로 치면 개와 고양이 중 고양잇과에 가깝달까.



걸어온 길을 뒤돌아 보았다. 한라산이 멀리 흐릿한 선을 드러냈다. 언제 봐도 반가운 한라산이여. 이쪽 방향은 분화구가 더 잘 보인다. 그러나 나무들이 분화구 둘레를 빽빽하게 둘러쌌다. 안쪽이 잘 보이진 않는다. 녹화사업을 지나치게 잘한 결과인 듯. 분화구 조망을 위해 나무를 적당히 간벌해도 괜찮을 것 같다. 이젠 그 옛날의 벌거숭이산이 아니니까요.


관광지답게 잘 차려입은 젊은이들이 여기저기 모여서 사진을 찍는다. 오름의 진한 맛을 느끼기엔 아부가 단순하지. 그러나 관광지로선 꽤 괜찮은 선택일 것이다. 분화구를 배경으로 웨딩 사진을 찍는 신랑 신부도 있다.



나는 분화구가 선명한 오름에 오면 꼭 그 안을 들여다보고 싶어진다. 나무에 가려 안 보이는데 기어코 분화구 쪽으로 걸어간다. 풀밭을 조금 내려가 보았지만 시야는 더욱 좁아졌다. 소나무에 가려서 그렇다. 차라리 멀리서 보는 게 낫군. 가까우면 더 안 보이고 거리가 떨어져야 그나마 시야가 확보된다. 마치 사람 사이의 관계처럼.


오름의 백미는 역시 능선의 낭창한 곡선이지. 뒤돌아 분화구를 오른쪽에 두고 정면과 양옆을 둘러본다. 아부 오름을 사이에 두고 다른 오름들이 여러 개 둘러섰다. 하늘과 맞닿은 길을 걸으며 주변의 다른 오름들을 내려다보는 맛. 자꾸 뒤를 돌아본다. 오늘따라 경치가 선명하다.



파란 하늘에 해가 쨍쨍 나야 아부 오름의 참모습이 발현되는구나. 너 생각보다 멋진 놈이었어. 그동안 무시한 게 미안해졌다. 나는 절반의 분화구 능선 길을 두 번 오갔다. 이 날씨와 기분을 두 배로 만끽하고 싶었다. 이마에 땀이 송송 맺힌다. 제일 더울 시간이 제일 맑을 시간이네. 하나를 내어주고 하나를 얻는 게 세상 이치렸다.



나는 오름을 내려갔다. 내려가는 것도 물론 금방이다. 쉬운 오름이라는 건 그만큼 친절하다는 의미겠지. 아래엔 실루엣이 선명한 나무 아래 벤치가 놓여 있다. 사람들이 여유롭게 쉬고 있다. 어느새 주차장엔 차들이 가득하다. 여긴 저녁 시간이 더 붐비는 곳인가. 노을을 보려고 왔을까.


3시 30분. 구름이 하늘을 완전히 뒤덮는다. 전날의 일기예보는 참 안 맞는데 당일의 예보는 정확하다. 1시간이면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아부 오름. 너무 쉽지만 또한 오름 다운 맛이 살아있는 곳. 그동안 내가 너를 오해했다. 아부 오름을 120% 즐기려면 꼭 구름 없이 맑은 날에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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