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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율 Oct 18. 2022

가슴이 답답한 사람에게 권하는, 밧돌오름

억새바다에서 답답함 날리기

밧돌 오름에 도착한 건 한낮이었다. 7월 말에 안돌 오름에 갔다가 얼떨결에 맞은편 밧돌 오름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풀이 무성해서 발밑이 보이지 않아 무서웠다. 전체를 둘러보지 못하고 중도 포기. 나는 가을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10월 하고도 11일이었지만 허리까지 닿던 억센 풀이 수그러들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오전엔 흐렸다가 날이 개었다. 밧돌 오름 입구는 여름과 다름없이 풀에 뒤덮여 울타리가 간신히 보였다. 오가는 사람이 없어 적막했다. 흔히 웬만한 오름에는 오름 지도가 그려져 있는 커다란 안내판이 서있다. 그게 없으면 사람들의 관심이 덜한 작은 오름이란 뜻이다. 밧돌 오름엔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지나칠 법한 조그만 안내판이 있었다.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오름 관리 단체 지정 안내'란 제목 하에 '오름의 환경 자산 가치 보전을 위해 <1단체 1오름 가꾸기 운동단체>로 지정하여 책임관리하고 있습니다. 2011. 10'라고 쓰여있다. 단체명은 '제주불교문화대학 제16기 룸비니산악회'. 아하, 하나의 민간단체에서 하나의 오름을 관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도 처음 알았다. 그러나 10년 전에 시작한 것이라 지금도 유지가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부지런한 오름꾼들이 나보다 먼저 걸었기를, 그래서 길이 나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10월이어도 풀들은 여전했다. 기세가 등등한 풀밭 사이로 다행스럽게 사람들이 밟고 지나간 흔적이 역력했다. 먼저 길을 내준 분들에게 고마웠다. 이제 작은 오름들을 찾아가도 되겠구나, 안심이 되었다.


햇빛이 쨍쨍하나 바람도 그만큼 세게 불었다. 웅웅 거리는 바람 소리가 크게 들렸다. 가시덤불과 뾰족한 어린 삼나무 잎이 다리를 찔렀다. 아직 오르막이었다. 거친 바람에 쓰러진 억새가 앞길을 막았다. 정면에 선명한 오름들이 솟았다. 오름에서 또 다른 오름들을 감상하기. 오름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오른쪽으로 움푹 들어간 분화구가 나타났다. 녹색 나무와 풀에 가려 안이 잘 들여다 보이진 않았다. 정상엔 나무 벤치 두 개. 내려다보는 맛이 일품이었다. 색깔별로 아이보리, 연두, 초록의 밭이 선명했다. 직선으로 내려가면 피라미드 모양의 안돌 오름으로 갈 수 있다. 7월과는 걷는 방향이 반대였다. 여름 안돌 오름의 연둣빛은 다 사라졌다.



형제 같은 안돌 오름과 밧돌 오름 사이에는 삼나무 울타리가 둘러쳐 있다. 두 오름을 가장 편하게 가는 방법은 저 울타리를 넘어 직진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유지라 통행이 금지되었다. 오늘은 밧돌 오름만 즐길 생각이었다. 여름에 무서워서 못 갔던 낭창한 능선 길을 걸으리라.


와, 억새의 바다였다. 홍해가 갈라지듯 가운데 길이 뚫렸다. 먼저 드나든 사람들의 덕분이다. 이름 모를 선배님들께 다시 한번 감사를 드렸다. 양쪽으론 억새가 넘실거렸다. 초록은 거의 없었다. 절정의 직전이랄까.



억새의 파도를 가르며 능선 끝까지 걸었다. 여름에 얼마나 이곳까지 와보고 싶었던가. 나는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이겨내지 않고도 평화로운 정복자가 된 기분이었다. 억새가 허벅지를 쓰다듬는 느낌이 시원했다. 매끈매끈하면서 탄력이 있는 게 강하면서 동시에 부드러운 힘이 느껴졌다. 그것들은 바람에 쓰러져도 완전히 눕진 않았다.


사방이 절경이었다. 바다와 오름들, 진녹색 숲, 연두색 밭들이 어우러져 아름다웠다. 나는 오래 머물고 싶었다. 억새 바다를 다시 건너왔다. 역시 부드러운 정복자 기분을 만끽하기. 가슴이 답답한 사람은 바람 부는 날, 밧돌 오름에 오시라. 바람을 맞으며 억새 바다를 걸으면 답답함이 단숨에 풀릴 거라 장담한다.



물론 억새로 유명한 오름들이 따로 있지만 밧돌 오름만의 분위기도 그에 못지않았다. 관광객으로 북적이고 사진 찍느라 정신없는 그런 곳이 아니다. 혼자서 고즈넉한 오름 전체를 차지할 수 있으니까. 몇 번이라도 능선 길 억새 바다를 가로질러 걸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되돌아온 정상 벤치에서 일행 세 명을 만났다. 나는 어느 쪽에서 올라오셨냐고 물었다. 왠지 토박이 포스가 물씬 느껴졌거든. 내가 올라온 길은 오름 표지판이 서있는 (정식?) 입구였다. 오름은 사실 여러 방향에서 오를 수 있다. 찐 도민들은 주차하기 좋고 올라가기도 편한 길들을 잘 알고 있더라고. 예상대로 그들은 다른 방향에서 왔단다. 알려줘도 못 찾아가는 건 비밀도 아니고요.


만난 김에 나는 주저리주저리 수다를 떨었다. 여름에 좌보미 오름에 갔다가 뱀이 있을까 봐 도중에 돌아왔다는 둥, 소문나지 않은 좋은 오름이 있으면 알려달라는 둥. 그는 좌보미 오름엔 무덤이 많고 풀이 너무 억세니 가지 말라고 했다. 풀밭과 곰솔이 많은 오름엔 뱀이 없다는 알짜 정보도 말해주었다. 뱀들도 억센 풀을 싫어한단다. 활엽수가 많은 오름(예를 들어 돝오름 같은 곳)에 주로 뱀이 있다고 한다.


내가 작은 오름 중에서 동거문이 오름을 좋아한다고 하자, 자기도 그렇다고, 동거문이 오름이 알려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소문나면 사람들이 몰려들고 금세 훼손되는 과정을 꿰고 있는 것이다. 오름 취향이 같은 사람을 만나 반가웠다.


오름은 가을바람이 불 때 가장 빛난다,라고 썼다가 화사한 연두와 초록이 만발한 여름의 오름을 떠올리면 살짝 망설여진다. 눈으로 보기엔 여름이 최고, 피부로 느끼기엔 가을이 최고. 아 어느 편을 들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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