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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율 Oct 19. 2022

숨겨 두고 싶은 나의 사랑, 동거문이오름

알리고 싶지 않다



7월의 동거문이 오름


세 번째였다, 동거문이 오름은. 7월에 처음 갔을 때 깜짝 놀랐던 게 떠오른다. 기대하지 않았던 소소한 오름이었다. 그런데 유려하게 이어진 연둣빛과 초록빛 풀밭 능선에 반했다. 용눈이 오름 못지않게 선이 아름다웠다. 7월 말 드물게 바람이 시원하던 날, 나는 다시 동거문이 오름을 찾았다. 녹음이 한층 짙어졌고 오름은 살아 숨 쉬는 것 같았다.


10월, 가을의 너는 어떤 모습일까? 동거문이 오름은 주차장이 따로 없다. 백약이 오름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차도를 건너 반대편 길로 들어서야 한다. 말들이 풀을 먹는 들판을 지나 15분을 걸어갔다.


중간에 물이 고여있어 질척한 땅. 오늘도 웅덩이가 두어 개 나타났다. 여름에 비하면 적은 편. 나는 발끝으로 가장자리 마른 곳을 밟고 지나갔다. 자연휴식년제를 하고 있다는 문석이 오름 플래카드가 걸려있었다.



길 양쪽엔 억새가 나부꼈다. 7월엔 그리 덥더니만 길이 이젠 멋스러워졌다. 으슥하고 한적한 동거문이 오름 입구. 그리 알려지지 않은 오름이지만 커다란 오름 안내판이 서있다. 나름 대접을 받는다는 뜻일까. 난 스틱을 꺼내들었다. 시작부터 오르막이니까. 까만 타이어 매트를 깐 오솔길이 걷기 편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먼저 간 사람들이 많았나 보다. 내가 지나가자 풀숲에서 새들이 튀어 올랐다.



잠깐의 평지를 지나 다시 오르막. 옆은 어린 곰솔들이 자라는 중. 길은 제법 가팔라서 하얀 밧줄이 매어있다. 나는 조금 걷다가 멈추어 뒤돌아 경치를 감상했다. 오늘은 바람이 안 부네? 조금 더워질 것 같았다.


평평한 능선 길로 들어섰다. 나무에 가려 양옆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좁은 오솔길을 사이에 두고 '추락주의' 팻말이 있다. 그 뒤편에 분화구가 자리했다. 정상이었다. 그런데 웬 젊은 남자가 텐트를 설치해 놓았다. 이건 또 뭘까?? 길을 막고 선 작은 텐트. 당신, 이래도 되는 겁니꽈?!



오름 안내도 앞에 서자 분화구가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었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저 분화구로 한 번 내려가 보고 싶다. 매번 이 자리에서 아래로 늘어진 능선 길을 내려다본다. 능선은 왼쪽 언덕과 가운데 풀밭 그리고 오른쪽 언덕으로 뻗었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언덕 전체를 뒹굴고 싶었다.



일단 가운데 풀밭으로 내려갔다. 와, 억새의 향연. 여긴 바다보다 호수를 닮았다. 억새의 호수였다. 무릎 아래까지 키가 낮은 풀이 깔렸다. 오른쪽은 수크령이 차지했다. 억세고 탄탄한 검은빛 수크령. 기운 넘치는 강아지가 꼬리를 흔드는 것 같았다. 풀밭과 능선이 교차해 색이 달랐다. 풀과 수크령과 억새가 섞였다.



다음엔 왼쪽 언덕으로 올라갔다. 360도로 전경이 펼쳐졌다. 높고 낮은 풀밭의 곡선이 아름다웠다. 억새와 수크령이 춤을 추었다. 눈으론 한꺼번에 담기는데 사진으론 어림없다. 나는 사진을 직조하듯 한 편씩 찍었다. 조각조각 찍어서 한 눈으로 감상해야지. 언덕 끝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보였다.


7월에도 이곳을 내려갔다. 실은 조금 걸어가면 통행금지 팻말이 서있다. 그때는 팻말을 지나 맨 아래 풀밭까지 걸었다. 오늘은 팻말까지만. 정면의 삼나무가 가득한 오름이 눈에 띄었다. 다시 돌아와 이번엔 오른쪽 낮은 언덕으로 향했다.


붉은 바위 아래 분화구가 보였다. 까마득한 안쪽엔 나무와 풀이 무성했다. 나는 언덕을 뺑 돌았다. 가장자리 능선에서 내려다보는 풀밭과 곡선은 백 가지 경치를 보여주었다. 한자리에서 그저 시각만 달리하면 다른 풍경이 나타났다.



동거문이 오름은 특히 수크령이 열 일을 했다. 보면 볼수록 꼬리치는 검은 강아지 같아. 무슨 일이 있어도 내 편을 들어줄 것 같은 친구 같은 강아지? 나는 수크령 강아지들 사이를 한 번 더 거닐었다. 바람이 연달아 불었다. 돌아가는 게 아쉬웠다. 나는 더욱 천천히 풀밭을 가르며 걸었다.



어제 밧돌오름에서 만난 사람이 그랬다. 동거문이 오름이 알려지지 않으면 좋겠다고. 나도 적극 동의한다. 이곳은 접근이 쉬운 오름은 아니다. 주차장이 없어 불편하다. 함께 쓰는 백약이 오름 주차장조차 유명세에 비해 매우 좁다. 간신히 주차를 해도 오름 입구까지 15분을 걸어야 한다. 아마 그래서 아직까지 소문나지 않은 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오르기가 만만하지도 않다. 오르막 세 개를 거쳐야 정상이다. 난이도 상은 아니지만 중은 된달까. 그러나 일단 정상에 서면 환상적인 능선을 감상할 수 있다. 구르고 뒹굴고 싶을 만큼 넓고 아름다운 풀밭과 언덕이 펼쳐진다. 심지어 능선 전체를 실껏 걸어볼 수 있다. 이러니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꼭꼭 숨겨두고 싶은 나만의 오름.



아, 돌아가는 길에 다시 '텐트맨'을 만났다. 아직도 텐트가 그대로였다. 그는 묻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말을 걸었다. "이건 사진 찍으려고 잠시 세워둔 거예요. 나중에 치울 겁니다." 지레 찔렸나 보다. 사진을 찍는데 왜 텐트가 필요한지 도무지 모르겠다. 그것도 정상 한복판에서 말이지.


부탁하건대 제발 나의 사랑 동거문이를 훼손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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