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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율 Oct 20. 2022

마침내 포기할 결심, 손절당한 손지오름

나를 거부하다니


X자의 삼나무 숲이 독특한 손지 오름. 여름엔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오름 안내 책자에 의하면 '진드기가 많아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고 여름철엔 오르지 않는 것이 좋음'이라고 쓰여있기 때문이다. 대놓고 가지 말라고 하는 건 흔치 않다. 그만큼 힘들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제 10월 중순이므로 도전을 해보기로 했다.


전에도 몇 번 언급했지만 작은 오름들은 입구를 찾기가 어렵다. 손지 오름 또한 '내비게이션에 따라 상이하게 안내하므로 지도 참조'라는 문장을 읽고 걱정이 되었다. 나는 미리 다른 사람들이 다녀온 후기를 여러 개 뒤져보았다. 오름은 낮은데 분화구가 멋있다는 글 하나를 제외하면. 풀 때문에 오르기 힘들다, 길이 없다 등 우려되는 내용이 많았다.



일단 가보자. 후기들이 말하길 손자봉 교차로에서 우회전하여 1136 도로를 타고 가란다. 그럼 아주 작은 입구가 갑자기 나타나니 잘 살펴야 한다네. 의외로 걱정이 무색하게도 입구를 금방 찾았다. 1136 도로로 들어서서 천천히 가다가 손지 오름이라고 쓰인 버스정류장을 발견했다. 바로 그 옆 삼나무 사이에 작은 입구가 나타났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아서 나는 마음을 놓았다.



시각은 10시. 해가 반짝 빛나고 바람도 불고요. 날씨 좋고 기분도 상쾌했다. 나는 길을 따라 걸었다. 길 한가운데에 저건 무엇?! 하얀색의 거대한 버섯 무리! 놀라운 크기였다. 너 터전을 잘못 선택한 거 아니니? 아무리 사람이 드문 곳이지만 떡 하니 길 한중간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딱 밟고 지나갈 만한 자리인데.



바로 앞에 둥근 오름이 보였다. 그런데 어디로 올라가야 할지?? 한눈에 길이 보이지 않았다. 직진하지 말고 왼쪽 숲길로 돌아가야 하나. 나무가 울창한 숲을 지나 억새와 거센 풀이 뒤엉킨 곳으로 나왔다. 이쪽이 맞나? 이번엔 비자나무숲이 나타났다. 분명 길은 길인데 무척 요상했다. 가다 보면 오름으로 향하겠지(향할까)?


길을 따라 무작정 걸었다. 가시덤불이 바지에 달라붙고 종아리를 찔러댔다. 아고 따가워라. 길은 점점 험해졌다. 한여름에 허리까지 오는 풀 때문에 발밑이 보이지 않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결국 나타난 건 어느 무덤가! 아니 이 길이 무덤으로 향하는 길이었던 거냐?



어느 오름 주변에나 무덤이야 흔했다. 놀랄 일은 아니다. 문제는 내가 따라간 길이 일종의 '무덤용 전용도로'였다는 것. 딱 무덤 앞에서 길이 끝났으니까. 후손들이 성묘를 하기 위해 길을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아 완전히 잘못 짚었다.


그곳은 오름의 경사면이었다. 무덤을 뒤로하고 올라가면 어쨌든 손지 오름이겠지만. 그 방향으론 길이 전혀 없었다. 언뜻 보기에도 무시무시한 억센 풀숲을 헤치고 가야 했다. 전혀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내가 읽은 후기와 똑같았다. 바로 이런 상황이었구나.


손지 오름은 포기하고 돌아가자, 재빨리. 되돌아가는 중에도 이름 모를 가시들이 나를 콕콕 찔렀다. 나는 아까 버섯이 자라던 곳에 다다랐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지가 엉망이었다. 진드기일지도 모르는 붉은 점들이 종아리에 가득했고 가시와 풀씨가 여기저기 달라붙어 있었다. 장갑을 벗어 미친 듯이 바지를 털었다.



물을 마시고 눈앞의 오름을 쳐다보았다. 낮은 오름인데, 길만 있다면 쉽게 오를 수 있을 텐데. 정말 포기하고 돌아가야 하나. 어쩐지 약이 오르네. 나는 마지막으로 오름 풀밭을 매의 눈으로 훑었다. 저어기(!) 오솔길이라기엔 상당히 미흡한, 길의 흔적 비슷한 것이 보였다. 나는 혹시나 하는 희망을 품고 발을 들였다. 하지만 채 열 발자국도 걷지 못했다.


마침내, 포기할 결심을 할 수밖에. 그저 길이었던 흔적에 불과할 뿐 걸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개척자의 심정으로 길을 만들어 간다면 모를까. 위험을 무릅쓰고 굳이 개척자가 되고 싶진 않았다. 무리하지 않기, 혼자서 오름을 오르는 자의 원칙이다.


그제야 '손지 오름은 겨울이나 봄에만 오르는 것이 가능하다'라고 누군가 쓴 게 생각났다. 여름이 되기 전에 일찍 찾아왔어야 했구나. 니가 나를 손절하는 건지 내가 너를 손절하는 건지 모르겠다만. 하여튼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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