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율 Oct 28. 2022

온몸으로 억새밭을 걸어요, 따라비오름

제주살이의 마지막 오름


기온은 15도, 바람은 초속 10미터. 즉 약간 추울 수도 있다는 얘기다. 다행히 해가 짱짱했다. 옷을 어떻게 입어야 하지? 나는 거울 앞에서 고민을 했다. 며칠 전처럼 20도 언저리라면 기능성 반팔 티셔츠에 여름용 재킷을 걸치면 된다. 바람이 부는 날은 이런 차림이 딱 좋고 바람이 없다면 땀이 살짝 날 수도 있다.


그 유명한 따라비 오름에 가는 날이었다. 바람이 심하고 기온도 낮았다. 평소보단 따뜻하게 입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얇은 긴팔 티셔츠에 빳빳한 바람막이를 걸쳤다. 구름 없이 해가 내려쬐니 이 정도면 춥지는 않을 것이다. 숲길이나 오름을 갈 땐 옷을 얇게 입는 편이다. 걸으면 몸이 훨씬 덥혀지니까.


집에서 따라비 오름까진 차로 40분이 걸린다. 지난 4월에 쫄븐갑마장길을 걸을 때 처음 왔었다. 쫄븐갑마장길 안에 숲길과 잣성길 따라비 오름, 큰사슴이 오름 등이 포함되어 있다. 10km의 긴 거리인 데다 중간에 길을 잃어서 실제론 더 많이 걸었다. 큰사슴이 오름을 올라가면서 녹초가 되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으 너무 힘들었어.


오늘은 단순하게 가볍게 따라비 오름만 즐기기. 봄에 몇 번을 오르락내리락했던 멋진 능선 길이 떠올라 더욱 기대가 되었다. 주차장엔 생각보다 차들이 적었다. 한창 억새 철이라 사람들이 몰릴 시기인데 의아했다. 요즘 해외여행이 풀리면서 제주도 열풍이 가라앉았다는 뉴스가 생각났다. 코로나 3년 동안 제주도는 '마이 뭈다' 이건가?



오름 입구로 향하는 길부터 억새밭이 넓게 펼쳐졌다. 역시 억새로 이름난 따라비 오름답네. 그 뒤로 푸른 오름이 자리했다. 아래서 보기엔 짙푸른데 안쪽은 억새가 가득할까? 길 중간에 벤치 몇 개가 놓여 있다. 아 저 벤치! 2019년 초겨울에 언니랑 같이 여길 왔었구나. 그때 저 벤치에 언니랑 나란히 앉았던 게 떠올랐다.



벤치를 지나 오른쪽은 따라비 둘레길, 왼쪽은 따라비 정상 가는 길. 얼른 능선이 보고 싶어 정상 쪽으로 걸었다. 억새밭 앞에 사람들이 '왕따 나무'라고 부르는 나무가 서있었다. 왕따 나무라니, 너무 가엾잖아. 더 좋은 이름은 없을까? '혼자여도 괜찮아 나무', '혼자서도 씩씩해 나무', '홀로서기 나무'...... 내 맘대로 이름을 지어 보았다. 훨씬 낫지 않나요?



오름 입구마다 놓여 있는 기역자 울타리를 넘어 나무들이 서있는 오솔길을 지났다. 드디어 올라가는 계단이 나왔다. 쫄븐갑마장길과 연결되는 표지판이 같이 붙어 있다. 걷기를 며칠 쉬었는데도 허벅지가 아팠다. 종아리 알이 풀려서 괜찮을 줄 알았건만. 드문드문 앞서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계단 끝 오르막에서 길은 양 방향으로 갈라졌다. 정면에 한라산이 나타났다. 지금까지 봤던 한라산 풍경 중에서 제일로 크게 보였다. 갈색과 암녹색 굴곡까지 선명했다. 한라산 근처의 오름들 아래는 하얀 풍력발전기가 돌아갔다. 사람들은 감탄하며 사진을 찍어댔다. 저쪽 능선 안쪽에서 하얀 억새가 물결쳤다.


오른쪽이 정상으로 향하는 길. 일단 정상부터 밟아보자. 나는 모자 끈을 턱 밑에 바짝 조였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 모자가 날아갈 지경이었다. 붉은 돌탑과 붉은 흙을 지났다. 저 멀리 빨간 깃발이 꽂힌 평상이 정상이다. 능선 위의 키 작은 억새들은 바람의 방향대로 누웠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불룩 솟은 굼부리 한가운데로 난 길이 Y자로 갈라졌다가 아래에서 한 번 더 갈라졌다. 나는 저 갈림길들이 따라비 오름의 백미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여러 갈림길들과 능선을 전부 걸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행객들이 나 같지는 않았다. 억새의 계절에 오름의 여왕이라는 따라비 오름까지 와서 구석구석 돌아보지 않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정상에서 대충 경치만 감상하고 내려가는 것이다. 굽이굽이 능선을 따라 걷는 것이 귀찮은 듯했다. 자신의 몸 전체로 직접 즐기지 않고 그저 눈으로 구경만 하는 것. 전형적인 관광객의 자세였다. 나는 속으로 안타까웠다.



드디어 정상에 다다랐다. 먼저 온 부부가 쫄븐갑마장길로 빠지는 방향을 가리키며 길을 물었다. 나는 쫄븐갑마장길을 걸을 생각이 아니라면 그쪽으로 가지 말라고 했다. 입도한 지 두 달이 되었다는 중년 부부. 한달살이도 일 년 살이도 아니고 아예 이사를 왔단다.


그들에게 작지만 예쁜 동쪽의 오름들을 알려 주었다. 유명한 오름들이야 이미 잘 알고 있을 테니. 동거문이 오름, 높은 오름, 거슨새미 오름, 안돌 오름, 밧돌 오름, 아끈다랑쉬 오름, 돝오름, 아부 오름 등. 남편 분이 열심히 핸드폰에 받아 적었다. 그는 어떻게 이름을 다 기억하냐며 놀라워했다. 여러 번 가보기도 했고 이렇게 포스팅도 하니까요. 기록을 남기면 저절로 머릿속에 가슴속에 저장이 된답니다.



나는 부부와 헤어져 계속 걸었다. 오름을 오른쪽 가장자리로 도는 능선이었다. 정상에서 내리막길을 내려오니 왼쪽에 굼부리 안으로 들어가는 오솔길이 나타났다. 거길 지나칠 내가 아니지. 나는 길이 난 곳까지 들어갔다.



다시 오르막, 소나무 언덕에 벤치가 놓여 있다. 앞서 가던 사람들이 앉아서 간식을 먹고 있었다. 해가 들고 아늑했다. 쉬어가기에 딱 좋은 장소. 그러나 나는 멈추지 않고 소나무 앞에 깊이 파진 분화구를 내려다보았다.


안에는 하얗게 핀 억새가 가득했다. 왼쪽의 억새밭을 눈에 담으며 내리락 오르락 걸었다. 이 오르막 끝에도 벤치가 두 개 놓였다. 그러나 바람이 얼마나 세게 불던지 몸이 흔들렸다. 도저히 벤치에 앉을 수는 없겠네.


벤치 아래 누렇게 물든 밭들과 풍력발전기, 한라산이 같이 보였다. 언덕을 굽이굽이 도는 능선이 아름다워 사진을 많이 찍었다. 또 능선을 내려갈 시간. 드디어 가운데 Y자로 갈라진 길이었다. 조금 내려가자 거짓말처럼 바람이 멈추었다. 바람이 들어오지 못하는 신기한 방향이었다.



가장 큰 굼부리 앞에 섰다. 하얀 억새가 굼부리 안을 파도처럼 채웠다. 멀리서 봐도 가까이서 봐도 장관이었다. 바람은 다시 거세게 불었다. 이럴 수가,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있었다. 이 장대한 풍경 안으로 걸어갈 수가 있구나! 나는 서슴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바람에 억새가 춤을 추고 노래를 했다. 돌탑 몇 개 외엔 온통 억새 천지였다.


나는 눈앞의 억새 바다에서 유영하듯 사진을 찍었다. 하필 역광이라 아쉬웠다. 사진이 흐릿하고 뿌옇다. 눈으로 보는 것만큼 담아내질 못한다. 여긴 오후에 와야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억새밭을 찍을 수 있겠구나. 반대편 능선 위로 개미가 줄 서 지나가듯 사람들이 점점이 보였다.



단체객 중 한 명의 여인이 내게 말을 걸었다. "그쪽 안에서 사진 많이 찍으시던데요? 거기 좋나요?" "네, 여기 길이 있어요. 안까지 걸어가 보세요." 그녀는 내 말에 힘을 얻은 듯 발길을 돌렸다. 왜들 망설이실까요?? 오신 김에 최대한 걷고 오감으로 느끼셔야죠. 그녀를 따라 다른 몇 명이 억새밭으로 향했다.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신이 난 모습이었다.



나는 굼부리를 빠져나와 능선을 따라 올라갔다. 이제 전체를 다 돌았다. 굼부리 억새밭이 멀어졌다. 멀리서 하얀 꽃들이 춤추듯 나부꼈다. 바람이 심하게 불었지만 그래서 더 예뻤다. 흔들려야 진짜 억새 아닐까? 바람 없는 오름이란 상상할 수도 없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 잘 왔다.



나는 다시 다가서는 한라산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다. 손목의 스마트밴드엔 겨우 4500보. 그런데 배가 고팠다. 이상하게 오름에선 쉬이 배가 고파진다. 숲길보다 걸음수는 현저하게 적은데 신기했다. 부지런히 오르락내리락 걸어서일까. 나의 소화불량엔 숲길보다 오름이 즉효약이었다.


근처에서 따끈한 고기국수를 한 그릇 사 먹고 야무지게 에스프레소까지 마셨다. 개운하게 돌아가는 길, 여전히 바람은 차고 햇빛은 맑았다. 10월에 가을 오름을 여러 개 즐겼다. 11월엔 드디어 집으로 돌아간다. 그전에 하나 정도 더 갈 수 있을까? 


글쎄, 짐을 정리하기 시작하면 마음이 급해질 게 뻔하다. 한 가지 일에 매달리는 순간부터 그것에만 집중하는 스타일. 그런 사람이라 나도 장담을 못하겠네. 또 오름에 갈 여유와 여력이 있을지. 어쩌면 제주살이의 마지막일 수 있는 오름, 따라비. 마무리가 퍽 좋았으므로 되었다.  

이전 20화 제발 소문나지 않기를, 구좌읍의 맏형 높은오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