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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율 Oct 21. 2022

제발 소문나지 않기를, 구좌읍의 맏형 높은오름

이름 값을 하는 형님 오름

손지 오름에게 손절당하고 돌아서는 길. 문득 높은오름이 생각났다. 아까 손지 오름으로 가던 중에 높은오름 버스정류장을 지나쳤다. 구좌읍의 오름들을 찾아갈 때마다 여러 번 스쳤던 정류장이었다. 집으로 가긴 억울했다, 높은오름에 가자.


그동안 높은오름을 아껴두었다. 이름처럼 구좌읍에서 가장 높은 맏형 오름이다. 미리 알아본 바에 의하면 오르막 계단을 정상까지 올라가는 형태란다. 즉 너무 맑은 날은 너무 더울 것 같았다. 나는 그늘주의자라네. 그래서 구름이 적당히 낀 날에 가려고 했다. 나름 머리를 굴린 것이다. 그러나 제주살이가 어디 내 뜻대로만 되던가.



손절당한 아픔을 달래는데 햇빛쯤이야 감수해야지. 높은오름을 찾아가는 길은 쉬웠다. 버스정류장 표지판을 지나 구좌공설공원묘지까지 쭉 들어가면 된다. 묘지 앞 파란 지붕 가건물 옆에 차를 세웠다.


11시. 아직 오전이므로 오름을 오르기에 나쁘지 않은 시각이다. 이 묘지에 묻힌 분들은 자리 한 번 잘 잡았다. 밝은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명당인데다 경치도 예뻤다. 오름의 입구가 바로 보였다. 위로 숲 아래로 붉은 나무 계단이 쭉 이어져 있었다.


계단을 지나자 두툼한 야자수 매트가 깔렸다. 양옆에 노란색 밧줄이 난간에 매어져 있고 바닥에는 더 굵은 밧줄이 든든하게 받쳐주었다. 걸을 때 밧줄을 밟으면 미끄러지지 않았다. 계단과 매트 길이 번갈아 나타났다. 발바닥을 지지하는 노란 밧줄이 든든했다. 손지 오름에서 허탕친 기분이 풀리는 듯했다.


우려와 달리 오르막은 완만했고 그늘이 졌다. 바람이 찼다. 생각보다 오르는 길이 상쾌했다. 왼쪽에 편백나무숲인가? 잎이 납작하니 분명 삼나무는 아니었다. 그런데 편백나무 특유의 향기가 나질 않았다. 측백나무과인 것은 분명한데 정확한 나무 이름을 모르겠네.




고사리처럼 생긴 저것은 고사리인가 아닌가? 고사리라기엔 키가 엄청 크고 억셌다. 고사리가 저렇게 높이 자란 건 처음 보았다. 잎의 뒷면은 회백색이었다. 이 길엔 알쏭달쏭한 식물들이 살고 있었다. 신선한 말똥 더미도 발견했다. 오름에 갈 때마다 소똥과 말똥을 자주 보았다. 그런데 똥의 주인인 소와 말은 거의 본 적이 없었다. 맨날 길이 엇갈리는 이유는 뭘까. 하긴 외길 오르막에서 마주치면 난감하긴 하겠다.


길이 가파르지 않았음에도 나는 조금 힘들었다. 아까 손지 오름에서 기운을 빼서 그런 것 같았다. 신선한 혹은 마른 말똥은 곳곳마다 떨어져 있었다. 오르막이 끝난 중턱에 평지가 나왔다. 여기도 무덤이 있네. 아래쪽보다 이쪽이 완전 명당이었다. 마치 로맨스 영화의 한 장면처럼 햇빛이 쏟아지는 자리였다.




두 번째 오르막엔 곰솔이 우거졌다. 입구에서 나를 앞섰던 부부가 벌써 내려온다. 얼마나 빨리 걷는 거야? 아님 내가 너무 느린 건가? 계단 오른쪽에 탁 터진 곳으로 다랑쉬 오름과 아끈다랑쉬 오름이 보였다. 저기 손지 오름도 있네. 손지 뒤엔 용눈이 오름이 섰다. 멀리 흐릿하게 성산일출봉까지 보였다. 뒤돌아 정면에 있는 건 동거문이 오름일까.



올라가는 지점마다 보이는 오름이 달랐다. 즉 높다고 모든 오름이 잘 보이는 건 아니었다. 각 위치에서 볼 수 있는 오름이 따로 있었다. 왜냐면 길이 완벽한 직선이 아니기 때문이다. 길은 꺾어지고 또 나무나 숲이 시야를 가린다. 즉 변수가 조망을 좌지우지한다. 사람의 일생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달까. 올라갈수록 말똥도 많아졌다. 뒤돌아본 말똥 길이 참 예뻤다. '똥'과 '예쁨'이 동급인 건 오름에서만 가능한 일이 아닐까.


드디어 뻥 뚫린 새파란 하늘이 나타났다. 여기서부터는 마치 하늘로 오르는 길 같았다. 역시 이름값을 하는 높은오름. 정상에 서자 높이마다 달리 보였던 오름들이 한꺼번에 눈에 들어왔다. 최고점에 오르면 변수에 상관없이 모든 것이 파악되는 법인가 보다. 고수의 경지처럼.



경치가 구좌읍의 일등 오름다웠다. 밭을 경계 짓는 귀여운 방풍림과 초록색 밭들, 그 뒤를 단단하게 받치는 오름들. 오직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언제 보아도 사랑스럽다. 언제나 그리울 풍경이다.



가운데 움푹 파진 분화구는 생각보다 소박했다. 작고 낮아서 밑바닥까지 아주 잘 들여다 보였다. 와 이런 오름은 매우 드물다. 보통 안에 우거진 나무들 때문에 바닥은커녕 분화구 전체를 한눈에 담기도 힘들다. 분화구를 가운데 두고 둥그렇게 둘레길이 이어졌다. 나는 오른쪽으로 걸었다. 잠깐, 분화구 안으로 내려갈 수도 있겠는걸? 금세 내려갈 만큼 높이가 낮았다.


분화구 안쪽은 물론이고 둘레길엔 키 크고 억센 풀들이 없었다. 억새조차 없네. 아마 꽤 높아서일까? 죄다 바닥을 기듯 자란 낮은 풀들뿐이었다. 오른쪽 길은 분화구 바닥과 아주 가까웠다. 나는 자석에 끌리듯 안으로 걸어갔다. 감개무량했다! 10여 년 전 용눈이 오름 분화구 바닥을 밟은 이후 처음이었다. 오름에 갈 때마다 분화구를 볼 때마다 저 안에 내려가 보고 싶다고 속으로 외쳤다. 오늘 소원을 이뤘다.



바닥엔 검은 돌무더기가 몇 개 쌓여 있었다. 누군가 소망을 담아 돌탑을 만든 거겠지. 분화구 안을 천천히 걷다가 한가운데 섰다. 아무도 없이 나 혼자였다. 이 멋진 곳을 홀로 차지했다. 이런 호강이라니. 왠지 만세를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높은오름에 진작 와볼 걸 그랬다. 자주 여러 번 올 걸 그랬다.


나의 감상을 방해한 건 뜻밖에 말똥 냄새였다. 분화구 안엔 바람이 들지 않아 냄새가 지독했다. 높은오름 전체가 사실 말똥 밭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둘레길엔 바람이 심해서 냄새가 나지 않았던 게다. 오래 머물면 안 되겠다.


냄새 때문이냐고? 아니, 냄새쯤이야 참을 수 있었다. 혹시라도 발길에 분화구가 훼손될까 걱정스러웠다. 용눈이 오름도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결국 휴식년제를 할 만큼 엉망이 되지 않았던가.


살짝 내려와 감상하고 얼른 올라가자. 조금이라도 덜 밟아야지. 높은오름이 유명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토요일임에도 손에 꼽을 정도로 방문객이 적었다. 날씨가 기가 막힌 가을 날이거늘 사실 의아했다. 아하, 여긴 억새밭이 없기 때문인가. 가을 오름의 백미는 역시 억새밭이니까. 아니 홍해 같은 억새가 나부끼는 밧돌 오름에도 사람은 없었다. 그냥 소문나지 않아서인가 보다.



나는 나머지 둘레길을 돌았다. 말은 어디 가고 말똥만 가득했다. 똥을 밟지 않고는 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신선한 똥을 피해 가능하면 마른 똥을 밟았다. 발은 똥밭에 있지만 마음은 하늘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높은오름이 참으로 맘에 들었다. 억새가 없어도 상관없었다. 구좌읍의 크고 작은 오름과 바닷가의 풍력발전기, 심지어 성산일출봉까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정상 전망이 이토록 훌륭할 수가. 특별히 분화구 안을 걸을 수 있는 것도 크나큰 매력이다. 높이에 비해 올라가는 길이 편안하고 그늘이 지는 것도 내 취향. 이렇게 장점이 많은 오름은, 정말 정말 흔치 않아요.




실컷 감탄하고 실컷 걸었다. 돌아가는 길, 내려가는 계단의 선조차 멋있다. 중간중간 멈추어 눈에 새기듯 경치를 바라보았다. 바람 소리를 들으며 가는 길이 평화로웠다. 이런 게 가을 낭만이지. 오늘 오길 정말 잘했다. 손지 오름의 배신에 굴하지 않고 여길 들리길 정말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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