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이 소리 내어 말해 주었으면
마음은 몸 앞에 무릎을 꿇는다
오랫동안 벼르고 기대했던 필리핀 여행 중에 소화불량이 도졌다.
현재 10일째 한의원에 다니고 있다. 위도 그렇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아래쪽 장기들이 안 좋다고 한다. 아래 아궁이에서 불을 잘 때 줘야 위에 있는 밥솥이 끓을 텐데 지금은 아궁이에 거의 불이 꺼진 상태란다. 위의 기능은 비교적 빨리 돌아올 수 있지만 아래쪽 장기들이 좋아져야 근본적인 치료가 된다는 말씀. 얼굴의 기미로 보아 특히 자궁이 좋지 않단다. 헉, 이 기미는 19년 전 임신했을 때부터 생긴 건데 이미 증상이 오래되었다는 뜻이다. 자궁이 좋아지면 기미도 저절로 없어질 거라는데 그런 날이 올까?(주변에서는 피부과에 가보라고들 했다)
아마도 늘 이랬던 것 같다. 무언가를 하고 싶어 간절히 소망하고 노력하다가 결국 그걸 하게 된다. 다만 그러기 위한 몸의 한계치가 어디까지인지는 알 수 없다. 그저 해봐야 알 뿐. 유방암 수술과 여러 가지 치료 후에는 도대체 내 몸 상태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가끔 다른 환자들은 어찌 지내고 있을까 유방암 카페를 들여다 보기도 한다. 허나 사람마다 상황과 사정이 다르니 비교란 애당초 소용없는 일. 누구는 하루에 4시간씩 운동을 해도 멀쩡한 사람이 있고 누구는 한 시간만 운동을 해도 기진맥진이란다. 자기 몸을 잘 들여다보아야 하는 숙제가 어떤 환자에게나-아니 누구에게나- 주어진다. 난 아마도 그 숙제를 잘 해오진 못했나 보다. "참 잘했어요!" 도장을 받아야 하는데 "더 노력하세요" 도장을 받는 듯하다.
마음은 늘 긍정적이다, 혹은 지나치게 낙천적이거나. 환자임에도 불구하고, 아니 환자라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늘 하고 싶은 것들이 있었고 그걸 하면서 기쁨을 느꼈다. 머리카락이 중학생 녀석들 스포츠머리 정도로 자랐을 때부터 모자를 쓰고 책 쓰기 강좌를 다녔다. 우리의 여행이 잊히기 전에 글로 정리하고 싶었고 반드시 책을 내고 싶었다. 약 6개월 동안 강좌를 들으며 초고를 완성하는데 힘썼다. 당시 우리 기수 중에 초고를 완성해낸 사람은 나뿐이었다. 수십 군데의 출판사에 기획안을 돌렸고 몇 군데서 회신을 받았다. 정. 말. 운이 좋은 편이었다.
드디어 고대하던 첫 책이 출판되었다. <고등학교 대신 지구별 여행>! 출판하는 과정과 그 뒷얘기는 우리 여행만큼이나 파란만장이었다. 어떤 여행이든 좋았던 기억과 힘들었던 기억이 공존하듯 출판 역시 마찬가지였다. 첫 책이 나오자 자연스레 두 번째, 세 번째 책도 생각하게 되었다. 여러 가지 계획이 저. 절. 로. 세워졌고 그걸 향해 또 걸어갔다. 뒤늦은 마흔에 시작한 여행이 앞으로의 인생에 가장 큰 위안이자 도전이었다. '여러 가지 계획'은 모두 여행과 관련된 것들이다. 영어공부 역시 좀 더 여행을 즐기고자 필요한 수단이다.
사실 암을 앓은(혹은 앓고 있는) 환자는 일단 자기 몸을 위하는 일에 모든 힘을 쏟는다. 이제까지 해왔던 복잡한 일들은 모두 내려놓고 몸에 좋다는 음식을 찾아 먹고 몸에 좋다는 운동을 시작하고 자기 몸을 살리는 데 매진한다. 적어도 첫 몇 년은 대부분 그렇게들 한다. 그러다 슬슬 자기 본래의 습관대로 돌아가긴 하지만.
고백하자면 나는 별로 그러지를 않았다. 물론 병의 원인이었을 요인을 많이 치워버리긴 했다. 스트레스받지 않고 나를 기쁘게 할 일들에만 신경을 썼다. 이를테면 여행 같은. 내 발병의 원인이 음식이나 생활습관보다는 정신적인데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무슨무슨 버섯, 무슨무슨 약초들을 열심히 달여먹는 대신 책을 썼고 영어를 익혔고 혼자만의 여행을 다녀왔다.
그런데 너무 한쪽에만 치우쳤는지 몸을 관리하는 데는 소홀했던 것 같다. 수술한 지 만 3년이 넘었건만 아직도 내 체력의 한계가 어디인지 모르는 게 그 반증이다. '이 정도는 괜찮을 거야'라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나의 소망일 뿐일지도 모르는 생각, 어느 순간 또 무리하게 된다. 따지고 보면 별로 무리하는 건 없는데도 무리가 된다. 내 생각엔 무리가 아닌데, 그 당시엔 분명 무리가 아닌 거 같은데, 내 몸은 무리였다고 나중에 말해준다. 이렇게 탈이 나는 걸로.
위장과 다른 장기들이 좋지 않았던 것은 오래되었지만 어학연수 이후에도 푹 쉬지는 못했다. 이사날짜가 촉박했고 그래서 집을 보러 다녀야 했고 이사를 해야 했다. 이사를 준비하고 당일 종일 짐을 옮기고(아무리 이삿짐센터가 한다지만) 또 나중에 두고두고 정리하는 일까지 이사라는 게 보통 번거로운 일인가.
어학연수에서 빠꾸를 당하고 보니 다음 필리핀 여행이 걱정스럽기는 했다. 어학연수를 했던 따가이따이에 있을 때 예약한 여행이다. 이사 뒤에도 여행 일정을 줄일까 바꿀까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런데 두 달가량 열심히 운동을 하니 컨디션이 상당히 좋아졌다.(고 착각했나?ㅠㅠ) 내가 너무 나를 띄엄띄엄 본 게야.
따가이따이로 어학연수 10주를 갔을 때도 설마 2주나 빨리 돌아오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8주를 간신히 버티었다. 가기 전 몸상태는 좋은 편이었다(고 생각했다). 나름 체력 단련한다고 열심히 운동을 했고 소화도 잘 되었다. 매일 6시간씩 수업받고 두어 시간 자습하는 일이 그렇게 힘들지는 몰랐다.
처음부터 이렇게 말해 주었으면 얼마나 좋아.
"지금 이런 식의 생활은 몇 주 후에 체력 고갈을 불러올 것입니다.
지금은 괜찮지만 6주가 지나면 한계에 다다를 것이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우선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이 매우 힘들어질 것이며
(평소에 몸상태가 나빠지면 재발하는) 이석증이 올 수도 있습니다. "
이전에도 여행 중엔 잠을 잘 자지 못하는 편이라 이번 필리핀 여행에서도 어느 정도는 예상을 했다. 못 자는 날이 있으면 잘 자는 날도 있으니 보충하면 되겠지라고 매우 안일한 생각을 했다. 인간은 참 자기 편할 대로 상황을 인식한다. 그건 환자가 되기 전 얘기고 지금 상황은 또 다른 건데.
그래서 이렇게 말해 줄 수도 있었잖아.
"필리핀 여행 중 특히 숙면에 신경 쓰시기 바랍니다.
3일 이상 잠을 푹 자지 못했을 경우 엄청난 체력 저하와 피곤함을 느낄 것입니다.
그 상태가 1주일 정도 지속되면 소화력이 급격히 떨어질 예정입니다.
또한 추운 지역에서 난방이 되지 않는 잠자리 역시 체온저하와 심각한 소화불량을 불러올 것입니다."
내 몸이 소리 내어 그렇게 말해주지 않아도 그걸 알아차릴 수 있어야 했겠지. 한창 항암치료받을 때 앞으로는 반드시 내 몸이 내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듣겠다고 결심했건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내 몸을 돌보는데 미숙하다. 여행이, 영어가, 두 번째 책이,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들이 아무리 중요한들 내 몸만 하겠냐만 자꾸 그걸 까먹는다. 마음은 지독히도 머리가 나쁘다. 이렇게 호되게 당하고 나서야 마음은 다시 몸 앞에 무릎을 꿇는다. 아주 낮아지고 겸손해진 모양새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