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이 제 꼬리를 물고 도는 것처럼
그 무엇도 건강보다 앞설 수는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건강이니까요. 지금껏 잠을 못 자서 약을 먹는데, 더 잠을 못 자 건강을 해치면 안 되는 거죠. 아무리 하고 싶은 것이라도 건강보다 앞설 수는 없잖아요. 일단은 약을 조금 늘려 드릴게요. 그리고 좀 지켜봅시다. 그걸 계속해야 할지 말지, 때가 되면 스스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거예요.”
오늘은 병원 진료가 있는 날이다. 기본 세 가지 일을 처리해야 해서 매우 바쁘다. 먼저 정신건강의학과 가서 진료받고 잠자는 약(수면제는 아니고 수면을 유도하는 진정제 종류)을 타 와야 한다. 그다음 유방센터에서 졸라덱스(항호르몬제 주사)와 놀바덱스(항호르몬제 알약) 3개월 치 처방받고 주사실로 올라가 졸라덱스를 맞는다. 사이사이 수납 필수. 오늘은 두 가지 일이 더 있었다. 어찌어찌한 이유로 10월에 있을 정기검사를 변경해야 한단다. 그걸 처리하고 다시 유방센터로 돌아가 변경된 날짜를 알려준다. 여기까지. 모두 한 시간 반이 걸렸다.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러 가다가 아차, 깜빡. 잠자는 약을 안 받아왔네. 하도 여러 가지 일이어서 까먹었다.
버스 안에서 의사의 말이 머리를 맴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건강, 아무리 하고 싶은 일이어도. 너무도 평범하고 당연한 말인데 오늘따라 가슴을 쿵 울린다. 영어학원을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수면 리듬이 엉망이 되었다. 결국 약을 늘리고야 말았다. 호르몬 치료 때문에 안 그래도 불면증이다. 그래서 약을 먹어야 제대로 잔다.
그러나 학원 수강이 약마저 소용없게 만들고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만원 버스와 지하철을 타는 것. 두 시간 반에 걸친 학원 수업. 돌아와서 복습 세 시간쯤. 여행에서 돌아온 뒤부터 꼭 하고 싶었던 일이었다. 수업은 상당히 재밌다. 반면에 복습 스트레스를 약간 받는다. 아니 약간이 아닌가? 그러니까 잠을 못 자는 것이겠지. 즐겁고 너무나 하고 싶은 영어인데 그만큼 강박이 있나 보다. 7시 반에 나가는 것부터 무리이긴 하다.
가로수들은 연녹색, 진녹색이 겹쳐 바람에 흔들거린다. 버스에서 바라보는 흔한 풍경이 오늘따라 왜 이리 마음에 닿을까. 이런 평범함. 평범한 거리. 버스에 앉아있는 것. 다시 갈아타려고 걷는 것. 기다리는 것. 그런 순간 하나하나가 클로즈업되어 다가왔다. 이 모든 일상이 어느 한순간 스러져 버릴 수도 있는데. 이미 한 번 겪어보지 않았나. 일상이 송두리째 흩어지는 경험을. 거기에서 다시 새로운 시작을 만들어내었던 것을. 그것도 소중한 삶이었지만 같은 걸 또 겪고 싶지는 않다.
나는 요즘 너무 열심히 살고 있다. 하고 싶은 일을 건강보다 앞세울 정도로. 자꾸 잊는다. 균형을 잡아가며 살아야 하는 걸. 우주의 먼지로 돌아가는 날까지 양팔을 벌리고 외나무다리를 건너야 하는 걸. 기우뚱기우뚱 개울에 빠지지 않도록 중심을 잡고서 말이다. 내년 봄엔 꼭 여행 가고 싶고, 그래서 그때까지 아주 열심히 영어 연습을 하고 싶고, 그런 소망 혹은 욕심이 불면증을 되불러 온다.
약 없이 온전히 잠도 못 자면서 하고 싶은 일은 왜 그리 많을까? 버킷리스트에 적어 놓은 많은 일들을 왜 그리 해보고 싶을까? 뱀이 제 꼬리를 먹는 셈이다. 언제 안녕 하고 떠날지 모르는 삶이니까 다 해보고 싶다고. 그러다가 더 빨리 떠날 수도 있는 것을. 뱀은 제 꼬리를 물고 돌고 돈다. 아무리 물어봐야 니 꼬리를 정말로 먹을 수는 없잖아.
주책스럽게 버스에 앉아서 갑자기 눈물이 핑 돈다. 그동안 환자임을 잊고 살았구나. 아니 잊지는 않았는데 해보고 싶은 일에 밀려 거의 잊을 뻔했다. 아홉심히만 살기로 했거늘, 열심히 말고. 욕심을 내려놓고 발걸음을 좀 더 천천히. 천천히 걸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