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된 시공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시작한 책 육아
2020년 2월, 예기치 않은 바이러스의 습격으로 모두가 허둥대던 시절, 첫째 아이를 출산했다.
‘코로나19’라는 정식 명칭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감염 경로나 대응 방법 등 모든 것이 불확실해 늘 불안감에 시달리던 그해, 전례 없던 전 국민의 고립 생활이 시작되었다.
출산 직후 젖몸살로 39도를 넘긴 어느 새벽, 타이레놀 한 알 달라는 말도 못 하고 조리원 방문 뒤에서 혼자 끙끙 앓았더랬다, 혹여라도 확진자로 의심받아 퇴소라도 당할까 봐. 그런데 남편은 어디 가고 혼자 앓았냐고? 회사로 출퇴근하는 남편들은 바이러스 확산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조리원에 들어올 수 없었기에 예정에 없던 생이별을 한 터였다.
마스크를 착용할 수 없는 아기, 그리고 그 아기와 한 몸인 엄마가 갈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영유아를 대상으로 한 문화센터 수업은 줄줄이 폐강되었고, 아이와 시간을 보낼 만한 실내 놀이시설은 기약 없는 휴업에 들어갔다. 한편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는 넘쳐나는 힘을 주체하지 못했다. 아담했던 신혼집의 거실은 돌쟁이 아가의 체력을 소진시키기에는 턱없이 좁았기에 폭발적으로 늘어가는 확진자 속에서도 아이와의 산책을 게을리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산책 가는 길이 험난했던 이유는 바로 마스크에 있었으니. 모자도 쓰기 싫어서 도망 다니는 아이에게 무려 마스크를 씌워야 하는데, 마스크를 곱게 써 줄 리가 없는 돌쟁이 아가와 전쟁을 치르고 나면 집을 나서기도 전부터 진땀이 줄줄 흘렀다. ‘쪽쪽이를 문 입 위에 마스크를 씌우면 수월하더라’, ‘이 회사 마스크는 아이가 잡아당겨도 덜 찢어지더라’ 하는 후기에 기대어 마스크 무사히 씌우기 작전을 수행하던, 참으로 수상한 시절이었다.
그러니 우리에게 가장 안전한 곳은 집일 수밖에.
마스크로 얼굴의 절반을 가린 요상한 여자가 아닌, 언제든지 아기의 볼에 살 부비며 입 맞출 수 있는 엄마가 되려면 집에 머물러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엄마이기 전에 사람이었다는 것.
하필 나에게도 마음이라는 게 있어서는, 집에 아이와 덩그러니 놓여 있는 시간이 왜 그리도 괴롭던지. 저 문을 열고 나가면 감염의 위협부터 이 시국에 어린아이를 데리고 온 엄마에게 던지는 우려 섞인 눈빛까지, 내가 감당해야 할 것이 너무나도 많을 걸 알면서도 왜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 그렇게 마시고 싶었는지. 하지만 사회적 거리 두기가 영유아 가정보육을 만나면 사람이 어디까지 고립될 수 있으며 그 끝이 어디인지, 끝이 나기는 할지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아이와 함께하는 동안 나는 내가 잘하면서도 좋아하는 일을 해야 했다. 그래야 견딜 수 있는 시절이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지속할 수 있는 일, 적어도 마음이 괴로워지지는 않는 그 일을 해야만 했다. 당시만 해도 나는 요리를 정말 싫어했다(지금은 아이가 둘이라 물러설 곳이 없다). 아이가 유아식 단계에 접어들어 국과 반찬 등으로 식판을 채워야 하는 시기가 왔을 때 도망치고 싶은 마음에 울어버린 적도 있었다. 집에 눌러앉은 것도 억울한데 자신도 없고 재미는 더 없는 요리를 하라니, 도무지 흥이 나지 않았다.
시금치를 다듬고 소고기 안심을 다지는 것보다 재미난 일은 말랑한 아이의 볼에 내 볼을 맞대고 책을 읽는 일이었다. 책에 토끼가 나오면 제 손으로 토끼 귀를 만들어 쫑긋거리는 토끼 흉내를 내는 아이를 보는 순간이 좋았다. 동물들이 인사하는 장면을 볼 때마다 진지한 표정으로 허리를 굽혀 가며 인사하는 아이를 보면서 웃음을 참고 같이 허리 숙여 인사해 주는 순간이 좋았다. 책장 앞에 주저앉아 혼자 보드북을 넘기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몇 번이고 몰래 웃을 수 있어 좋았다.
아이는 내가 책을 읽어줄 때 자주 웃었다.
그런데 아이와 책을 읽을 때 더 크게 웃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나였다.
그렇게 우리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가장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공간, 우리의 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