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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아지트 Jan 13. 2024

서른 즈음에...

   

올해 중순 서른이 되는 딸이 사귀던 남자친구와 결혼을 허락 받으러왔다. 사람을 많이 만나는 직업을 가진 우리부부는 어느 정도 ‘사람 볼 줄 아는’ 능력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우리 두사람 모두 그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가 가늠이 되질 않았다. 게다가 잘 안다고 생각했던 딸조차 낯설어보였다.  딸이 왜 그를 결혼하고 싶을 만큼 좋아하는지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딸의 남자친구를 보고 나서부터 몸살이 시작되었다. 온 몸에 바늘을 꼽고 있는 듯한 고통과 무기력함을 느낀다. 진통제로도 듣지 않는 걸보니 심인성 신체화 증상이 분명했다. 신체화는 주로 딸이 사용하는 방어기제인데 이번에는 내가 고스란히 몸으로 을 말하고 있었다.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나도 잘 모르겠고 그에 대해 섣부른 표현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딸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어주고 싶은데 나도 길이 보이질않았다. 그 불안을 고스란히 몸으로 앓게 되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하지 못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를 ‘확장된 자기’로 여길 수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하여 함부로 ‘별로다’ ‘마음에 안든다’라고 표현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네 마음가는대로 해’라고 하기엔 너무나 중요한 결정이어서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그 불안과 갈등을 몸으로 말한다. 내가 아프지 않으려면 ‘결혼하기엔 잘 어울리지 않아’라는 그 말을 해야 한다.      


무엇이 마음에 안 드느냐고 물으면 딱히 ‘너무나’ 싫은 한가지는 없다. 그저 왠지 ‘이건 아닌거 같다...’싶은 마음인거다. 이 결혼을 하면 딸이 힘들고 외로울 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이 든다. 그런데 그 말은 딸에게 먹힐 이야기가 아님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차라리 입을 닫는다.      


세상에 멋진 남자가 참 많아 보이는데...’      


딸의 결혼에 대해 고민을 하면서도 한편, 연애하다 결혼하는 사람들이 새삼스레 대단해보인다.  더 나은 남자가 나타날지 모르는데, 어떻게 이 남자가 자기 배우자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완벽한 선택이라는 게 없다고는 하지만, 결혼이라는 중요한 결정 앞에서 ‘이 남자야!’라고 확신을 갖는다는 것이 참 대단해 보이기도 했다.


나는 평생 엄마의 결혼 강요에 대해 원망했었다. 나는 내가 원하는 남편상을 그려보기도 전에 이미 유부녀가 되어있었다는 것에 대해 아쉬움이 많았었다. 그런데 딸을 보면서, ‘중매결혼이라는 방법이 아니면 절대 결혼할 상대를 결정할 수 없을 사람이었다는 것을 엄마는 이미 알고 있었나보다...’싶어,  난생 처음으로 엄마의 '강요'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서른 즈음딸은 어떤 마음일까


어쩌면 29살이라는 숫자가 무거웠던 것일까? 요즘은 다들 늦게 결혼한다고 해서 나는 딸이 결혼에 대해 느긋할 거라고 믿고 있었다. 딸은 자기의 삶을 실컷 누려보고 결혼했으면 바랬었다. 자기 직업도 있고 직장에서 주는 사택도 있고, 부모 소속도 아니고 남편 소속도 아닌, 자유로운 ‘나’로 살아볼 수 있다는 것이 부럽기도 했다.      


나의 29은 어땠었지? 그때 나는 이미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는데도 서른이 온다는 것이 무척 두렵고 슬펐었다. 20대가 끝난다는 것은 마치 여성으로의 아름다움이 곧 사라질 것 같은 두려움...인생에서 어른이 되어야하는 무거움...이었던 것 같다. 10대는 사춘기라 방황해도 되고, 20대는 청춘이라 자유로와도 되고, 30대부터는 왠지 인생에 책임을 져야하는 무거운 나이로 느껴지기도 했으리라.      


딸은 어쩌면 더 이상 서툴면 안될 것 같은 30대를 누군가와 손잡고 시작하고 싶은 마음일지 모르겠다. 아무리 세월이 바뀌었다 해도, 서른이라는 나이는 마음이 복잡해지는 나이인가보다...그 복잡한 마음을 엄마에게 대신 해결해달라고 던진 것일 수도 있겠다. 내가 딸을 대신해서 그 복잡한 마음을 온 몸으로 앓고 있는 것이라면 여기서 멈춰서야 한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이제 너의 마음은 네가 스스로 이해하고 조절하고 해결할 수 있단다. 그게 서른이고 그게 어른이란다...’     


딸에게 직접 전할수없을지라도 엄마인 나부터, 언제까지나 아이의 것을 대신 해줄수없음을  다짐해야한다. 딸의 미래에 대한 불안은 내가 고민해야할 문제이기보다, 딸이 현실적으로 고민해봐야할 문제여야 한다. 딸의 인생과 엄마의 인생을 분리해야 할 때이다.


아직 어리다고만느끼는 것은 딸을 분리시키고 싶지않은 엄마의 분리불안일지 모른다. 그 마음이 딸을 붙잡고 있는 한, 그녀는 심리적 독립을 할 수가 없다.


버진 로드를 끝에서 사위에게 딸의 손을 넘겨주는 아버지의 심정은 아쉬울 것이다. 하지만 건강한 분리에 대한 선언이기도 하다. "가서 너의 삶을 살아라~부모는 부모의 삶을 살테니..."라는 독립선언인게다.


'육아의 끝은 독립'


오은영박사의 말씀에 비추면 나는 아직도 육아를 자처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물리적으로는 대학때 독립되었고 경제적으로는 3년전에 독립되었지만, 딸의 결혼선언이 이토록 불안한 것은 정서적 분리가 덜되어 있었다는 증거일수 있다.  결혼시키기 전에 건강한 정서적 분리과정을 잘해내는 것이 먼저여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훌훌 가볍게 자기의 삶을 살아낼 수 있다. 그러려면 떠나가는 딸이 뒤돌아보지않게 부모도 행복하게 살아줘야 한다. "우리 걱정말고 너나 잘 살아!"하며 쿨하게 보내줄수 있어야 한다.


딸의 서른 즈음에, 여전히 24살에 멈춰있는 내 마음의 한 부분도 '또 한살' 자라나는 것 같다.


29살물흘리며 듣고 또 듣던 이 노래가, 새삼스레 가슴을 두드린다.


'점점 더 멀어져간다...머물러있는 청춘인줄 알았는데...비어가는 내 가슴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내가 떠나 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 김광석 <서른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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