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감정평가사의 변명
부동산 시세 추정 웹서비스 "랜드바이저(Landvisor)"는 2021년 7월에 론칭해 만 1년이 되었다. 회원제로 운영되는 유료 서비스이며, 현재 회원수는 약 3,400명, MAU(Monthly Active Users)는 약 3,600건 수준이다. 아직 충분한 인지도를 확보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다행히 신규 회원가입수나 유료 전환율 등은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다.
랜드바이저 외에도 자동평가모형(Automated Valuation Model) 기반 부동산 시세 추정 웹서비스는 너무나 많다. 랜드바이저와 기존 서비스의 차이점은 감정평가법인이 직접 기획, 개발,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비스를 기획 운영한 과거 4년 동안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도 "자동평가모형이 감정평가를 대체할 수 있지 않을까요?"였다. 그것은 호기심이나 우려일 때도 있었지만, 때로는 날 선 비난이나 공격이기도 했다.
그래서 랜드바이저는 그동안 기획 개발한 서비스 중에서 현재의 비즈니스 환경에서 허용 가능한 일부 콘텐츠만 제한적으로 제공하고 있다. 일례로 시세 추정의 결과를 보고서(report) 형식으로는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한국감정평가사협회에서 정식 감정평가서 외에는 문서 형태의 서비스를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비스 기획자로서 아쉬움이나 답답함이 없을 수 없지만, 우선 서비스 본연의 기술적 가치를 지키면서 비즈니스 환경의 변화를 기다리고 있다.
랜드바이저를 기획한 'Pacific Data Lab.'은 2019년 태평양감정평가법인의 R&D 부서로 출발했으며, 최초 구성원은 감정평가사 1명, IT 개발자 2명(현재는 4명)이었다. 현재도 대부분의 감정평가법인은 2명 내외의 IT 개발자만을 보유하고 있으며, 사실상 자체적인 데이터베이스나 소프트웨어 구축 역량이 거의 없다. 물론, 감정평가법인이 감정평가를 위한 소프트웨어를 자체 개발한 사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다수의 감정평가법인들은 위탁개발에 의존한다. 시장분석, 감정평가서 작성, 그리고 수임 영업이 주 업무인 감정평가사가 직접 IT 개발자와 함께 상시적인 R&D 부서를 운영하는 것이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1) 감정평가 업무 지원 시스템(PAAS, Pacific Appraisal Assistance System)
가장 먼저 착수한 프로젝트는 감정평가 업무 지원 시스템(PAAS, Pacific Appraisal Assistance System)의 구축이었다. 대부분의 전문직 조직과 마찬가지로, 감정평가법인 역시 업무의 수임 및 처리 주체가 기업이 아닌 개인이다. 기업적 차원으로 누적되지 않고 각 개인에게 분산되어 있는 업무 경험은 일회적일 수밖에 없고, 낮은 업무 효율성에 대한 고민 자체를 불필요하게 만든다. 반복되지 않으니 측정할 수 없고, 측정할 수 없으니 관리할 수 없는 것이다. PAAS는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해, 태평양감정평가법인 내 200여 명의 감정평가사와 150여 명의 현장조사직원의 개별적 업무 과정을 전산화(Digital Transformation) 하기 위한 시스템으로 기획되었다.
전산화는 업무 속도를 향상할 뿐만 아니라, 별도의 추가 작업 없이도 개인의 업무 결과를 데이터베이스에 누적할 수 있는 훌륭한 도구다. 다만, 전산화를 하기 위해서는 '표준화'가 전제되어야 한다. 감정평가 업무의 대상인 부동산은 일률적인 규격이 존재하지 않는 비표준 재화이며, 실무 현장에는 쉽게 표준화하기 어려운 다양한 변수들이 많다. 예를 들어 임대정보의 경우, 기본적으로 부동산 매매계약과 임대계약의 단위가 일치하지 않는다. 복합부동산 1개의 일부를 임대하거나 구분건물 2개 호를 일괄로 임대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고, 개별 임대차 계약의 관리비, 부가세의 포함 여부, 특약사항 등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실무 현장의 변수를 수용할 수 있는 입력폼의 개발이 필수적이었다. 우선 본지사 전체의 다양한 감정평가서 양식을 수집해 분석한 후, 토론과 협의를 통해 입력과 출력양식을 통일했다. IT 개발자들이 양식을 코딩하면, 이를 테스트하고 매뉴얼로 구축하고, 프로그램의 배포와 교육, 의견수렴이 뒤따랐다. 감정평가 대상에 따라(복합부동산, 집합부동산, 기계기구), 감정평가 목적에 따라(담보평가, 일반거래평가, 재무보고평가) 종과 횡으로 반복되어야 하는 장기 프로젝트였다. PAAS는 1년 6개월의 개발기간을 거쳐 2021년 1월부터 태평양감정평가법인 본지사에 도입되었다.
2) 부동산 데이터의 정제와 구축(Database)
두 번째 프로젝트는 부동산 데이터베이스의 구축이었다. 감정평가업무를 위해 수집하는 정보는 평가대상 물건에 국한되었기 때문에, 좀 더 광역적이고 전국적인 데이터가 필요했다.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시스템(http://rt.molit.go.kr/)에서 공개되는 매매, 임대 데이터를 활용해야 하지만, 복합부동산의 경우 지번 정보가, 집합부동산의 경우 호 정보가 공개되지 않아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국가자격사인 감정평가사의 권한으로 한국부동산원이 관리하는 실거래가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해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하지만, 이 역시 데이터를 대량으로 다운로드하거나 감정평가업무 외의 목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실거래가 데이터와 위치 정보를 결합하는 것이 선결과제였는데, 2016년 도입된 공공데이터포털의 부동산 정보를 활용했다. 전국의 부동산을 탐색 대상으로 하되, 실거래가 데이터에서 공개된 정보를 기준으로 탐색범위를 좁혀나가 위치정보를 매칭하는 알고리즘을 개발했다. 알고리즘에 의한 매칭비율은 전체 데이터의 60~70% 수준인데, 매칭하지 못한 30%는 거래계약이 취소된 경우, 지분으로 거래된 경우, 복수의 부동산이 동시에 거래된 경우, 거래 전후 토지가 분할되거나 합병된 경우 등 다양한 사유가 있었다. 그 외에도 거래당사자의 신고자료가 잘못되거나 누락된 경우, 공공데이터의 자료가 작성규칙에서 벗어나는 경우 등 불가항력적인 사유도 발견됐다. 해당 기술은 2020년 11월 특허 출원했으며, 향후 매칭비율을 높일 수 있는 보다 정밀한 알고리즘을 설계하는 것이 숙제로 남아 있다. 실거래가 데이터 정제 기술과 PAAS를 병용해, 태평양감정평가법인의 데이터베이스는 주간으로 업데이트되고 있으며, 현재까지 450만 건의 매매사례와 120만 건의 임대사례를 누적하여 감정평가 및 컨설팅 업무에 활용하고 있다.
3) 부동산 자동평가모형(P-AVM, Pacific Automated Valuation Model)
세 번째 프로젝트는 부동산 자동평가모형(P-AVM, Pacific Automated Valuation Model)의 개발이었다. 프로젝트에 착수한 2020년에는 이미 다양한 자동평가모형 웹서비스가 출시되어 있었지만, 지역적 커버리지가 대도시에 국한되거나, 용도별 커버리지가 공동주택이나 단독주택 같은 주거용 부동산에 국한되어 있었다. 부동산 거래 현황을 살펴보면, 절대 다수의 데이터가 대도시 주거용 부동산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대도시 상업업무용 부동산, 비도시 공업용, 농업용 부동산에 대한 자동평가모형의 개발이 어렵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부동산 자동평가모형은 부동산 가치평가(valuation) 과정을 체계화 및 자동화한 것이고, 체계화는 곧 부동산 거래 데이터의 규칙성을 의미한다. 물론, 데이터의 규칙성이 데이터의 양에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 데이터의 양이 부족하다면 데이터의 규칙성을 발견하기 어려운 것은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감정평가법인은 충분한 장점과 잠재력을 보유한 조직이다. 감정평가법인의 업무에서 대도시 공동주택의 감정평가가 차지하는 비중은 10% 미만에 불과한데, 대도시 공동주택의 가격은 압도적인 거래량과 정보량에 의해 자체적인 선형성을 갖고 있어 'KB 아파트 시세'처럼 감정평가를 대체할 수단이 많기 때문이다. 감정평가법인의 업무는 대부분 가격 접근이 어려운 대도시 상업업무용 부동산, 비도시 공업용, 농업용 부동산에서 발생하고 있으며, 현장조사가 법적 의무사항인 업무 특성상 대상 부동산의 비계량적 가격형성요인에 대한 파악이 용이하다. 실거래가가 희소한 부동산일수록, 감정평가 업계가 수공업(manufacturing)으로 생산하는 연간 60만 건의 감정평가정보의 정보가치가 높아지는 것이다.
P-AVM은 부동산 시장을 최대한 세분화(market segmentation)해 지역별, 물건별 알고리즘 세트를 구성했다. 모형 역시 실제 감정평가 과정과 동일하게 지역범위의 설정, 비교사례의 선정, 비교기준의 적용, 이상치 제어의 순서로 구축했다. 그리고 모형에 의한 추정치와 실제 감정평가 결과를 일간 비교하여, 백테스트(back-testing)와 보완을 반복했다. P-AVM은 1년의 개발기간을 거쳐 2020년 3월부터 감정평가 업무에 활용하고 있다.
4) P-AVM 기반 웹서비스 '랜드바이저'
네 번째 프로젝트는 P-AVM 기반 웹서비스 랜드바이저의 개발이었다. 감정평가법인을 식당에 비유하자면, AVM은 내부적으로 활용될 때에는 '레시피(recipe)' 일 수 있으나, 외부적으로 활용되면 '밀키트(meal-kit)'가 된다. 전통식당이 밀키트를 출시할 때도, 밀키트로 인해 음식 맛을 비롯해 식당의 명성에 흠이 생기지는 않을지, 밀키트 매출 대비 식당 매출이 더 줄어드는 건 아닐지, 많은 고뇌가 있었을 것이다. 태평양감정평가법인 역시 조직 내부와 업계에서 우려와 비난을 받으며 내홍을 치러야 했고, 현재에도 비즈니스 환경이 우호적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랜드바이저 서비스의 정체성은 새로운 방식의 감정평가 업무 보조장치이다. 밀키트가 식당에서 직접 먹는 음식에 비해 맛있을 수 없듯이, AVM에 의한 추정치가 현장조사 결과와 비계량 비선형적 가격형성요인에 대한 전문가의 판단과 책임이 반영된 정식 감정평가만큼 정확할 수 없다. 다만, 밀키트가 식당에 직접 갈 수 없는 상황에서 저렴하게 그 식당의 음식을 즐길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듯이, 자동평가모형 역시 감정평가를 의뢰하기 전이나 감정평가를 할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 부동산 시세정보를 얻을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랜드바이저는 감정평가와 같은 유료 서비스이지만, 감정평가보다 훨씬 저렴하고 신속하기 때문이다.
실제 서비스 론칭 이후 유료로 전환한 회원의 약 40%는 개인투자자였고, 다음으로 약 30%가 시행사와 공인중개사였다. 금융기관과 공식적인 업무계약을 추진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상대적으로 비우량 물건을 취급하는 금융권의 종사자들의 개별적 수요도 있었다. 랜드바이저는 기존의 감정평가 시장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시장의 서비스 공급방식으로는 매칭할 수 없었던 수요자를 새로운 공급 방식으로 매칭해 낸 것이다.
감정평가 산업은 기술혁신에 성공할 수 있을까
프롭테크(proptech)는 부동산(property)과 정보기술(information technology)의 합성어인 만큼, 프롭테크 산업 역시 부동산 산업과 정보기술 산업의 결합을 의미한다. 산업 간 결합이 결코 순탄한 과정이 아니다. 결합된 상태에 이르는 과정이 본질적으로 경쟁과 재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프롭테크를 말할 때 부동산 기업이 아닌 IT기업을 우선 떠올리는 이유 역시, 작금의 산업 간 경쟁이 IT기업에 의한 '도전'과 기존 부동산 기업의 '응전'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경쟁의 결과에 따라, 프롭테크는 기존 부동산 산업이 정보기술을 수용한 결과가 될 수도, 아니면 정보기술 산업이 부동산 산업을 새롭게 재편한 결과가 될 수도 있다. 전자라면 부동산 산업은 IT산업의 고객사가 될 것이지만, 후자라면 부동산 산업과 IT산업은 경쟁사가 될 것이다. 전자가 산업 간 경계가 유지된 상태의 '결합'이라면, 후자는 더 이상 부동산 기업과 IT 기업을 구분하기 어려운 '융합', 즉 전면적 경쟁을 의미한다.
기술혁신의 전제조건은 인적 자원이다. IT 개발자가 부동산 기업으로 이직하거나, 반대로 부동산 기업에 IT 개발자가 이직하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인적 자원의 취득이야말로 기업의 대표적인 투자활동으로, 이는 곧 자본 경쟁을 의미한다. 산업 간 경쟁에서 기업의 규모가 중요한 이유이다.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Joseph Alois Schumpeter)는 기술혁신에 있어 기업의 규모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기술개발에는 충분한 인적, 물적 자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감정평가 산업의 기술혁신 조건은 양호한 편에 속한다. 2022년 현재 약 4,500명의 감정평가사 중 83%에 해당하는 3,700여 명의 감정평가사가 사무소가 아닌 법인에 소속되어 있으며, 이 중 2,500여 명은 연 매출액 600억 원 이상인 대형 감정평가법인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들 대형 감정평가법인은 전국에 15개 이상의 지사를 보유하고 있고, 200여 명의 감정평가사를 포함해 400~500명의 규모를 갖고 있다. 중개 산업의 사업체당 종사자 수가 2명 미만인 점과 비교하면, 충분히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감정평가 업계의 전략과 계획, 현명한 의사결정과 적극적인 투자가 필요한 시점이다. IT 산업이 부동산 비즈니스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 노력하듯, 전통적 부동산 산업 역시 테크를 활용해 산업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 테크는 IT 산업의 전유물이 아니며, 모든 산업에 필요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감정평가 업계가 기술혁신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던 조직적, 업무적 특성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랜드바이저 사례와 같이 개별 기업이 도전할 수 있는 혁신의 영역은 분명히 존재한다. 감정평가 업계가 인적 혁신과 기술 혁신을 통해 프롭테크로 나아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끝>
※ 한국주택학회 프롭테크빅데이터연구소 계간지 <Propbigs>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