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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정수 Feb 11. 2020

<기생충> 1면 '오픈북' 테스트

같은 재료, 같은 시간, 다른 결과

"편집, 그중에서도 1면 편집은 오픈북 테스트 같다"는 말을 들었다. 특히나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면 더더욱 그런데,

바로 오늘 같은 날이 여기에 딱 맞는 날이다.


1. 너무 큰 이슈가 있는 날

이를테면 영화 기생충이 오스카 4관왕을 이룬 날. 일단 톱은 무조건 정해놓고 가는 날이다. 평소 같으면 눈에 띄는 단독을 아낌없이 처바른(?) 타지 1면을 보면 "저기는 기사가 좋으니 저걸로 먹고 들어가는 거지!" 하지만, 오늘 같은 날은 그런 기사들이 존재감이 없다.


2. 그 이슈가 문화/스포츠 분야인 날

정치, 사회, 경제, 국제뉴스라면 각 매체의 성향에 헤드라인이 크게 좌우된다. 편집자들도 그 '방향성'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하지만 문화나 스포츠뉴스일 경우 정무적인 판단에서는 웬만하면 해방된다. 정확한 팩트가 핵심인 스트레이트 기사들과 달리, 비유나 문장부호 등도 자유롭게 쓸 수 있다. 물론 사진도 훨씬 다양한 구도, 다양한 표정, 다양한 인물과 초점 중에 고를 수 있다. 한마디로, '편집의 묘'를 살리기에 훨씬 적합하다.


3. 모두에게 주어진 시간이 비슷한 날

어떤 신문은 제작 마감시간이 사실상 초저녁이고, 어떤 매체는 다음날 새벽이다. 밤중에 이슈가 터지면 전자는 시간에 쫓겨 정말 급한 대로 대충 신문을 말아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를테면 오스카 시상식은 점심시간에 끝났다. 이 정도 시간이면 모든 매체가 거의 비슷하게 고민할 시간을 확보한 셈이다. (그리고 이럴 땐 오히려 장고 끝에 악수를 두는 곳들도 있다.)


어제 같은 날엔 모두가 봉준호, 오스카, 기생충이라는 똑같은 재료를 놓고 머리싸움을 다. TV 하루 종일 기생충으로 도배된데다 인터넷에도 내외신을 가리지 않고 각종 레퍼런스가 쏟아지니 진정한 의미의 오픈북 테스트라고 할 수 있다. 결과는 다음날 아침에 동시에 나온다.




1면을 도배한 사진

제인 폰다에게 작품상 트로피를 받으며 환호하는 봉준호 감독 / AP=연합뉴스

종합일간지 8개는 물론이고, 모든 조간신문을 봤을 때 압도적인 1면 사진은 바로 이 장면이었다.


너무나 당연한 결과다. 4가지 상 중 가장 큰 영예의 상인 작품상을 받는 장면이거니와, 주연배우들의 얼굴도 함께 나와있다. 상을 '들고 있는' 정적인 모습이 아니라 '한 사람은 건네주고' '한 사람은 받으려 하고' '한 사람은 팔을 뻗어 가리키고 있는' 그야말로 가장 역동적인 모습이다.


무엇보다도 봉준호의 표정이 모든 걸 말해준다. 어제의 모든 수상 장면 중, 거의 유일하게 봉준호가 격한 감정을 온 얼굴로 뿜어낸 순간이 바로 이 때다. 그러니 이 사진 말고 다른 걸 쓰려면 꽤 많은 핑계가 필요하다.




'새 역사 썼다'에 열광한 헤드라인


수상 소식이 전해진 직후 카톡을 통해 돌아다니던 받은 글 중엔 이런 것도 있었다. (오타도 안 고침)

@받
봉준호 감독 <기생충> 수상 예상 헤드라인 

<한겨례>
: 자랑스런 한국인의 기쁨, 북녘 동포도 함께 누렸으면 

<조선일보>
: 미국은 賞 주는데··· 病주는 중국에만 '쩔쩔' 

<경향신문>
: '헐리우드'에는 다양성 열풍인데 '충무로'는 나중에? 

<동아일보>
: [단독] 조국 일가 공소장 살펴보면 '기생충' 판박이 

<인사이트>
: 기생충 미국에서 번 돈이면 짜파구리 몇 그릇? 

<허핑턴포스트>
: 이 사람을 위한 병역면제 청원이 등장했다

<한국경제>
 : 제2의 기생충 나오려면 영화계 주52시간 근무 없에야

좋게 말하면 논조, 나쁘게 말하면 각사의 '기승전ㅇ'을 기가 막히게 살린 지라시여서 돌려보고 다 같이 웃었다. 실제 머리기사는 생각보다는 이 예상을 다들 잘 벗어나 줬다.


아래 다섯 개는 봉 감독이 '로컬'이라고 일컬었던 바로 그 오스카가 역사를 깨부쉈다는 걸 강조한 케이스. 깔끔한 레이아웃에 힘 있고 단순한 제목들이다.


개인적으로는 경향의 제목이 가장 엣지있다고 생각했다. 시상식을 지켜보면서 나 자신이 느꼈던 바로 그 감정이었다. "패러사이트" "오!" "패러사이트" "오?" "패러사이트" "또??" "패러사이트!" "뭐라고!???"

국민의 '오직 기생충을 위해'는 다소 자기중심적인... 느낌이 강했다. 한겨레의 '선을 넘었다'는 물론 이선균의 멘트를 인용한 것이겠지만, 김정은 문재인이 군사분계선을 넘는 장면이 어쩐지 연상된 것은 기분 탓일 거다.  

대부분 '역사를 새로 썼다'는 걸 강조했다.



아래 세 매체는 봉준호라는 개인에만 초점을 완전히 집중했다. 제목도 한결(혹은 너무) 단순하다.


한국일보의 레이아웃은 마치 잡지를 연상케 한다. 사각 프레임에 봉 감독 부분만 테두리를 딴 뒤 아래에 상 네 개를 늘어놓아 집중도를 한껏 높였다. 느낌표 네 개도 아마 그걸 의도한 것 같다.

동아는 '영화 같은...'이라는 약간 아련한 제목을 달고 필름 형식을 빌려 사진을 안에 넣었다. (온라인용 풀 제목은 '영화 같은… 봉준호 ‘기생충’ 아카데미 최다 4관왕') 지면으로 보면 그럴싸한데, 사진이 조금 작아 집중도가 떨어지는 느낌이 있다. 필름 테두리는 아무래도 레트로 열풍을 의식한 건 아닌 것 같다.

이 세 매체는 봉준호 개인에 초점을 맞춘 케이스



주요 일간지 8개를 제외하고는 아래 세 개도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각각 경제지, 스포츠신문, 지역지의 특성을 시원하게 살린 것 같았다. 한경은 경제지답게 '영화산업'을 굳이 대놓고 강조했고, 스포츠동아는 인물이 면봉 같아 보이는 사진을 택해 조금 아쉽지만 화려한 색감과 'BEST PICTURE'를 과감하게 살린 레이아웃, '미쳤다'라는 역시 과감한 제목도 재미있다. 부산일보는 '쓸어 담았다'는 표현이 부산답게 시원시원하다.

경제지, 스포츠신문, 지방지 각각의 성격을 잘 드러낸 1면들.



모든 신문이 똑같은 톱을 쓰는 이런 날만이, 조간을 주루룩 놓고 일직선상에서 비교할 수 있는 날이다. 각 매체별 1면 편집자들의 기싸움도 대단한 날이다. (당연히 눈에 보이거나 크게 느껴지진 않는다. 편집자의 바이라인은 신문 어디에도 드러나지 않으므로) 편집국장-부장-문화/국제부 에디터와 사진부, 미술팀까지 총출동해 머리싸움을 하는 날이니만큼 물론 독자들 입장에서도 골라보는 맛이 있는 날이다. 대부분의 뉴스는 온라인으로 보는 것이 편하고 빠르지만, 이런 날만은 가능하다면 지면을 구경하는 게 좋다. 번거롭다면 미디어오늘의 아침신문 솎아보기 코너에서 간략하게 맛보기도 가능하다.




+ 진지한데 재미있는 지방지 제목들


오랜만에 지방지 조간까지 죽 훑어보니 재미있는 사실도 많이 발견했다. 물론 전문지와 지방지들의 특성이기도 하지만, 정말로 관심사가 뚜렷하다.


전북은 봉준호가 문제가 아니라, 전주에서 찍은 영화라 1면이었다ㅎㅎ 전주 영상위원회에 따르면 기생충의 60% 이상이 전주에서 촬영됐다고 한다. 전주의 영화 맞네!

기생충을 전주에서 찍었구나...!!


TK 쪽은 매일신문만 빼면 전부 '대구의 아들'로 도배다. 이창동 감독도 배출한 데 이어 이번에 다시 영화의 도시로 우뚝 서게 됐다고 한다.  

충청, 제주, 강원은 큰 동요가 없지만(?) 강원도민일보는 1면 사진 제목을 깜찍하게 달았다. 봉 감독의 전작 '살인의 추억'은 연극 '날 보러 와요'가 원작이다. '날 보러 강릉 오세요'라는 매화사진 제목을 여기에 쓰리쿠션으로 연결시키는 건 내가 어제 하루 종일 봉 감독 뉴스에 잠식당해서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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