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생이탈출대작전
무료하기만한 직장 생활, 어느 날 팀장이 당신에게 “본부장님이 자네 프로젝트에 관심이 크시다”며 잘 해보라고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지나간다면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멍 했던 정신이 번쩍 들고 갑자기 일할 의욕이 솟는다면 당신은 범생이다.
과중한 업무에 허덕이고 있는데, 팀장이 당신에게 “옆 팀에 니 동기 일 잘 하더라, 팀에서 평가가 좋더라고” 하면서 은근히 비교가 되는 말을 한다면 어떨까. 확 자극이 되어 ‘나도 뭐라도 보여줘야겠다’고 주먹을 불끈 쥐고 폭풍 업무처리에 돌입한다면 당신은 범생이다.
물고기는 열심히 먹이를 쫓고 먹이가 되는 것을 피할 뿐, 자기가 물 속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범생이 역시 자기 할 일만 열심히 할 뿐, 자신이 범생이를 기르는 가두리 속에 있다는 것은 의식하지 못한다. (이전 글 참고 ‘범생이 권하는 사회)
범생이로 살다보면 지칠 법도 한데, 그들이 자신을 둘러싼 환경의 진실을 깨닫기는 커녕 나이가 들수록 그 고루한 생존방식에 더 집착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바로 미끼 때문이다. 누가 꿰어놓은 것인지도 모르게 눈 앞에 계속 나타나는 미끼 때문에, 물고기 아니 범생이는 자신이 어느 물길 속에 있는지도 모르고 쫓아가기 바쁘다.
그 미끼라는 것이, 배가 고프지 않으면 땡기지 않을 수도 있고, 자기 취향이 아니면 보고도 지나칠 텐데 범생이는 그런 것을 모른다. 그래서 누가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면 100% 낚여 버린다.
“너 밖에 없다. 잘 할 수 있지?” ⟵ 기대감 주입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거 밖에 못해? 실망이네” ⟵ 수치심 주입
“이번에 잘 하면 너한테 좋은 결과 있을거야” ⟵ 보상 약속
“이번에 못 하면 끝장이야” ⟵ 두려움 주입
“너만 믿었는데 이렇게 됐으니 어쩌냐” ⟵ 죄책감 주입
어떤 이들은 백날 이렇게 말해도 귓등으로도 안 듣지만, 범생이는 다르다. 범생이에게 이 말이 입력된 이상 그는 그 말을 듣기 전의 안락한 상태로 돌아가지 못한다. 생전 처음 해보는 일이어도, 사실상 별 관심이 안 가는 일이어도, 자신에게 부과되는 기대와 의무가 있으면 그는 충실하게 움직인다.
이렇듯 본래의 목표가 아닌 외부의 다른 유인에 의해 생겨나는 동기를 ‘외적 동기’라고 하는데, 모두가 아는 인센티브/패널티 제도, ‘잘한다, 못한다’ 수시로 평가하기, 경쟁심 자극하기 등이 모두 이에 속한다.
범생이들은 이 외적 동기에 반응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어린 시절부터 가정과 학교에서 ‘말 잘 들으면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는 ‘조건화’를 수없이 거쳐왔기에, 이것은 범생이에게 어려운 일도 놀라운 일도 아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어려운 것은, 아무 외적 동기가 없는데 무언가를 해야할 때이다. 수능 끝난 고3이 방종을 누리는 것 말고는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낼 지 모르는 것처럼, 천금 같이 기다려온 리프레쉬 휴가도 꽉 채워진 계획이 없으면 불안해서 못견디는 직장인처럼, 범생이들은 누가 무엇을 아무것도 시키지도 요구하지도 않을 때 오히려 혼란을 겪는다.
외적 동기와는 반대로, 무언가를 성취해야 하는 이유가 자신의 흥미나 호기심, 즐거움과 같은 내면에서 유발되는 동기가 ‘내적 동기’이다. 아이들이 게임을 하고, 어른들이 연애를 하고, 취미 생활을 즐기고, 여행을 떠나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 모든 일이 이에 속한다. 내적 동기로 하는 활동에는 아무 보상을 걸 필요가 없다. 활동 그 자체가 보상이기 때문이다.
범생이들이 외적 동기에 잘 반응하는 것은 큰 문제는 아니다. 그것이 그들의 성공을 가능케 했으니 함부로 버릴 것도 아니다. 그들이 직면한 가장 큰 위험은 정작 자신의 내적 동기를 잘 모른다는 것이다. 하도 외부의 신호에 주의를 오래 기울여서 자기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아차리는 감각이 퇴화되어 버린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대규모 조직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3~40대 성인들 중에 이런 사람들이 참 많은 것 같다. 나 역시 1인 기업으로 삶의 여정을 바꾸지 않았더라면 그 모습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무기력하게 눈 떠서 무거운 발걸음을 회사로 옮기고 설렘이 없는 일들 속에서 하루 종일 진을 빼고 기계처럼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것. 이 생활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아서 이런 삶 외의 인생은 상상도 못하고, 남들도 다 고만고만하게 사는데 나는 그나마 월급 많이 주는 좋은 회사 다니니 나쁘지 않다고 자위하는 것. 그게 내 삶이었다. 취업 이후에는 무얼해야 하는지 방향도, 기대도 없고, 점심 시간과 퇴근 후만 기다리며 살았으니 내가 나오든 회사가 내보냈든 어쨌든 결과는 같았을 것이다.
미끼로 끌어낼 수 있는 힘을 다 썼는지 나는 서른 즈음에 내가 가두리 양식장에 있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내 환경에 대한 자각과 동시에 그 전까지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거대한 내적 동기가 돌풍처럼 밀려와서 그 전까지의 삶을 다 쓸고 가버렸다. 그것은 단순히 취미 생활을 더 하고, 맛집을 찾아다니고, 해외 여행을 계획하고, 명품을 사면서 채울 수 있는 그런 동기가 아니었다.
‘나는 나로 살고 싶다.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지고 싶다. 하루를 살더라도 가슴을 꽉 채우는 보람과 충만함으로 살아보고 싶다’ 그 바람은 인생의 방향을 뒤바꾸는 열망이었다. 그 마음을 따르고 8년이 지났다. 그래서 나는 범생이를 탈출 했는가? 완전히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다. 대신 나는 ‘소확행’을 부러 찾지 않아도 내가 하는 일 자체가 보상이 되는 삶이 무엇인지는 알게 되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도록 세상이 변해가고 있다. 가장 강력한 외적 동기라고 할 수 있는 ‘안정성’ 자체가 위태롭게 흔들리는 사회를 맞고 있다. 인센티브를 위해 일할수록 재미와 몰입이 덜 하고 성과도 내기 어렵듯이, 안정성만을 위해 일할수록 자기 삶의 진정한 기반을 잃을 가능성이 크다. ‘진정한 기반’이란 외부 조건이나 환경 변화에 쉬이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삶의 철학과 가치가 자기 자신 안에 깊게 뿌리 내리는 것이다.
범생이로 사는 것, 지금까지는 괜찮았다. 앞으로는? 힘들 것이다. 좀 더 말 잘 알아듣는 로봇과 경쟁하지 않으려면 이제 남의 말만 따라다니는 삶은 멈추어야 한다. 제 손으로 미끼를 꿰고 그물을 던져 놓고 불확실성 속에서 견딜 수 있어야 한다.
누가 범생이인지, 범생이는 어쩌다 되는 건지, 범생이 연구는 끝났다. 이제 탈출만이 남았다. 어디로 가고 싶은가? 두렵지만 내 마음이 이끄는 곳, 그곳으로 갈 것이다. 촉을 미끼에 두지 말고 가슴에 두고 이제 떠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