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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정화 Jun 28. 2018

범생이 권하는 사회

범생이탈출대작전4

사람들은 누군가 자신을 범생이 취급하면 불쾌해한다. 주변의 누군가가 범생이처럼 살고 있으면 그 또한 답답해한다. 내가 됐든, 남이 됐든 범생이는 별 매력 없는 존재인 게 확실하다. 그런데 범생이를 최고로 우대하는 곳이 있다. 범생이에게 ‘넌 훌륭한 사람이고 꼭 필요한 존재’라고 칭송하고 앞으로도 계속 범생이로 살라고 독려하는 사람들이 있다.


범생이를 찾습니다



범생이를 바라는 이들은 사회 곳곳에 포진해있다. 특히 사람 사이의 관계가 ‘위~ 아래, 위위~ 아래’로 분명하게 갈리는 곳, 상하가 명확하면서도 그 관계가 하루 이틀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곳에 그들이 있다. 군대가 그러한가? 물론이다. 범생이가 가장 잘하는 일이 ‘까라면 까’이다. 범생이의 특징 중 하나가 불편하고 못마땅하게 생각되는 일이 있어도 그것을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거나 용케 감정을 잘 숨긴다는 것인데, 그런 면에서 군대 같은 곳에 범생이는 최적화된 존재다.


회사는? 회사야 말로 범생이를 가장 사랑하는 곳이다. 기업은 뽑을 수 있는 가장 유능한 범생이를 골라내기 위해 엄청난 돈을 들여서 범생이 선별 작업을 한다. 놀라운 점은, 기업 스스로 ‘우리가 바라는 건 범생이다’라고 절대 대놓고 말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군대는 ‘까라면 깔’ 준비라도 하고 가는데, 기업은 말로는 ‘창의적인 인재, 도전 정신을 가진 사람’을 찾는다고 부르짖어서 입사자가 나중에 느끼는 괴리감을 어디 호소할 데가 없게 만든다. 그래도 기업은 아랑곳할 필요가 없다. 자본주의의 중심에서 ‘취직’을 외치기 위해 준비된 범생이들이 알아서 각종 스펙을 휘황찬란하게 준비해오는 것을. 손 안 대고 코 풀 수 있는 이 체제를 기업은 바꿀 생각이 없다.


가정은 어떨까. 부모 스스로 ‘우리 집안에는 범생이가 필요하다. 아이가 범생이로 컸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부모는 ‘착하고 건강하게’ 자녀들이 잘 자라길 바랄 뿐이다. 그 숭고하고 보편적인 소망에 기생한 힘의 욕망으로 자신이 범생이를 키워낸다는 것을 어느 부모가 알 수 있을까. (참고: 무엇이 범생이를 만드는가) 그만큼 가정의 ‘범생이 만들기’는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일상적으로 진행된다.


생각난 예가 있다. 얼마 전 아이 유치원 놀이터 앞, 땀을 뻘뻘 흘리며 뛰노는 아이들에게 한 엄마가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주었다. 처음 맛보는 폴라포에 반한 아이들은 하나만 먹기가 아쉬웠는지 “또 먹고 싶다”를 연발하며 엄마들 벤치를 맴돌았다. 자기들끼리 한데 모여 쑥덕거리더니 한 명이 대표로 자기 엄마 앞에 나섰다.


“엄마, 우리 주말 지나고 다음주에도 폴라포 사주세요”   
“응, 그래”
하고 끝날 줄 알았던 대화에 어김 없이 조건이 추가 된다.
“OO이가 주말 동안 엄마 말 잘 들으면”
“네! 얘들아~ 나 말 잘 들으면 다음주에 또 사준대~~~”
“우와 신난다아(아이들 함성)”


물론 한 여름의 폴라포는 딜을 해서 얻어낼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그런데 그 장면을 지켜보던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저 아이는 과연 주말 동안 한 번이라도 ‘폴라포를 위해 엄마 말씀 잘 들어야지!’ 이런 생각을 할까? 저 엄마 역시 6살짜리 어린이가 폴라포를 생각하며 놀라운 자기 절제를 해낼거라 믿고 그런 말을 하는 걸까? 당연히 둘 다 아닐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런 의미 없는 조건을 거는 것일까.


이 거래는 아이가 ‘말 잘 듣는 착한 어린이’가 되는데 아무 영향을 발휘하지 못한다. 아이 입장에서 ‘역시 우리 부모님은 현명하셔’라고 존경을 느끼게 하지도 못한다. 이 거래가 효력을 발휘하는 때는 주말 사이 ‘아이가 말을 듣지 않는 상황’이 발생할 때이다. 그 전까지는 두 사람 모두 약속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당연한 일이다. 폴라포가 뭐라고), 아이가 어떤 ‘말 안 듣는 행동’을 했을 때 불현듯 엄마 머리를 스치는 것이다.  


“어, 말 안 들으면 엄마가 폴라포 안 사준다고 했는데”
“OO이는 빼고 친구들만 폴라포 사줘야겠다”

(과연 그 분이 주말 사이 몇 번이나 폴라포 찬스를 활용했을지는 알 수 없다)


좀 더 크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6세는 폴라포를 위해 잠시나마 착한 어린이가 될 수 있다. 그 의미 없는 조건은 이런 순간을 위해 내걸어졌던 것이다. ‘착하고 건강하게 자라라는’ 부모의 숭고하고 보편적인 뜻을 듣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부모 말을 안 들을 때 똑바로 듣게 하기 위해서, 기대 되는 행동과 다른 행동을 할 때 쉽게 통제 하기 위해서 걸어두는 장치이다.  



너무 오버해서 해석한 것일까? 아마 그 말을 한 엄마 자신도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그런 말을 얼마나 습관적으로 쓰는지 잘 모를 것이다. 이런 나 역시도 킨더조이, 마이쮸 찬스로 아이를 ‘부리고’ 싶은 유혹이 절체절명의 상황마다 오는 것을 보면!


힘과 돈의 욕망이 범생이를 부른다


갑질은 개념 없는 재벌이나 백화점을 제 집처럼 드나드는 사모님만 하는 게 아니다. 손톱 만한 힘이라도 상대보다 내가 더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이 내 뜻대로 따르길 바라고 강요하게 될 수 있다. 사람을 통제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이런 경향성 때문에 가정이든 어디든 ‘위 아래’가 분명한 곳이라면, 알아서 잘 따르는 범생이들이 아랫 사람으로서 선호된다는 것이다.


범생이는 윗 사람들이 가장 지키고 싶어하는 위계를 절대 흐트러뜨리지 않는다. 그들의 영향력을 넘보지도 않고, 자신의 불편함을 불편하게 끄집어내지도 않는다. 잘 참고, 시키는 대로 잘 한다. 그래서 오늘도 사회는 범생이를 권한다. 곳곳에서 범생이를 키워낸다.



사람들을 범생이로 만들어 가장 이득을 보는 자는 누구일까. 부모, 교사, 상사는 ‘아랫 사람’이 자기 말 좀 잘 들어봐야 일의 수월함을 조금 더 얻을 뿐이다. 자기 영향력에 대한 만족감, 존재감도 한 숟갈 정도는 챙길 수 있겠다. 고작 그것을 위해 그렇게 사람을 부리고, 통제하고, 힘을 써왔다는 사실에 맥이 빠진다.


반복 되는 일상에서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의식을 심는 자.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좋을 것이다’ 하는 세뇌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 하는 자는 진정 누구일까. 


기원전의 중국 역사학자 사마천은 <사기>에서 이렇게 적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열 배 부자면 그를 헐뜯고,
백 배 부자면 두려워하며,
자기보다 천 배 부자면 고용 당하고,
만 배 부자면 노예가 된다



돈의 속성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그럼 사람들을 말 잘 듣는 노예나 범생이로 만드는 것은 ‘천 배, 만 배 부자’인 사람들일까? 부자에게는 생산을 유지할 일꾼이 언제나 필요하니 일면 타당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사회의 보이지 않는 계급이 절대 흐트러지지 않도록 간교한 수를 쓰는 세력이 어딘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원인을 여기서 찾으면 우리가 범생이 세계에서 탈출하기는 그만큼 어렵다.



그 보다는 ‘돈에 굴하는 마음’, ‘돈을 최상위에 놓고 자기 삶을 그 아래로 두는 태도’ 이런 것들이 우리를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범생이로 만드는 것은 아닐까. 범생이를 권하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돈으로 권력이 점쳐진 세상 질서에 충실히 살아가기로 결심한 범생이 자기 자신이 아닐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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