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생이탈출대작전3
지구상에 하나 뿐인 고유한 존재가 별 특색 없이 남의 말만 잘 듣는 범생이가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전 글에 적은 대로 누구나 조금씩은 범생이라면, 날 때부터 모두 범생이 인자를 갖고 나오기라도 하는 것일까? 과연 범생이를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말이나 소 같은 포유류는 거의 태어나자마자 걷는다. 그래서 1년 넘게 아기띠나 포대기로 업고 다닐 필요도, 유모차로 싣고 다닐 필요도 없다. 어미로부터 얼마간 생존법을 익히고 나면 대부분의 동물들은 각자의 야생으로 흩어진다. 독립한 자연계의 생명들에게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는 그들의 감각과 본능에 맡겨진다.
인간은 다 자라서 성인이 되는데 최소 20년이 걸린다. 5년 전 출산 후 나는 완전 충격에 빠졌다. 이토록 인간이 미숙하게 태어나다니! 분홍빛 생물은 사람보다는 아기새나 외계 생명체 같았다. 으스러지게 잡으면 똑 하고 부러질 것 같은 존재. 이 미물이 대체 언제 사람이 되는가 내 관심사는 늘 그것이었다. 언제쯤이면 목을 가누고, 혼자 앉고 서고, 지 밥 지가 먹는지, 인간 대 인간으로 말이 통하는 날이 오긴 오는 지 긴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왜 이토록 미숙한 것인가. 더 귀엽게 태어나려고? 오래 돌봄 받기 위해서? 도저히 이해불가였다. 알고 보니 아기는 출생 이후부터 뇌가 폭발적으로 자라서, 혼자 걷고 제 숟가락으로 밥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커서 세상에 나오려면 임신 기간이 21개월은 되어야 한다고 한다. ‘헐 임신 기간이 두 배로…(털썩)’ 편한 육아와 ‘산모와 아기의 생존’은 공존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자연은 모두의 안전을 위해 인간이 미숙하게 태어나는 것을 선택했다.
갓 태어난 아기는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없다. 양육자의 돌봄이 없으면 인간 아기는 죽는다. 아기의 본능이 스스로에게 주는 지혜는 ‘배고플 때, 욕구 충족이 안될 때는 목청 터지게 울어라’ 정도에 그칠 뿐이다. 구강기가 되어 아기의 욕구가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싶어질 정도로 분화되어도 맘대로 놔둘 수가 없다. 어느새 쓰레기나 신발을 빨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 뜨거운 것을 아기가 한 번 꽉 잡아보게 놔둘 부모는 없을 것이다. 대신 부모는 수 없이 알려주고 가르친다. “안 돼. 이건 ‘앗 뜨거’해”, “앗 뜨거하면 ‘아야’해”, “위험하니까 그만해” 미숙하게 태어난 인간은 안타깝게도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감각과 본능 보다는 어른들로부터 주어지는 ‘Do or Don’t’의 끊임 없는 승인 속에서 행동을 학습할 수 밖에 없다.
어린 인간을 길러내는 좀 더 지혜로운 방법이 모두에게 있었다면, 범생이를 통과할 수 밖에 없는 이 운명을 피해갈 수 있었을까.
코칭의 철학에서 인간을 전인적으로 바라보듯이, 아이는 수동적으로 배우기만 하는 게 아니라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 세계를 정의해가는 온전한 존재라는 것을 모두가 믿을 수 있었다면, 조금 달랐을까.
문제는 아이가 충분히 자라도 본능과 경험으로 배울 기회는 계속 박탈된다는 것이다. 혼자 앉고 서고 지 밥 지가 먹다 못해 부모 키를 넘을 때까지 자라도, 아이는 여전히 온전한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한다. 언제까지나 어른 말을 들어야 하는 수동적인 존재에 머무른다.
말 좀 들어라
말 안 들어서 걱정이다
누굴 닮아서 이렇게 말을 안 듣니
내 말대로 안 하니까 실수하지
말 안 듣는 놈은 혼나야 돼
다음부터 말 잘 들을 거야 안 들을거야?
이렇게 말 안 들어서 나중에 뭐 될래?
누군가의 말을 ‘일방적으로’ 잘 듣도록 아이들은 수백, 수만번 귀가 따갑도록 그 말을 듣는다. 집에서도 듣고, 학교에서도 듣는다. 잘 들으면 그에 대해 보상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패널티를 받는다. 자기가 들은 말이 아니라도 형제나 친구들이 겪는 것을 보면서 간접적으로도 배운다.
말도 잘 듣고 착하네
말 잘 들어서 사주는 거야
말 잘 듣고 하니까 안 틀리고 잘 했지
말 잘 듣는 애들만 예뻐할 거야
말을 잘 들어야 훌륭한 사람 되는거야
오늘도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와
이렇게 쭈욱 적으니까 되게 못된 어른들이 아이들 부려먹으려고 하는 과장된 말 같아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조금만 깊게 들여다보면 어른들이 얼마나 많이 ‘내 말 잘 들어라’의 전제를 깔고 대화를 하는지 모른다.
아이고 철수는 안 그러는데 영희는 참 착하네 (철수 너는 왜 내 말 안 듣니)
그러면 나쁜 어린이지? (그러니까 이제 내 말 잘 들어)
너 자꾸 그러면 산타할아버지가 선물 안주신다 (내 말 안 들으면 국물도 없어)
아이고 너 때문에 못살겠다. 힘들어 죽겠어 (내 말 좀 잘 들으라고!)
이번에도 잘하면 OO해줄게 (계속 내 말 잘 들을 거지?)
‘기승전 내 말 잘 들어라. 그래야 착한 사람 된다. 그래야 성공한다’ 이 공식은 대한민국 아이들에게 하나의 생존법이 된다. 부모든 교사든 내 세계를 좌우할 파워를 가진 사람의 말을 잘 듣는 것. 그게 사는 데 더 유리하다고 믿게 된 아이는, 성마르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표현하고 요구했던 본능을 점차 잊어버린다. 자기 욕구를 알고서 그것을 충족하기 위해 목청 터지게 울든 떼를 쓰든 행동하고야 말았던 그 본능을, 성인이 된 우리가 무슨 노력을 해도 되찾기 힘든 그 능력을 잃고 만다.
범생이는 그렇게 탄생하고 길러진다. 다른 어떤 것보다 ‘남의 말’, ‘남의 눈’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열심히 자란다. 우리가 미숙하게 태어나 어쩔 수 없었다 해도 살면서 이따금은 이 질문을 받았어야 한다.
“니가 원하는 건 뭐니?”
“너는 어떻게 하면 좋겠니?”
“니 생각은 어떠니?”
세상의 질서와 약속을 하나씩 배우면서 이따금 자신의 내면과도 접촉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가슴 속에 자신만의 느낌과 생각이 계속 일렁일 수 있었다면. 그렇지 못한 결과로 우리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아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대신 좋은 직장, 좋은 집, 좋은 차, 안정된 삶, 남들이 모두 원하는 것을 자신도 원한다고 믿게 되었다. 그리고 조금 소름이지만 자기 아이도 ‘말을 좀 잘 듣기’를 바란다.
우리는 더 이상 미숙하지 않다. 누구 말을 잘 듣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라는 것도 이제는 안다. ‘가만 있으라’고 더 이상 가만히 있지만은 않는다. 다만 여기서 그치면 ‘말 안 듣고도’ 내 인생 멋지게 살 수 있는, 범생이 탈출은 할 수 없다.
이제는 나의 말을 좀 더 들어야 한다. 남의 말 안 놓치고 듣느라 꺼내보지 못한 내 본능의 말, 내 가슴 속의 말을. 이제라도 자신에게 물어보자.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