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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c Sep 12. 2020

나르시, 거울을 바라보다


나르시는 낙원에서 살았다. 모든 것이 안개에 싸인 듯 뿌옜다. 나르시는 물안개 속을 뛰어다녔고 폭신한 이끼와 보드라운 고사리 풀 사이에서 몸을 둥글게 말고 잠을 잤다. 나르시는 물방울의 요정이거나 안개의 정령인 것이 틀림없었다.


어느 날은 그 아늑하고 좁은 낙원에, 처음으로 조잘대는 목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르시는 자욱한 안개를 헤치고, 발바닥을 휘감는 덩굴들의 촉감을 느끼며 <그곳>으로 걸어갔다. 목소리가 들려오던 곳, 아직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깊숙한 곳이었다.


그곳에는 아주 맑은 연못이 있었다. 나르시의 발에 연못의 차가운 물이 닿자 나르시는 놀란 듯 몸을 크게 한번 떨었다. 그런데, 연못 속에서 뭔가가 어른거렸다. 나르시는 무릎을 꿇었다. 꿀렁이는 표면 아래 뭔가가, 어떤 살구색 덩어리 같은 것이 비쳐 보였다. 나르시는 더 가깝게 보려 고개를 숙였다. 숨결이 물결에 부딪히자 차가운 입김을 내뿜었다. 이 진흙 덩어리가 내쉬는 숨일 테다.


하지만 도대체 이 형체란 무엇이던가?


나르시는 궁금한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서는 눈을 깜빡였다. 물속의 그것도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속삭이는 목소리들 중 하나가 말했다.

"그건 눈이야."

나르시는 미소를 지었다. <그것>도 따라 미소를 지었다.

"그건 입이야."

나르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네 얼굴이야."

나르시는 화들짝 놀라 일어섰다. <그것>도 길쭉하게 일어섰다. 마치 물속 어딘가에서 물구나무서기를 하는 것 같았다.

"너는 여자야."

목소리들이 말했다.

<그것>은 나르시였다.


이제는 너무도 잘 보였다. 안개의 정령이 아니라, 그저 인간, 여자인 나르시였다.

그러자 세상을 감싸던 포근한 안개가 걷혀버렸다. 목소리들도 사라졌다. 세상으로부터 영혼이 떨어져 나왔다. 나르시는 그저 땅을 디디고 있는 한 명의 인간일 뿐이었다. 나르시는 이제 분별할 줄 알았다.


"너는 나야."

나르시가 샘물 속의 나르시를 보며 말했다.

나르시가 느낀 건 외로움이었다.


안개가 걷힌 자리에 바람이 불었다. 공기가 건조해졌다. 이끼들은 시들고, 고사리는 고개를 숙였다. 거듭 부는 바람에 서서히, 그리고 서서히 모든 것이 깎여나갔다. 결국 모래 바람이 불어올 때까지.

나르시는 그곳을 떠났다. 인간의 삶을 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가끔은 돌아와, 아직도 맑은 그 샘물을 들여다보았다. 분별하는 눈은 많은 결함을 발견했다.

"네 눈은 끔찍해."

그 눈은 절망적인 갈망을 담고 있었다.

"네 입은 비웃는 것 같아."

자주 냉소하느라 입가 옆에 난 주름이 거슬렸다.

"네 얼굴은 또 어떻고!"

얼굴엔 모래 바람에 맞아 패인 상처들로 가득했다.

나르시는 참지 못하고 일어섰다.

"내가 네가 아닐 수만 있다면."

나르시는 고개를 돌린 후에 떠나갔다. 샘물만이 존재하는 그 삭막한 귀퉁이로부터.


하지만-, "돌아오라!"

목소리들이 쉴 새 없이 합창하며 나르시를 불렀다. 어쩐지 나르시는 그 목소리를 거역할 수 없었다.

그러면 나르시는 자주 돌아왔다. 어둠 속에서 대화했다. 무릎을 꿇은 채, 맑디 맑은 샘물을 내려다보며.

"누구도 널 사랑하지 않을 거야."

"이렇게 속속들이 본다면."

"하지만 넌 사랑할 수 있니?"

"아니. 빛나는 표면마다 내 모습을 비춰 보게 될 거야."

"상대방의 눈동자 속에서도 널 보겠지."

나르시는 절망했다.

“영원히 이런 곳에 버려져야 하는가?”

이곳은 황무지였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어.”



그런데, 언젠가부터, “오라!”

어떤 다른 목소리들이 저 밖에서 나르시를 불렀다. 오라고, 걸어오라고 외쳤다. 나르시는 귀를 기울였다. 시간의 벌판으로 나오라고- 찾으라고- 떠나라고 목소리들이 외쳤다. 

“그래.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거야.”

나르시는 그렇게 떠났다. 황무지가 되어버린 옛 낙원을.

떠나며 남긴 발자국은 곧 모래폭풍에 쓸려 사라져 버렸다.


“오라!” 목소리들이 외치며 이끌었다.

나르시는 걸었다.

천국은 없었다.

나르시는 많은 일을 겪었다.

소설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구원도 없었고, 영원한 사랑도, 빛나는 성공도 없었다. "오라!" 합창하는 목소리들은 어떤 때는 작게, 어떤 때는 크게, 그리고 자주 사라졌다. 나르시는 널따란 벌판을 헤맸다. "돌아오라!" 그리고 "오라!"의 합창소리 사이에서 힘겹게 걸었다.





어느 날은 지천을 채우던 목소리들이 모두 멎었다.

침묵 속에서-,

'돌아서, 오라.'

나르시는 문득 생각했다. 나르시는 발걸음을 돌려 익숙한 곳으로 향했다. 풍경은 사뭇 달라져 있었다. 평탄한 황무지였었던 곳이 이젠 바람에 온통 깎여나가 있었다. 처음 보는 계곡이 나르시의 양 옆으로 솟아났다.

계곡이 깊어졌다. 나르시는 무너져 내린 회색 바위들 사이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곳에, 익숙한 샘물이 있었다.


나르시는 샘물을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혼자인 채로.

"태어나서 이 모든 슬픔과 기쁨을 겪게 하시고"

"인생의 바람이 이 거친 풍경을 조각하게 했나니."


샘물 속에 거대한 풍경이 비쳤다. 바람과 비가 조각한 거대한 지형.

패이고, 깎이고, 부식되고, 무너져 내린 회색 바위산이었다. 그리고 나르시가 샘물에 얼굴을 가까이 했을 때, 보였다. 어떤 날카롭고도 거친 조각상이.


조각상을 보라. 눈가의 패인 주름. 입가의 깎여나간 근육. 어린 시절에는 매끈했지만 이제는 세월의 흐름에 부식되어버린 피부를.


하지만 보라. 참으로 대단하지 않은가! 눈가의 패인 주름은 멀리 보았기 때문이었다. 입가의 깎여나간 근육은 많이 말했고 웃었기 때문이다. 까끌까끌한 피부는 시간 한가운데에 있었다는 증언이며, 거친 손은 수많은 과일을 따 온 역사다.


그래서 나르시는 거울을 보며 크게 웃었다.

나르시의 주름살과 흉터가 나르시의 웃음을 지탱했다. 거울 속의 조각상도 웃었다. 큰 웃음 아래, 수많은 계곡과 골짜기를 드러냈다. 그러자 연못으로부터 시원한 물안개가 솟아났다. 나르시는 그로부터 들이마셨다. 나르시는 눈을 감았다. 그 향기. 그리고 다시 눈을 떴다.


연못 안의 날카로운 귀퉁이가, 패인듯한 균열들이  누그러지며 하나의 형상으로 고였다. 참으로 아름다웠다. 이제 눈도, 입도, 얼굴도 아니었고 그저 나르시였다.

“너는 나야.”

나르시가 말했다.


뭔가가 깨졌다. ‘돌아오라’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숨죽였다. 이제 세상은 물안개 속에 고요했다.


그리고 자욱한 물안개 사이로, 별안간 별같이 반짝이는 수선화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연못 앞에 무릎을 꿇었던 나르시는 흔들리는 노란색 꽃들 사이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보았다.

불타는 샛노란색이 바위산의 밑둥으로 온통 번져가는 모습을. 이제 거칠고 숭고한 회색 바위산은 안개를 휘두른 채, 수선화가 가득 피어난 평야를 기꺼이 바라보고 있었다.


나르시는 비로소 외쳤다.

“여기로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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