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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급 사피엔스 Dec 01. 2024

재미난도서관, 10년 후 생일도 축하해

플롯을 타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OST가 흘러나왔다. 우아하다. 왁자지껄한 이 공간에 이공간이 펼쳐졌다. 플롯을 휘감고 나온 티 없이 투명하고 맑은 바람 소리가 모세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간다. 녹차를 아주 살짝만 우려낸 그 맑고 깨끗한 빛깔 같다. 바른 손 글씨 수상 시간. 수상을 예상치 못했던 한 아이는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입을 떡 벌리며, 휘둥그레진 큰 두 눈으로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해맑고 귀여운 에너지가 큐피트의 화살이 되어 가슴에 팍! 꽂혔다. 플롯 연주와 함께 오늘, 가장 기억에 남은 장면이다.


도서관잔치 행사가 있는 날. 그동안 학교도서관에서 마을도서관을 꿈꾸며, 한 발짝씩 내디딘 시간들. 그 10주년의 시간을 축하하며, 생일잔치와 작가와의 만남, 먹거리 장터, 10주년 글쓰기 등 다양한 행사들이 동시에 열렸다. 재미난도서관 운영을 담당하는 마법사들이 이런저런 행사들을 기획했고, 나는 일일 도우미로 먹거리 장터 음식을 준비했다. 내가 담당한 음식은 치즈감자채 전. 감자채를 얇게 썰어 미리 볶고, 그 볶은 감자채 위에 모짜렐라 치즈와 체다 치즈를 얹고, 다시 그 위에 강판으로 간 감자 반죽을 덮어 부쳐내는 방식이다. 복잡하고 손이 많이 가는 방식이라 생각해서인지 여기저기서 걱정들이 많다.


칼, 도마, 보울 등 몇 가지 물건들을 챙겨 재미난카페로 향했다. 아직 아무도 도착하지 않은 조용한 공간. 음악을 틀고 준비에 들어갔다. 장보기 담당이 미리 사다 놓은 재료들을 확인하다 감자에서 살짝 멈칫했다. 감자 4.8kg, 양은 맞다. 그런데 조림용 감자 사이즈다. 저 작디작은 감자들의 껍질을 벗기고 칼질을 하려면, 평소의 2배 정도 시간이 더 걸린다. 하지만 괜찮다. 손은 눈보다 빠르니까(?). 감자 껍질을 막 벗기는데, 나 같은 일일 도우미가 한 명 도착했다. 반가운 얼굴은 바로 음악부터 바꿨다. 나의 노동요 스타일이 조금 일반적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페이스가 벌써부터 말려가는 느낌.


한 명씩 속속 등장하는 일일 도우미들과 마법사들로 이곳은 시끌벅적한 공간으로 금세 변했다. 음료를 준비하는 속칭 음료부는 일관된 핫 초코의 맛을 유지하기 위해 계량에 꽤나 정성이다. 과학적이면서도 원시적인 방법을 사용한다. 보온병에 핫 초코를 한 스푼씩 떠 넣을 때마다 2인 1조로 환상의 앙상블을 선보이며, 리듬에 맞춰, 하나, 두울, 세엣, 네엣 숫자를 크게 외쳤다. 떡볶이 담당인 분식부도 무탈하게 야채를 썰고, 순조롭게 음식을 만들고 있다. 그런데 내 주위에만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병풍처럼 둘러쌓고 있는 것일까? 등 뒤로 따가움과 부담스러움이 내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외워싸고 있다.


2시간 40분이 남았다는 최초 시간 압박이 시작되었다. ‘2시간 40분이 남았다고? 아직 한참 시간이 남았는데, 굳이 시간을 알려줬어야 했나?’ 잠시 후 나에게 2명의 전담 인력이 배치됐다. 또 잠시 후 두 사람이 추가로 다가와 무엇을 도와주면 좋을지 틈틈이 체크한다. 스윽 한 사람이 또 다가와 쓰레기를 치워준다. 2시간 40분 동안 이런 패턴은 지속되었다. 설명할 수 없는 이 갑갑함은 무엇일까. 피부로 전해지는 이 무언가를 내년에는 꼭 적응하리라. 속으로 굳은 각오를 다져본다.


모든 음식 준비가 끝나고, 학교로 음식들을 날랐다. 학교에서는 이미 작가와의 만남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나는 먹거리장터 일일도우미. 오직 이곳만 신경 쓸 뿐이다. 먹거리장터에서 음식은 '생각 열매'로 구매할 수 있다. 학교에서 책을 읽으면 학생들에게 보상으로 '생각 열매'라는 것을 준다. 도서관잔치라 독서 장려의 일환으로 이런 시스템이 구축됐다. '생각 열매'가 부족한 학생들은 환전소에서 현금을 그냥 '일반 열매'로 환전해 음식을 구매할 수 있다. 교환의 가치는 '생각열매'가 '일반 열매'보다 1.5배 정도 높은 편이다.


학생들도 프리 마켓을 열었다. 저마다 사용했던 중고 물품과 직접 만든 물건들을 판매한다. 우리 아이도 프리 마켓에 참가했다. 판매할 물건을 대형 할인마트 장바구니에 넘치게 쌓아놓은 탓에, 아이 등굣길에 직접 낑낑대며 옮겨주었다(대부분 그대로 다시 가지고 돌아왔다). 이미 경험 많은 노련한 아이들은 무게나 부피가 작은 물건 위주로 판매를 하고, 다 팔린 제품들은 미리 품절 표시를 준비해 가격표 옆에 놓기도 했다. 프리 마켓 구매도 열매를 사용한다. 프리 마켓 주인장 학생들은 도서관잔치가 끝난 후 환전소에 가서 벌어들인 열매를 일정의 수수료를 떼고 진짜 현금으로 교환한다. 창조경제다!


먹거리장터는 떡볶이가 가장 빨리 동났다. 학생들에게 떡볶이는 영원한 인기 0순위다. 준비했던 샤인머스캣이 뒤이어 품절됐다. 음료부의 선전이었다(디저트류는 F&B 스타일로 음료부 담당이다). 가까스로 치즈감자채전도 다 팔렸다. 서른 장 정도 됐는데, 도서관잔치 종료를 임박해 가까스로 세이프했다. 어묵 꼬치는 조금 남았다. 안타깝게도 분식부의 떡볶이 조기 품절이 빛바랜 순간이었다(애초에 어묵 꼬치 120개는 너무 많았다).


딱 한 주 전 오늘, 회사에서 콘퍼런스 행사가 있었다. 호텔에서 100여 명의 인원을 데리고 행사를 진행했다. 리허설부터 본 행사까지 30여 명의 스텝들과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다. 대형 LED 무대와 조명, 빵빵한 사운드, 멋진 디자인 그래픽, 중계 카메라, 아나운서의 사회진행 등 전문 인력으로 세팅된 화려한 기업 행사의 모습이었다. 그로부터 딱 일주일 뒤 오늘, 도서관잔치의 모습은 아주 소박하다. 전문 인력 대신 기획과 운영의 주체는 학부모들이다. 하나하나 직접 그리고 가위로 자르고 테이프로 붙여가며 행사장을 꾸민다. 호텔의 코스요리 대신 일일 도우미 엄마, 아빠들이 어설픈 칼질, 계량으로 음식과 음료를 만든다. 고가의 DSLR 카메라를 갖춘 전문 사진사 대신 핸드폰을 쥔 부모들이 사진을 찍느라 분주하다. 일주일 사이에 자본으로 꽉 채워진 기업 행사와 부모들의 마음으로 꽉 채워진 도서관잔치를 경험하며,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희미한 어린 시절의 막연한 감상에 잠시 빠졌다. 마을 도서관으로 무럭무럭 성장하길. 10년 후 생일도 미리 축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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