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nny Im Jun 27. 2021

내 꿈은 찻집 할머니

오픈하면 이름 알려줄게. 꼭 놀러 와!

나? 난 은퇴하고 나면 작은 찻집 할머니 할래.


바닷가나 호수, 강 같이 물가 근처면 좋겠고, 초록 초록한 나무들에 둘러싸여서 어릴 적 읽었던 '비밀의 화원'처럼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아야 해. 


제일 중요한 건 벽돌벽에 담쟁이, 장미나 등나무 같은 넝쿨들이 타고 올라가 시간의 흐름과 바뀌는 계절을 느낄 수 있으면 정말 더할 나위 없겠다. (덩굴식물만은 정말 포기할 수 없다. 별표 땡땡!)


끼익 소리를 내는 클래식한 철제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향이 좋은 허브와 자잘한 들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작은 정원을 가로질러 갈 수 있는 디딤돌을 놓아야지. 비슷해 보이는 꽃들은 저마다 앞에 작은 이름표를 달아줄 거야. 그럼 사람들은 '아 잡초가 아니구나...' 하면서 한 번 더 눈길을 주고 혹여나 밟지 않게 조심하며, 어쩌면 쪼그리고 앉아 사진도 찍고 들어올 테지.


어떤 이는 날이 덥다고 손부채질을 하며 아이보리 파라솔 밑에 자리를 잡을 테고, 어떤 이는 어릴 때 나처럼 자외선 차단제도 바르지 않아 여행 이틀새에 벌써 까무잡잡해진 얼굴로 '일광욕하니 좋구먼 뭘~' 하며 쿨하게 아무 데나 엉덩이를 붙이고 털썩 주저앉을 거야.


메뉴판은 역시 손글씨에 서툴러도 귀여운 일러스트 몇 개 그려놓는 게 좋겠지? 차는 종류도 너무 많고 어려우니까, 처음 오는 분들을 위해서 이름 옆에 어느 나라와 브랜드 제품이고 어떤 재료들이 섞인 블렌딩인지, 카페인은 많은지, 단맛이 많이 도는지 아니면 새콤한지... 역시 간단하게라도 설명을 써줘야겠어. 


그날 날씨에 따라, 기분에 따라, 또 상황에 따라 어울리는 차를 추천하는 페이지도 하나 추가해야겠다. 나는 이럴 때 이 차가 도움이 되었는데 손님들한테도 그럴까?


따뜻한 원목 테이블에는 정원에서 딴 여리여리한 들꽃들을 꽂아놓고, 내가 직접 만든 티 매트를 미리 깔아 둘 거야. 음료 나오기 전까지 기다리는 게 제일 지루하니까, 연필이랑 엽서도 몇 장 두자. 그냥 내키는 대로 낙서를 끄적여도 좋고, 기념 삼아 같이 온 일행에게 써주거나, 아니면 나 자신에게 몇 마디 남기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요즘엔 연필도 알록달록 예쁜 게 참 많더라고.


내 물욕(?) 이랑 예쁜 기물에 대한 수집병은 아마 할머니가 되어도 변하지 않을 것 같다. 손님들도 원하는 다기를 고를 수 있게 큰 장식장에 진열해놔야겠어. 사람들마다 취향도 다르고 또 각자 풍기는 이미지랑 에너지가 다양하니까. 그리고 원래 자기 의지로 고르면 더 뿌듯하거든. 


원하는 분들은 직접 우릴 수 있게 우드 트레이에 다구들을 제공하고, 찻잎과 뜨거운 물은 정말 넉넉하게 내어 드릴 거야. 그 물값 얼마나 한다고... 내포성 좋은 차들인데 정 없게 한번 딱 우려서 컵 하나에 나오고 끝인 찻집은 나도 참 아쉬워했거든. 다들 똑같지 않을까? 


처음이라 잘 모르는 분들은 우려서 내어드려도 되고, 아님 뭐든지 처음이 어려운 법이지 젊은 친구들은 한번 해보면 금세 익히니까 내가 한번 시연을 해 드려도 좋겠다. 누군가의 '처음'을 함께 한다는 건 참 의미 있는 일이지.


차도 다구도 중요하지만 음악도 정말 중요해! 난 어릴 때 유행가요나 시끄러운 음악 트는 카페는 아무리 인테리어가 멋져도 다시는 가지 않았어. 귀가 너무 피곤하고 나중엔 머리까지 울리더라고. 그리고 원래는 가사가 좋은 곡들을 즐겨 들었었는데, 언젠가부터 슬픈 음악을 들으면 나도 모르게 같이 다운되어 버려서 내 마음이 단단하지 않은 날에는 최대한 피하려고 했던 것 같아. 자기 방어기제가 작동했달까.


뭐 여튼, 찻집에는 기쁘건 우울하건, 어떤 상태건 간에.. 다들 쉬고 싶어서 오는 건 분명하니까 좀 아쉬워도 가사가 없는 음악을 틀자. 역시 그럴 땐 재즈가 최고지? 뉴에이지는 너무 단순해서 졸리고, 클래식은 너무 각 잡고 우아하게 마셔야 할 것 같아 별로고, 재즈는 편하면서도 즉흥적이고 자유로운 한방이 있으니까. 에이 그냥 주인장인 내 마음대로 틀 거야.


다구들이 놓여있는 장식장 맞은편에는, 그만한 크기의 큰 책장을 두면 어떨까? 그림책으로 가득 찬 책장. 난 어릴 때부터 디즈니랑 픽사 빠였는데 할머니가 되어도 머리띠 쓰고 디즈니랜드 갈 것 같아. 


다들 머리가 복잡할 때는 눈에 글자가 안 들어오지 않아? 읽은 페이지 읽고 또 읽고.. 결국 챕터 1만 무한 반복하다가 결국엔 덮어버리지. 그럴 땐 사실 그림책이 최고거든. 단순한 스토리랑, 알록달록 예쁜 색감, 거기에 뜻밖의 감동이랑 교훈까지... 그냥 첫 장부터 끝까지 힐링 그 자체야. 등받이가 높고 폭신폭신한 패브릭 소파에 파묻히듯이 안겨서 쿠션을 하나 받쳐놓고 천천히 책장을 넘기다보면 잡생각도 다 사라질거야.  


주말엔 차를 조금 더 깊게 좋아하는 이들을 위해서 티클래스도 하고, 취향이 비슷한 단골들을 모아서 한 달에 한 번씩 다회를 열어야지. 바람이 시원한 봄이나 가을엔 밖에서 들꽃 차회를 해도 참 낭만적이겠다. 아 그날은 미안하지만 영업 안 할 거야. 문 닫고 우리끼리 마실 건데... 나도 한 번씩은 차마 시면서 에너지 충전해야지. 


혹시라도 처음 풋사랑 때문에 아파하거나, 앞으로 뭘 해 먹고살지 종잡을 수 없는 진로 때문에 고민하거나, 사회생활하며 막내로 이리저리 치이고 마음이 팍팍해진 친구들이 오면 주인장 맘이다~ 하고 달달한 밀크티를 끓여 줘야지. 귀여운 쿠키도 옆에 하나 놓아줄까. 귀여운 게 최고야!


시대에 안 맞는 잔소리만 할지 모르니, 입 다물고 있다가 혹시라도 인생 좀 더 경험한 나에게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하면 그땐 같이 신나게 수다를 떨어야겠다. '있잖아~ 라떼는 말이지...'라고 하면서.


지금은 야행성인데, 나이가 들면 밤샘은 역시 무리일까? 그럼 차 좋아하는 어린 다우들에게 내대신 한밤중 티클럽을 하라고 공간을 내어줘야겠다. 소소하게 모여서 차 마시고 수다 떨고 그림 그리고 책 읽고 그냥 걱정 없이 뒹굴뒹굴 나태한 시간을 보내다 갔으면 좋겠어. 그 친구들이 새로운 아이디어 가지고 오면 시즌별로 한정 모임을 만들어도 재밌겠네. 


있지, 난 정말 치열한 20대를 살아냈는데... 30대의 중반을 딱 찍고 나니까 내가 살아왔던 삶 외에도 다른 선택지가 많다는 걸 알게 되었어. 뭐 지난 시간에 대한 후회는 없어. 그건 그거대로 뿌듯하고 즐거웠거든. 그런데 내가 지금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는 이 일과 업계를 떠나야 하는 날이 오면, 그때는 꼭 찻집 할머니를 할래. 


찻집 이름도 이미 지어두었는데 그건 아직은 나만 알고 있을래. 오픈하면 꼭 제일 먼저 알려줄게! 


(오늘 멋대로 써 내려간 이 글은 내일 눈뜨면 손발이 오그라들어 사라질 것 같지만, 주말 핑계로 하루 종일 뒹굴거리다가 감성 낭랑한 그 무섭다는 새벽 2시에 쓴 글이니 그냥 그러려니 해줘. 잘 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