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흔적
남자들은 마음 안에 수많은 방 중 하나를 열어보면 그 안에 평생 잊지 못하는 첫사랑이 자리 잡고 있다는데 나는 남자도 아니면서 왜 아직도 그 한 켠을 내어주고 있는 걸까.
참 다정한 사람이었다. 단 한 번도 거절 없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나의 투정을 다 받아주었지.
나 때문에 배우기 시작한 서투른 한국어로 ‘힝내’ 라고 쓴 쪽지를 책상 앞 벽에 몰래 붙여 놓고, 유독 한자 공부를 어려워하던 날 위해 교과서 한 권을 통째로 병음을 찾아 하나하나 다 표기해 주었던 사람.
나 때문에 중국에 머물렀다가, 가족을 핑계로 귀국해 버린 내 뒤에도 혼자 남아 자리를 지켰던 너. 장거리가 지쳐갈 무렵 이미 이별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만나러 가는 길이라는 걸 알면서도 너는 푹 쉬다가 가라고 품을 내어 주었다. 평소 틈틈이 생각날 때마다 샀다는 소소한 물건들을 안겨주면서. 대체 너는 마지막까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어린날 만나서 서로 더 주지 못해 안타까워했던 순수한 사랑이었다. 타지에서 홀로 지내는 내게 너는 연인이자 친구이고 가족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람이라고 망설임 없이 말할 만큼 너는 나였고, 나는 너였다.
이제는 같이 보냈던 시간만큼 시계가 이미 두 바퀴가 돌아갔는데, 가끔씩 그때의 우리가 보인다.
분명 방문을 꼭 잠그고 한 번도 열지 않았는데, 문틈으로 작은 조각이 새어 나온다.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티셔츠를 주워 입다가 흠칫 놀란다.
‘뒤집힌 티셔츠에 상표 쪽으로 머리를 집어넣어봐. 그럼 안 뒤집어도 똑바로 입을 수 있어.’
옷 뒤집어 정리하는 게 그게 그렇게 귀찮냐며 놀려 댔는데, 이제는 나도 모르는 사이 그렇게 옷을 입고 있다.
감기가 올 것 같으면 목에 작은 손수건을 감고, 생강을 사다가 얇게 편을 썰어서 끓인다. 설탕을 담뿍 넣고 노란 고구마를 무심하게 깍둑 썰어 넣고 뭉근하게 끓인다. ‘어? 생강차에 웬 고구마야?’ ‘아프면 입맛 없으니까 속도 채울 겸. 같이 떠먹어봐.’ 너에게 들은 말 고대로 읊는다.
어린 날 뜨거운 여름에 만나 초록색으로 기억되는 사람. 첫눈에 서로 알아보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결국엔 내가 되어 버린 사람. 이제 너는 없는데 나에게서 너를 본다.
지나간 사람이 남긴 기억은 자꾸만 새어 나와 흔적을 남긴다. 참 다정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