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유학생활을 할 때부터 엄마가 피아노와 성악을 가르쳐주던 초등학생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태어나서 한 번도 빛을 본 적이 없는 시각장애인이었다. 그 아이의 부모 역시 두 분 다 시각장애인이었고 오로지 할머니 한 분만 앞을 보실 수 있는 유일한 식구였다.
내가 막 유학을 떠났을 즈음, 즉 엄마가 학교 앞에서 음악학원을 할 당시에 그 아이의 엄마가 학원에 찾아와서 말하길, 아이가 노래하는 것을 너무 좋아하는데 맹인에게 음악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그 후로부터 매주 그 아이의 집에 방문해서 발성과 피아노를 가르쳤다. 방학 때가 되면 나도 가끔 따라가서 할머니의 집밥도 얻어먹곤 했고.
그러다가 완전히 한국에 들어오게 되고부터는 나도 자연스레 그 아이와 매주 영어 수업을 하게 되었다. 봉사로 시작했지만 나에게는 가장 첫 제자이자 가장 오랜 기간 가르쳤던 아이였다.
일단 하겠다고는 했는데, 처음부터 너무나 막막했다. 나도 열여섯, 열일곱 살 일 뿐이었고 여태껏 누군가에게 영어를 가르쳐 본 적이 없을뿐더러 기본적으로 우리 둘은 다른 문자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점자는 정말 천재가 아니고서는 배우기 힘든 문자였다. 일차로 빈종이를 특수판에 끼우고 송곳 같은 도구로 원하는 점자를 종이에 찍어낸다. 그 후에는 그걸 뒤집어서 올록볼록한 부분을 만져서 읽어야 하니 처음 찍을 때부터 거꾸로 찍어내야 바르게 읽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그 아이도 알파벳을 점자로 알지 못해서 내가 hello를 소리로 가르쳐주면 종이에 한글점자로 “헬로 - 안녕"을 찍으며 단어장을 만들었다. 오로지 소리에만 의존하는 수업이었다.
발음을 하려면 입모양과 혀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모방하는 것이 중요한데 내 얼굴을 볼 수 없으니 아이의 손을 내 얼굴에 올려놓고 더듬어서 입의 모양새를 느껴보도록 하는 게 최선이었고 최대한 구체적으로 느낌을 설명하는 방법을 연구해야 했다.
그러다가 안 되겠다 싶어서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가 함께 점자 알파벳을 배웠다. 아이와 함께 점을 찍어가며 A, B, C, D 하나씩 연습했고 그제야 우리는 같은 문자를 쓰게 되었고 수업에는 속도가 붙었다.
일정 수준이 되자 리딩이 많이 필요한 시점이 왔는데 영어점자로 된 동화책은 찾아볼 수가 없으니 내가 영어동화책을 사서 소리 내어 읽어주면 아이가 점자로 찍어서 조금씩 조금씩 점자영어책을 완성시켰다. 한 장이 너덜너덜 해 질 때까지, 달달 외울 때까지, 우리에게는 단 한 권뿐인 점자영어책이었기에 세상 귀하게 여겼다. 열악한 환경이었어도 아이는 정말 즐겁게 공부했고 어느덧 6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중학생이 된 아이가 내게 말했다.
“선생님, 저는 영어를 잘해서 대학에 가고 싶어요.”
“대학? 대학은 왜? 공부하고 싶은 게 있어?”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당시에만 해도 시각장애인이 대학을 간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인프라도, 인식도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대학을 못 가면 안마를 배워야 한대요. 안마는 손이 아프잖아요.”
덤덤하게 말하는 아이가 되려 안쓰럽게 느껴졌고 눈물이 차올랐다. 어쩌면 이럴 때는 아이가 앞을 보지 못하는 게 다행이었을까.
‘너를 동정하는 게 아니야, 그저 네 앞에 닥친 현실이 마음 아플 뿐이야.’
“그렇겠구나. 영어공부 열심히 해서 대학도 가고 외국도 나가봐야지!”
애써 눈물을 삼키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이미 꽤 오랜 기간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닥치는 냉혹한 현실을 곁에서 봐왔기에 마음이 아렸다. 과연 너에게 대학이라는 문이 열릴까? 과연 너에게 해외여행이라는 기회가 생길까? 당장 버스만 타더라도 아저씨들이 왜 장님을 데리고 집 밖에 나오냐며 나에게까지 손가락질을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