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활. 누구에게나 설레는 시기겠지만 나에게는 더욱 특별했다. 한국에 온 뒤로 또래를 만나 본 경험이 없던 내가 왠지 진정한 친구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굉장히 설렜다. 법적으로도 성인이지 않은가! 왠지 자유로울 것 같은 그런 느낌적인 느낌 때문에 3월이 너무나 기대됐다.
그러나 막상 3월이 됐을 때 내 대학생활은 기대와는 달랐다. 여전히 생활비는 벌어야 했고, 매 학기 장학금을 받지 않으면 다음 학기가 기약이 없었기 때문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미국에서 귀국한 사촌언니까지 사정이 생겨 우리 집에 살게 되었고, 코딱지만 한 원룸 오피스텔에 엄마, 나, 사촌언니, 동생까지 네 명이 복작복작 살고 있는 상황이 펼쳐졌다. 동생이 벗어던진 교복과 책가방, 언니가 미처 풀지 못한 짐가방에 늘어난 내 전공책들까지, 집은 매일 아수라장이었고 누울 자리를 마련하기도 힘겨웠다.
엄마는 안 되겠다 싶으셨는지, 같은 건물 바로 위층의 투룸을 보러 가셨다. 기존의 월세 60만 원에서 110만 원으로 50만 원이나 더 내야 하는 조건이라 선뜻 결정하기 어려우신 듯했다.
고민 끝에 엄마는 나와 사촌언니를 불러 앉히시더니,
“이제 너희도 성인이니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어야 해. 새록이는 투룸으로 가면 방 하나 줄 테니까 30만 원 월세를 부담하고, 언니는 막내랑 같이 방을 써야 하니 20만 원을 부담해 주고. 난 거실 소파에서 생활하면 되니까 지금보다는 나을 거야.”
그리하여 월화수목은 9시부터 3시까지 수업을 몰아서 듣고 3시 이후부터는 과외를 했다. 과외가 단가가 제일 높아서 효율적이었지만 들쭉날쭉하고 자주 취소가 되기도 해서 금토일은 고정으로 주말알바를 뛰었다. 이따금씩 과외가 펑크 나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항상 못 나가던 소모임도 참석하고, 술자리도 참여해 볼 수 있어서.
사실 처음에는 엄마가 농담을 하시는 줄 알았다. 우리에게 돈을 받아서 따로 모아 주시는 건 아닐까 하는 희망도 가졌었다. 그런데 우리가 꼬박꼬박 냈던 방값은 고스란히 진짜 월세로 나갔다. 무슨 엄마라는 사람이 이러나, 우리가 앵벌이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쓰는 지금, 그때 엄마의 심정을 떠올려보면 마음이 저릿하다. 독립적으로 커야 한다는 핑계 속에 아이들에게 월세를 보태달라고 해야 했던 그 심정은 말로 다 하지 못할 것 같다.
그때는 우리 모두가 힘든 순간이었다. 나는 나대로, 언니는 언니대로, 동생은 동생대로, 각자의 바뀐 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버둥거렸고, 엄마는 그런 우리를 다 끌어안고 가느라 하루에 두 시간 눈 붙이며 생활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