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느쾀 Jul 19. 2018

가장 따뜻한 마음에 끌린다는 것

우린 모두 가오나시일 수도.

초등학교 2학년 즈음 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기억나는 장면이라곤 치히로의 부모님이 돼지로 변하는 장면밖에 없었다. 우연히 페이스북으로 장면들을 보게 되었는데, 그 아름다운 색감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래서 아예 한 편을 다 보기로 결심했다. 어렸을 때 봤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지금 본다면, 어떤 느낌일까.  

충격과 공포의 장면

15년 만에 다시 만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더 이상 내 기억 속에 있던 단순한 애니메이션이 아니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배경이 옛날 일본의 신주쿠 같은 지역의 홍등가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나도 이 해석은 알고 영화를 봤고, 난 다른 의미를 찾아보고 싶었다. 어렸을 때 그냥 지나쳤던 것들을 다시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영화를 보던 중 가오나시가 눈에 들어왔다.

가오나시는 15년이 지난 지금 봐도 귀여웠다, 가 아니라, 난 가오나시가 왜 치히로를 따라다니고, 집착하는지 궁금해졌다. 목욕탕에 들어와서 행패를 부리고, 사람들을 집어삼켰던 가오나시. 어렸을 땐 마냥 가오나시가 음흉한 괴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음흉한 괴물을 넘어서, 치히로를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스토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15년이 지난 지금, 난 비로소 가오나시를 이해할 수 있었다.

가오나시의 일본 해석은 바로 '얼굴 없음'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가오나시는 가면을 항상 쓰고 다녔나 보다. 얼굴이 없는 가오나시는, 주변 환경을 흡수해서, 그 환경을 얼굴로 삼는다. 생물을 삼켜서, 생물의 목소리나 모습을 띌 수도 있지만, 마음을 흡수하기도 한다.

이러한 흡수는 가오나시의 의지와는 별개로 작동되는 듯하다. 그 환경이 아무리 좋지 않아도, 가오나시는 어쩔 수 없이 흡수하게 된다. 치히로를 따라 목욕탕에 들어와서 음식을 끝없이 먹어치우고, 행패를 부리던 가오나시는, 돈에 눈이 멀어버린 목욕탕 사람들의 마음을 본의 아니게 흡수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마치 맑은 물에 검은색이 조금이라도 섞인다면 그 물은 어쩔 수 없이 더러워지듯이.

가오나시는 순수한 마음에 처음으로 이끌렸다. 더러운 흙탕물만 가득한 그 세계에 처음으로 맑은 마음이 들어온 것이니까. 가오나시는 오래전부터 치히로를 기다렸을 수도 있겠다. 가오나시는 자신의 얼굴이 되어줄, 따뜻하고 맑은 마음을 갖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치히로가 그 세계에 발을 디디기 전부터.

가오나시는 치히로의 친구가 되고 싶었다.

이 둘은 함께 유바바의 쌍둥이 자매 제니바의 집으로 향하게 된다. 유바바의 세상과는 달리 탐욕은 찾아볼 수 없고, 소박하고, 따뜻한 제니바의 집에서 가오나시는 자리 잡는다. 치히로만큼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는 제니바의 곁에서 가오나시는 원하는 얼굴을 갖게 되었다.


우린 늘 치히로를 찾고 있다

가오나시는 놀랍도록 우리와 닮아있다. 우린 늘 마음이 따뜻하고 순수한 사람들을 좋아했다. 그런 사람과 친해지고 싶고, 마음을 나누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 사람과 함께하면서 닮아가고 싶어 한다. 하지만 우린 유바바의 세계 같은 '차가운 도시'에서 살고 있다. 욕심이 가득하고, 물질 만능주의의 세상.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린 그런 세상의 일부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 항상 찾고 있었던 것 같다. 치히로 같은 마음을 말이다. 그래서 간혹 뉴스에 나오는 의인에 열광한다. 잃어버린 치히로를 찾은 건 아닐까 하고. 하지만 뉴스에 나올 만큼 그 존재는 희귀하다.


우리는 치히로를 찾고 있다. 하지만 치히로는 여전히 행방불명이다.

우린 언제쯤 원하는 따뜻한 얼굴을 찾을 수 있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레이디 버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